서언(조위총)
서언(徐彦) 금나라 사신.
[ 무신정권 기간(1170~1270) 중 일어난 민란 ]
조위총의 난 (趙位寵의亂)
1174년(명종 4)에서 1176년(명종 6)까지 약 3년 동안에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서경유수(西京留守)였던 조위총은 국왕을 폐립하고 문신을 학살해 전횡을 일삼던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을 타도하고, 자신과 서경(西京)주 01)인의 세력을 펴기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윤임첨과 두경승 등이 이끄는 관군의 활약으로 끝내 실패하고 만다.
서경유수 조위총은 1174년에 정중부 등의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동계(東界)주 02)와 북계(北界)주 03)에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라.”고 격문을 돌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로 인해 현담윤(玄覃胤)을 도령(都令)으로 하는 연주성(延州城, 영월 부근)을 제외한 절령(岊嶺, 자비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대해 개경의 조정에서는 평장사(平章事)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내시예부낭중(內侍禮部郎中) 최균(崔均)을 동북로 지휘사(東北路指揮使)로 삼아 여러 성에 가서 타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절령역에서 윤인첨이 이끄는 정부군은 때마침 부는 폭풍과 폭설 때문에 서경병에게 대패하여 서경병이 개경에 육박할 정도였다. 적에게 포위된 윤인첨은 적과 싸워 죽고자 했으나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정균(鄭筠)의 만류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돌아왔다.
한편 동계(東界)주 02)에서는 조위총의 장수 김박승(金朴昇)과 조관(趙冠) 등이 화주영(和州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낭장 이거(李網)가 문을 열어주어 병마사 대장군 이의(李儀)와 병마부사(兵馬副使) 최균이 죽었다. 또한 두경승(杜景升)이 동로에서 서로로 길을 돌려 북계의 몇 개 성을 점령했으나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절령에서 승리한 서경병이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의방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서경병을 격파하였다. 당시 그는 서경인 상서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목을 베어 저자에 내걸었다. 최숙(崔淑) 등은 적진을 기습해 서경병을 크게 무찔렀다. 이처럼 승세를 타서 대동강까지 쫓아 서경의 성밖에서 진을 쳤으나 이의방이 이끈 군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조정에서는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두경승을 후군총관사(後軍摠管使)로 삼아 서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관군이 출정 준비를 하던 혼란 중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의 명을 받은 승려 종감이 이의방을 죽인 일이 발생했다. 명종이 전중감(殿中監) 유응규(庾應圭)와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를 조위총에게 보내 이의방의 일파가 제거되었음을 내세우며 반란군의 명분이 약해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조위총군의 기세는 여전했다.
그러자 윤인첨은 조위총의 심복들이 있는 연주(漣州, 평남 개천)를 공격하면 서경이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연주로 향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별로 순조롭지 못하자, 명종은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중 사정유를 서경에 보내어 조서를 내려 타일렀다.
조위총이 항복하기를 청했다가 다시 반발하자, 후군총관사 두경승이 연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다음해 6월에 이르러 윤인첨은 드디어 군사를 서경으로 돌려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을 폈다.
주변의 성과 연락이 두절된 조위총은 김존심(金存心)·조규(趙規)를 금나라에 보냈으나 김존심이 중도에서 조규를 죽이고 조정에 항복하였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徐彦)을 금나라에 보내 정중부·이의방의 의종 시해 사건을 알리고,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도리어 서언을 잡아 고려로 보냈다.
그 뒤 서경에서 공방전을 1년 동안 되풀이하다가 1176년(명종 6) 6월에 이르러서 윤인첨은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두경승은 대동문(大東門)을 공격해 서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목을 베고 그의 무리 10여 명을 가둠으로써 조위총의 반기는 22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조위총이 죽은 뒤에도 서북민의 항거운동은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서경이 함락될 때 도망한 장정(壯丁)들을 중심으로 1177년(명종 7)에 재봉기했다가 1년 6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며, 1179년(명종 9)에도 서북면지병마사 이부(李富)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봉기했다가 곧 진압되는 등 서북민들은 조위총의 거병을 시작으로 끈질긴 항쟁을 계속했다.
조위총의 난은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거병이었으나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주체적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위총의 거병은 무신 집권 기간에 각처에서 일어난 민란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