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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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대구 출신의 미술가. 본관은 달성서씨. 서동진(徐東辰)[1900~1970]은 1900년 1월 16일 지금의 대구광역시 중구에서 태어났다. 호는 소허(小虛)이다. 지역 미술가들과 함께 대구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 모임인 영과회를 설립하였다. 서동진은 대구 계성학교[현 계성중·고등학교] 재학 중 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하였다. 이후 1924년 서울의 휘문고등보통학교[현 휘문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미술 연구를 시작하였다. 1925년에 귀국한 서동진은 15년간 교남학교에서 미술 교사로 재직하였다. 서동진은 1927년 인쇄소 겸 상업미술 전문 회사인 대구미술사를 설립하였다. 대구미술사에서 이인성, 김용조 등의 미술인을 배출하였다. 서동진은 1927년 대구 미술인들과 함께 영과회를 창립하였다. 1927년에 첫 번째 개인전, 1928년에 두 번째 개인전을 열었다. 서동진은 이후 대구를 벗어나 서울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서동진은 1930년에 향토회를 창립하였다. 이후 화업을 중단하고 경북청년회, 철공협회 등의 회장직을 수행하며 사회사업가의 길을 걷게 된다. 서동진은 한국전쟁 시기에 대구화우회를 창립하기도 하였다. 휴전이 되자 서동진은 대구 원화학원의 재단 이사 등 교육의 진흥에도 힘썼다. 서동진은 1954년 대구 갑구의 민주당 후보로 제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1960년에는 제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후 군사정권이 들어서자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서동진은 1970년 1월 15일 사망하였다. 서동진의 주요 작품으로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한 「역부근」, 「역구내」, 「오후풍경」, 「뒷골목」 등이 있다.


소허(小虛) 서동진(徐東辰·1900~1970)은 '대구 근대 미술의 대부'로 불린다. 그는 대구 최초의 서양화가인 이상정의 제자로 오늘날 종합예술센터라고 할 수 있는 '대구미술사(大邱美術社)'를 설립해 서양화 재료와 서양 화풍을 대구에 보급하고 전파했다. 또 대구 최초의 한국인 서양화가 단체이자 동요부와 시가부가 공존하는 종합예술단체인 영과회에 참여한 데 이어 미술단체인 향토회 창립을 주도하는 등 대구 근대화단을 이끌었다. 천재화가 이인성과 김용조의 스승이기도 한 그는 여러 대구 출신 화가들을 가르치고 등단시켰다. 중년에는 예술가의 길을 계속해 걷지 않고 교육자로 변신했다가 다시 정치가로 변모해 재선 국회의원을 역임하는 등 한국 정치사회 변혁 운동에 매진했다.

서동진의 삶과 생애

서동진은 1900년 대구 공평동 21-1에서 대구 유지인 서기수와 윤매주 사이 3남으로 태어났다. 윤매주는 대구교육부인회를 설립한 신교육운동가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했다. 그는 서화가로 이름을 떨친 죽농 서동균과 시인 이상화와 한 살 터울의 친구다. 죽농과는 대구 해성학교를 함께 다녔으며, 이상화의 큰 형인 이상정의 제자이기도 하다. 영과회와 향토회에서 상화와 함께 활동했다.

서동진은 1918년 계성학교 입학 후 이듬해 벌어진 3·8대구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퇴학당한 뒤 서울 휘문고보에 재입학해 1924년에 졸업했다. 계성학교 재학 시절에는 미술교사였던 독립운동가 이상정에 사사했고, 휘문고보 재학 때는 우리나라 제1호 서양화가 고희동에게 그림을 배웠다. 휘문고보를 졸업한 그는 다시 대구로 돌아와 계성학교에서 약 6개월 동안 교사로 재직 중 일본으로 2년여간 유학을 갔다. 당시 구체적인 행적은 확인할 수 없지만, 귀국 후 활동으로 미뤄 봐 미술공부를 하며 수채화와 판화제작 기법을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귀국 후 그는 교남학교(대륜고 전신)에서 26년부터 14년간 무보수로 교사생활을 했다.

서동진 '설경', 1920년대그는 재직 중 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해 네 차례(제7·8·10·11회) 입선을 한다. 입선작 '역 부근'(1928), '역 구내'(1929), '오후의 풍경'(1931), '뒷골목'(1932)은 모두 수채화 작품이다. 또 세 차례 개인전을 열었다.

첫 번째 개인전은 1927년 6월11~13일 대구 조양회관에서 열렸는데 풍경화와 인물수채화 등 45점을 출품했다. 당시 신문은 그를 "사계 일류의 청년 화가"라고 소개하고 "대구에서 수채화 전람회가 처음인 만큼 관람자가 매일 무려 1천명에 달하는 성황을 이루었다"고 보도했다. 개인전의 주최는 동아일보 대구지국장이었다.

제2회 개인전(1928년 7월7~9일) 또한 동아일보 대구지국이 주최했다. 당시 신문에선 그를 '대구 양화단의 중진작가' '조선미술계에 일대 활약을 시(始)하는 화백'으로 예우했다. 무영당 백화점 사장 이근무가 후원했으며, 일반인 작가 6명이 14점을 찬조 출품한 것이 눈에 띈다. 김용준, 박명조, 최화수 등 대구의 화가와 일본인 화가 하마무라(濱村文雄) 등이 참여했다. 세 번째 개인전은 2002년 유족(서정섭)의 증언으로 확인됐다. 대구 최초의 백화점인 이비시야 백화점에서 1935년 가을에 열었다고 했지만, 전시자료와 기록이 없다.

서동진은 1927년 대구 수동 62번지에 대구미술사를 설립한다. 주택과 상가를 겸한 복합시설로 건물 규모가 160여 평(528㎡)에 이르렀다. 29년에는 미술교습소로 간판을 바꾸고, 수채화 보급과 미술지도는 물론 석판 인쇄, 도안 제작 등 인쇄시설까지 갖춰 대구문화의 중심 역할을 했다. 서동진은 또한 1927년 이상춘, 이갑기 등 경향파가 설립을 주도한 영과회에 참여했다가 탈퇴하고, 1930년 그와 같은 회원이던 이상화, 김용준, 박명조, 최화수 등과 함께 이념성을 가진 한국 최초의 서양화 단체인 '향토회'를 발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서동진은 예술가로서의 활동보다 정치 등 사회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대구금융조합 감사, 영남일보사 취체역(이사),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 경상북도지부 위원장 등을 역임하면서 지역 경제와 문화창달에도 힘썼다. 1950년 6·25전쟁 중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하고 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58년 또 낙선한 그는 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대구시 갑 선거구에 나와 당선돼 외교통일위원장을 역임했다. 하지만 61년 5·16군사쿠데타 이후 정계를 은퇴하고, 대구에서 노후를 보내다 1970년 별세했다. 청년기 독립운동을 하다 미술에 심취해 예술가와 교육자의 삶을 살면서도 조국의 미래를 걱정한 그는 제국주의와 독재와는 거리를 둔 민주주의를 신봉한 인물로 보인다.

서동진 '뒷골목', 1932◆서동진의 작품 세계와 평가

서동진은 주로 1920~30년대 대구 부근 거리와 마을 등 풍경을 주제로 삼았다. 보경사나 법주사와 같은 사찰 풍경도 그렸다. 해금강 등 동해안 명소, 자화상과 소녀의 모습 등 다양한 소재를 다뤘다. 특히 24세와 27세에 그린 '자화상'은 '모던 보이'를 연상시킨다. 전자는 지금과 같은 댄디한 머리 스타일에 양장을 한 채 나비넥타이를 맨 모습, 후자는 흰 와이셔츠 깃을 올린 모습에서 유행을 선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서동진의 작품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현장에서 사생한 시골 풍경이다. 당시 거리나 건물, 생활상, 패션 등을 아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황금기였던 그의 1930년대 작품들은 현재 거의 남아있지 않으며, 조선미전에 출품했던 도판으로 당시 서동진의 작품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제7회 조선미전 입선작 '역부근'은 대구역 앞에 서 있는 마부의 모습과 그 주변에 보이는 앙상한 나무들, 그리고 바위 옆에서 한복을 차려입은 남녀가 대화하고 있는 장면을 수채화로 표현했다. 무딘 붓질이 눈에 띄며, 대상을 화폭에 옮겨놓은 듯하다. 작가는 작품 속 바위를 칠성바위라 했다. 대구역 뒤 칠성바위는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서동진은 조선인 노동자들이 말에게 먹이를 주며 바위에 기대 휴식을 취하는 모습을 보고 피지배의 입장에서 민족적인 안타까움과 서러움을 느껴 화폭에 옮겼다고 했다.

서동진의 두 번째 개인전은 첫 번째보다 작품 소재가 확대됐다. 공장과 교회, 기차역 등 소재를 선택한 시야가 넓어졌으며, 인물화도 전보다 훨씬 다양해지고 작품 수도 많아졌다.

제10회 조선미전 입선작 '오후의 풍경'은 개천에서 빨래하는 두 여인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제11회 조선미전 입선작 '뒷골목'은 그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작품이다.

일본식 목조가옥, 흰 철제 담장, 전신주, 간판, 리어카 등을 배경으로 행인이 걸어가는 일상 속 도회 풍경인데, 대구의 어느 거리를 그린 듯하다. 신문물인 서양화를 도입해 회화적인 표현기법을 전파한 그는 대구미술사의 선구적 인물이다. 또한 서양화에 담긴 새로운 문화양식도 함께 전수하는 등 대구 근대화단에 신선한 예술적 분위기를 형성했다는 점은 재조명돼야 할 것이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서씨일가연합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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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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