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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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5년 8월 3일 (일) 22:24 판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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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변칠우(江邊七友)

조선 선조, 광해군 때 7인의 서자(庶子) 출신 서생들. 양반 자제들이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힘을 한탄하여 북한강가에서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계축화옥(癸丑禍獄=계축옥사 癸丑獄事)을 일으키는 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들.

서양갑(徐羊甲:牧使 徐益의 庶子) ·박응서(朴應犀:朴淳의 庶子) ·심우영(沈友英:沈鉉의 庶子) ·이경준(李耕俊:兵使 李濟臣의 庶子) ·박치인(朴致仁:商山君 朴忠侃의 庶子) ·박치의(朴致毅:朴致仁의 弟/朴忠侃의 庶子) ·김평손(金平孫) 등 고관들의 자제들이나 서출(庶出)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혔음을 한탄하며 세상을 증오했던 7인의 서생 모임이다.

서양갑 ·심우영 ·이경준 ·김평손 등이 연명(連名)으로 서자에게도 관계에 진출할 수 기회를 주도록 허통상소하였으나(1608 선조 41) 허락되지 않자, 소양강가에 무륜(無倫)이라는 정자를 짓고 옛날 중국의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내며 자신들의 처지를 한탄하고 세상을 냉소하였다. 때로는 생활이 궁핍해지면 도둑질도 서슴지 않았다. 광해군 초에는 여주(驪州)에 모여 서로 결의형제하고 도적이 되어 악행의 길로 들어섰다. 그들은 결국 조령(조령/새재 鳥嶺)에서 큰 도적질을 하고 붙잡혔는데, 포도청에서 그들을 심문하는 중에 대북파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의 꾐에 빠져 계축화옥(癸丑禍獄 1613, 광해군 5)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하였다.

사실인즉, 대북파는 광해군을 옹립하였고 소북파는 영창대군을 옹호하였다. 실권파인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당시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사사(賜死)하고, 계속하여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선조의 장인)인 김제남(金悌男)을 압박하였는데, 구실을 잡지 못하고 있던 차, 강변칠우 박응서 등이 은(銀)상인을 살해하고 은 수백 량을 강탈하였고, 이들은 살인죄로 포도청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대북파 이이첨 일파는 이들을 꾀어, 살인강도의 목적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 조달을 위해 김제남이 시켜서 하였다는 허위 자백을 도적들의 목숨을 담보로 받아냈다(박응서의 옥). 결국, 김제남은 역모죄로 사사되고 영창대군은 폐서인 당하여 강화도로 유폐되었다(계축옥사 1613, 광해군 5).


?∼1613(광해군 5). 조선 중기 강변칠우(江邊七友)의 한 사람.

개설

본관은 부여 서씨(扶餘). 아버지는 목사 서익(徐益)이다.

직계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부여융)의 원손으로 이천 서씨(利川徐氏) 아간공 (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의 5세 후손인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조할아버지: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고조할아버지: 서청습(徐淸習 정2품 판전의시사)
        • 증조할아버지: 서효리(徐孝理 정2품 좌복야)
          • 할아버지:서찬(徐贊 종2품 정당문학)
            • 아버지: 서희팔(徐希八 종2품 정당문학)
              • 본인: 서춘(徐椿 정2품 판내부사사)
              • 동생: 서능(서릉)(徐稜 종1품 문하시중)
              • 동생: 서박(徐樸 봉례공)
              • 동생: 서적(徐迪남양군)
              • 동생: 서직(徐稷 연성군)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생애 및 활동사항

서자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으나 서얼차대(庶孼差待)로 관리에 등용되지 못함을 불만으로 여겨오던 중, 같은 서출인 박응서(朴應犀)·심우영(沈友英)·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이경준(李耕俊)·김평손(金平孫) 등과 소양강 부근을 근거로 강변칠우·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시와 술로 교유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조령(鳥嶺)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살해하고 은 600∼700냥을 강탈하다가 체포되었다. 이때 목숨을 살려준다는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 대북파의 꾐에 빠져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외조부인 김제남(金悌男)과 모의하여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계획을 하였다고 허위진술을 하여 계축옥사를 불러일으키고 자신도 죽음을 당하였다.


일화

한국인 중에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홍길동전의 모델이 되었던 서양갑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서양갑의 일생은 소설 속 홍길동과 너무도 흡사하며 허균과 동시대를 살았던 인물이란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서양갑허균, 이사호, 그리고 김장생의 서제였던 김경손 등과 친분을 쌓으며 지냈으므로 허균이 소설을 집필하며 서양갑의 행적을 많이 반영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서양갑은 행림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서익의 서자로 뛰어난 재주와 높은 학문적 소양에도 불구 서자라는 신분적 제약으로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다. 조선시대는 신분제 사회로 당시 양반의 자식이기는 하나 첩의 자식들인 서자들에게는 관직이나 일반적인 생활에서 양반과 똑같을 순 없다. 1608년 서양갑은 자신과 같은 신분에 있던 심우영이준경 등 7인과 연명으로 서자도 관직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는 자격을 달라 상소하였지만 그들의 의견은 무시되었고 이에 격분하여 자신의 집을 짓고 윤리가 필요 없는 집이라는 뜻의 ‘무륜당’ 현액을 걸었다. 이들은 전국을 돌며 화적질을 하게 되었는데 1612년 조령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살해한 사건으로 1613년 모두 체포되었으며 이 단순한 도적사건은 ‘칠서의 옥’이라는 역모사건으로 변모하게 된다. 1613년에 발생한 ‘칠서의 옥’은 단순한 역모나 약탈사건이 아니었다. 그 배경에는 7인의 서자를 이용하려는 정치적인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다. 당시 이이첨을 중심으로 하는 대북파의 중심세력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영창대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광해군의 지위를 튼튼히 하고자 하는 결정적인 목적으로 박응서를 꾀어 단순 강도사건을 역모사건으로 변모시켜 확대했다. 서양갑은 처음부터 완강히 부인하였으나 자신의 앞에서 어머니와 형제들이 국문 받는 것을 보고 결국 거짓 자백을 함으로써 영창대군은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인목대비는 서궁에 유폐되기에 이른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여 서씨들은 큰 위기에 봉착하였고 멸문지화의 지경에 이르렀으나 1623년 인조반정 이후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단순강도사건을 역모로 조작한 것임이 밝혀졌으며, 육곡 서필원의 현달로 연좌되었던 인물들이 신원되면서 새로운 저명 가문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강변칠우(江邊七友)

조선 선조, 광해군 때 7인의 서자(庶子) 출신 서생들. 양반 자제들이나 서출이라는 이유로 벼슬길이 막힘을 한탄하여 북한강가에서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계축화옥(癸丑禍獄=계축옥사 癸丑獄事)을 일으키는 한 원인을 제공한 인물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효양산 은선사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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