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귀당유집
전귀당유집(全歸堂遺集)
조선시대 학자 서시립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21년에 간행한 시문집.
2권 2책. 목판본. 1921년 후손 서석류(徐錫類)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척기(兪拓基)의 서문이, 권말에 민겸(閔謙)·장석영(張錫英)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수는 삼성록(三省錄), 권1은 시 11수, 잠(箴) 4편, 수록실기(手錄實記) 1편, 부록으로 상량문·행장·묘갈명 각 1편, 만(挽) 10편, 제문 4편, 봉안문·상향축문(常享祝文) 각 1편, 권2는 역시 부록으로 수창시(酬唱詩) 91수, 서찰 12편, 행록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성록」은 저자의 할아버지 서언겸(徐彦謙)이 임진왜란 때 온 가족을 데리고 피난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1592년 4월 20일부터 1595년 9월 3일까지 그 때의 참담했던 일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시는 모두 차운(次韻)한 것으로, 수량은 얼마 되지 않으나 수준이 높다. 잠은 「효자잠(孝子箴)」·「우애잠(友愛箴)」·「권학잠(勸學箴)」·「수기잠(修己箴)」 등으로, 자손들에게 훈계할 목적으로 쓴 것이다. 「수록실기」는 임진왜란 때 자신이 겪었던 일과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기록한 글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한(徐文翰 현감)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문간(徐文幹 현감)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문덕(徐文德 현감)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습(徐漝 생원)
- 작은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환(徐渙 생원)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침(徐沈 정3품 조봉대부)
- 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균형(徐鈞衡 종2품 정당문학)
- 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영(徐穎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지유(徐之宥 상호군)
- 작은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원(徐遠 생원(生員)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기준(徐奇俊 정2품 문하시중찬성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진(徐晉 정3품 판도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무질(徐無疾 종2품 밀직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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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어려서부터 효심이 지극했던 효자.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입지(立之), 호는 전귀당(全歸堂).
어려서부터 조부모 및 부모 섬기기에 지극한 정성을 다하였으니, 맛있는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부모님께 가져다 드렸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을 지키기 위하여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집을 떠나자 15살 어린 나이로 홀로 집에 남아서 조상의 사당을 지켰고,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고 공산(公山)의 삼성암(三省菴)에 피난하였다.
정유재란 때는 산속에 피신시켜 걸어서 동래까지 왕래하면서 쌀을 구하여 부모를 공양하였다. 부사가 이를 가련하게 여겨 이웃 고을의 세미(稅米)를 바꾸어주었다. 당시 이호민(李好閔)이 그 지역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 효행의 지극함에 감동하여 진상할 밀과(蜜果)·어육(魚肉) 등을 내려 할머니를 봉양하게 하고, ‘全歸(전귀)’의 두자로써 당호(堂號)하게 하였다. 1639년(인조 17) 참찬관(參贊官) 이경증(李景曾)이 그의 효행을 추천하여 관직에 제수되기도 하였다.
전란으로 학문을 못다한 것을 탄식하면서 서사원(徐思遠)·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벼슬은 참봉에 이르렀다. 좌랑에 증직되고, 대구의 백원서원(百源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전귀당유집(全歸堂遺集)』이 있다.
팔공산 기슭에 서시립(徐時立'?∼1665)이라는 선비가 살고 있었어. 이 선비는 어렸을 때에 매우 인자한 어머니로부터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어.
한번은 서시립의 집으로 이웃집 소가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어. 그 바람에 그만 장독이 깨어지고 말았지.
"아이고, 미안합니다. 장독 값을 물어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대답은 의외였어.
"소는 짐승이니 무슨 사리판단을 하겠습니까? 우리 집 장독이 깨어진 것은 우리의 운이 나빠서입니다. 괜찮습니다."
서시립은 이러한 어머니 밑에서 남을 위하는 마음을 길러 나갔어.
어느 해, 이웃집에서 상(喪)을 당했는데 때마침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나 계곡을 건널 수 없었어. 이웃집 묘터는 건너편 산에 있었는데 말이야.
그때 묘터잡이가 마을 뒷산 기슭에 있는 서시립 선생의 밭을 가리키며 '이곳은 물 빠짐이 좋은 명당이오. 이곳에 묘를 쓰면 아주 길할 것이오'라고 했어.
그러자 상을 당한 집에서는 선생의 밭에 묘를 쓰게 해 달라고 청해 왔어.
"아니, 우리 집 밭인데 남의 집에서 묘를 쓰려 하다니!"
집안에서는 반대가 있었어.
그런데 선생은 선뜻 허락하였어.
"사람이 상을 당한 것만큼 슬픈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하십시오."
이윽고 장례가 끝나고 이웃집에서 땅값을 주려고 하였어.
그러자 선생은 사양하였어.
"이웃집 어르신을 우리 밭에 모신 것은 도리어 우리 집의 영광입니다. 어찌 돈을 받겠습니까? 그냥 두십시오."
이뿐만 아니야. 양식이 떨어진 사람들이 곡식을 빌리러 오면 선생은 서슴없이 빌려주었어. 그런데 선생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게 되자 곡식을 갚는 사람도 있었지만 모른 척하는 사람도 있었어.
이를 본 선생은 마을 사람들을 모두 집으로 초청해 음식을 대접하며 말했어.
"이제 집안의 뜻에 따라 이웃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가 어찌 함께 살아온 여러분의 정을 잊겠습니까? 혹시 꾸어간 곡식은 갚지 않아도 되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십시오."
이 소리를 들은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며 모두 곡식을 가져왔어.
그러나 선생은 모두 돌려보내었어. 곡식을 모두 갚으면 굶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지.
그리하여 나중에 선생이 세상을 떠났을 때에는 온 마을 사람들이 모두 슬퍼하며 선생을 위한 서원을 짓는 데 힘을 보태었어. 이때 지어진 서원이 바로 백원서원(百源書院)인데 지금도 대구 도동에 남아 있단다.
어때, 어렸을 때부터 좋은 가르침을 받고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은 세상을 떠나서도 존경을 받고 있구나.
전귀당유집(全歸堂遺集)
조선시대 학자 서시립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921년에 간행한 시문집.
2권 2책. 목판본. 1921년 후손 서석류(徐錫類) 등이 편집,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척기(兪拓基)의 서문이, 권말에 민겸(閔謙)·장석영(張錫英)의 발문이 있다. 국립중앙도서관과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등에 있다.
권수는 삼성록(三省錄), 권1은 시 11수, 잠(箴) 4편, 수록실기(手錄實記) 1편, 부록으로 상량문·행장·묘갈명 각 1편, 만(挽) 10편, 제문 4편, 봉안문·상향축문(常享祝文) 각 1편, 권2는 역시 부록으로 수창시(酬唱詩) 91수, 서찰 12편, 행록 1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삼성록」은 저자의 할아버지 서언겸(徐彦謙)이 임진왜란 때 온 가족을 데리고 피난했던 일을 기록한 것이다. 1592년 4월 20일부터 1595년 9월 3일까지 그 때의 참담했던 일들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시는 모두 차운(次韻)한 것으로, 수량은 얼마 되지 않으나 수준이 높다. 잠은 「효자잠(孝子箴)」·「우애잠(友愛箴)」·「권학잠(勸學箴)」·「수기잠(修己箴)」 등으로, 자손들에게 훈계할 목적으로 쓴 것이다. 「수록실기」는 임진왜란 때 자신이 겪었던 일과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기록한 글이다.
대구 도동 향산마을 백원서원(百源書院)
본래 이 터에 건물이 세워진 것은 1600년경이라 한다. 孝子(효자) 徐時立(서시립, 1578∼1665)의 호는 全歸(전귀), 자는 立之(입지)이다 고려 版圖判書(판도판서) 達城君(달성군) 徐晋(서진)의 后(후)로 壬亂時(임란시) 조부모와 부모를 모시고 八公山(팔공산) 三省庵(삼성암)으로 피난하였는데 그의 극진한 孝行(효행)이 온 고을에 자자하였다. 때마침 정승 五峰(오봉) 李好閔(이호민)이 王子(왕자) 胎室使(태실사)로 南行(남행)하였다가 이 사실을 듣고 達城(달성) 孝子(효자) 徐時立(서시립) 其孝人稱類厥慈今日偶看三省錄(기효인칭류궐자금일우간삼성록) 有慈如比有兒宜(유자여유아의)라 詩(시)를 읊고 堂號(당호)를 全歸(전귀)라 지어주니 부모에게서 실로 온전히 나서 온전히 돌아간다는 뜻이다
그가 죽자 조정에서 旌閭(정여)가 내려오고 1692년(肅宗, 숙종 18) 전귀당 곁에 百源書院(백원서원)을 세워 그를 享祀(향사)했으니 百源(백원)은 孝(효)가 百行之源(백행지원)이라 함이다.
그러나 1864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서원은 제철되었고 남아오던 전귀당도 1945년 음력 섣달 그믐의 화재로 회진되었다. 다행히 유림의 호응으로 현재의 전귀당을 그 이듬해에 重建(중건)하게 되었다.
50cm 축대위에 방 3칸 대청 2칸 우물마루에 툇마루가 곁들린 팔작지붕이다 그러다가 1991년 단오절에 제철되었던 百源書院(백원서원)을 전귀당과 합치고 景德祠(경덕사)를 지어 先生(선생)을 奉安(봉안)하였으며 廟庭碑(묘정비)와 先生(선생)의 母夫人(모부인) 康氏(강씨)의 孝行碑(효행비)도 由仁門(유인문) 안뜰 550평 대지위에 함께 建立(건립)하였다.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에 있는 달성 서씨 문중의 서원.
백원서원은 효자로 이름이 났던 전귀당(全歸堂) 서시립(徐時立)[1578~1665]을 제향하는 서원이다. 서시립의 자는 입지(立支), 호는 전귀당이며, 달성 서씨 감찰공파 파조인 서근중의 6세손이다. 서시립의 호 전귀당은 임진왜란 이후 오봉 이호민이 왕자 태실사(胎室使)로 대구지역에 들렀다가 서시립의 효행을 듣고 지어준 호이다. 온전한 몸으로 태어나 온전하게 돌아간다는 의미이다. 백원서원은 불로시장에서 불로천을 따라 동쪽으로 도동 측백나무 숲[천연기념물 제1호] 방향으로 1.8㎞쯤 지점에서 고속도로 아래를 지나면 곧장 갈림길이 나온다. 여기에서 직진하여 약 700m쯤 가면 좌측으로 넓은 주차장과 함께 백림정이라는 식당이 있다. 식당 옆으로 나 있는 골목길을 200m쯤 가면 우측에 백원서원이 있다.
백원서원이 처음 건립된 것은 1692년(숙종 18)이었다. 이때 백원서원의 위치는 현 위치가 아닌 팔공산 아래 대구광역시 동구 백안동이었다. 이후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22년 본래 위치에 다시 복원되었다. 지금 백원서원은 서시립의 생전 강학소가 있었던 자리로 1928년 이건 되었다.
백원서원은 동·서재 없이 강당과 사우인 경덕사(景德祠)와 서시립의 어머니인 강씨 부인의 효행을 기록한 효행비각이 있다. 강당은 전귀당인데 정면 4칸·측면 1.5칸의 규모에 겹처마 팔작지붕의 건물이다. 정면에서 마주 보았을 때 좌측에서부터 2칸 방·2칸 대청·한 칸 방으로 구성되었으며, 전면으로 반 칸 툇간이 있다. 백원서원은 달성 서씨 감찰공파 전귀당 문중에서 관리를 하고 있으며 관리 상태는 양호하다. 현재 비지정문화재이나 사단법인 대구문화유산에 의해 문화재돌봄대상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달성 서씨는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 자락에 세거하고 있는 주요 토박이 성씨 중 하나이다. 그중에서도 대구광역시 동구 도동의 달성 서씨 문중은 조선 후기 대구의 대표 유학자 중 한 명이었던 서시립의 후손이다. 따라서 백원서원은 조선 후기 대구광역시 동구 지역 달성 서씨 문중의 인물·역사·문화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유적이라 할 수 있다.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