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대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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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wseo21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23년 5월 25일 (목) 22:42 판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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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대제(百濟大祭)

세종특별자치시 전동면 청송리에 있는 운주산성 광장에서 매년 4월에 지내는 제례행사.


백제대제의 기원은 계유년(癸酉年)[673년] 4월 15일 백제 유민들에 의하여 석불비상 8개를 조성하여 비암사(碑巖寺)[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 운주산에 있는 사찰]를 짓고 시납(施納)[절에 시주로 금품 등을 바침]하여 국왕·대신과 칠세부모(七世父母)[선대 7세의 죽은 부모들]를 위한 제를 올린 것에 기원을 두고 있다.

전의고적보존회가 향토개발사업으로 주류성과 비암사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백제 부흥을 위한 주류성의 항전이 있은 지 1310년 흐른 1983년 4월 15일[음력] 종파를 초월하여 전 국민의 이름으로 제를 올리기 시작하였다.

당시 ‘백제 충령제(百濟忠靈祭)’라 하여 백제대제 행사가 개최되었다. 1985년 제1회 도화문화제[도원문화제]가 개최되면서 백제 충령제는 문화제의 첫 번째 행사로 열렸고, 날짜도 양력 4월 15일로 바꿔 진행하게 되었다.

1989년 미술사학자 황수영(黃壽永) 박사[1918~2011]가 충청남도 부여에서 지내는 ‘백제대왕제’는 성왕에서 의자왕까지 6대왕의 제를 올리지만 세종특별자치시에서는 온조왕 이래 역대왕 및 충신에 대한 제를 올리기 때문에 ‘백제대제’를 세종 지역에서 지내야 한다는 발표에 의하여 행사명을 백제 충령제에서 백제대제로 변경하였다.

1990년에는 금이산성[구 운주산성]이 마지막 항전지인 주류성이라는 주장이 있어 금이산성에 제단을 설치하고 제를 지내기 시작했으나 제를 지내기 위한 조건이 산성인 관계로 좋지 않아 다시 1992년 비암사에서 제를 지내 왔다.

제사의식은 불교의식을 가미한 헌화식으로 간략하게 진행되었으며, 도화문화제 일정의 첫째 날로 지내 왔다.

2000년부터는 당시 백제 말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양력 4월 15일 연기뿐만 아니라 백제권에서는 유일한 백제대제임을 알리는 것 또한 병행하였다.

32회[2014년]부터 35회[2017년]까지 ‘세종시 백제대제’로 행사명을 변경하여 비암사에서 진행하여 오다가 36회[2018년]부터는 비암사에서 장소를 쓸 수 없다는 이유로 장소를 운주산성 광장으로 변경하고 ‘백제대제’로 행사명을 다시 복원하여 진행하였다.

비암사는 2018년부터 ‘백제영산대제’라는 명칭으로 세종문화원과는 별개의 제를 지내고 있다.

제례행사는 백제대제 유래 낭독, 거제선언, 석불비상 시납, 신위봉안, 강신례, 초헌관, 축문낭독, 아헌관, 종헌관, 추도사, 헌화 및 분향, 망료례, 종제선언 순으로 진행된다.

문화공연도 진행하며 부대행사로 백제 둘레길 걷기, 체험부스 운영을 하고 있다.

2000년부터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려고 노력하였으며, 백제대제의 의미를 알리기 위한 행사로 모형 석불비상을 제작하여 석불비상을 시납하는 군사행렬을 재현하였다.

2018년부터 시민이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매년 500여 명의 관람객이 찾고 있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백제대제(百濟大祭) =부여백제문화제(扶餘百濟文化祭)= 공주백제문화제(公州百濟文化祭)

백제문화권의 선양과 전통문화를 창달할 목적으로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와 부여에서 일년씩 교대로 10월에 개최하는 향토축제. 한국에서 현대적 의미의 축제가 시작되기 이전이며, 한국전쟁의 상흔이 가시지 않았던 시기인 1955년에 부여에서 개최된 이래 2006년 제52회가 개최되어 50여 년의 역사와 전통을 자랑한다.

제1회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는 백제대제(百濟大祭)라는 이름으로 1955년 부여에서 처음 열렸다. 민간인으로 구성된 백제대제집행위원회의 주관과 주민들의 자발적 성금으로 거행되었다. 제1회 백제대제는 백제말의 3충신(성충·흥수·계백)을 모신 삼충사(三忠祠) 제향과 백제 멸망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진 백제 여인들을 위무하는 수륙재(水陸齋)를 올렸다. 당시의 백제대제는 이렇듯 망국의 한을 달래는 제의 중심이었고 조촐한 형태였지만 전국에서 보기 드문 사례였기 때문에, 부여군내는 물론 전국 각처에서 몰려든 관람객으로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다고 한다.

백제문화제는 백제 망국의 원혼을 위로하는 제의인 백제대제로 출발하였으나, 해를 거듭하면서 제의적 성격으로부터 지역종합문화 행사의 성격을 더해가게 되었다. 나아가 이 같은 성격 변화에 부응하여 제1회부터 제9회까지 백제대제로 부르다가, 1964년 제10회부터 백제문화제로 이름을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아울러 개최 지역도 공주와 대전으로 확대되는 변화를 겪었는데, 제1회(1955)부터 제11회(1965)까지는 부여에서만 개최되었으나, 제12회(1966)부터는 공주향교 주관으로 웅진백제시대의 백제왕 추모제를 매년 봉행하던 공주에서도 동시에 개최하였다. 그리고 제20회(1974)부터는 공주와 부여 외에 대전으로까지 개최지가 확대되기도 하였다. 이는 충남의 대제전으로 열기를 고조시키려는 것이었으나 분산 개최의 어려움과 상징성 약화, 전시 위주의 급조된 문화제라는 오명 속에 1978년 제24회를 마지막으로 대전 개최는 중단되었다.

이후 제26회(1980)부터는 공주와 부여가 격년으로 개최하게 되었다. 개최하지 않는 지역의 경우는 소제(小祭)로 거행하는데, 이 같은 방식은 지금까지 일관되고 있다. 윤번제 시행은 더 긴 준비 기간을 확보함으로써 행사의 수준을 높이는 장점이 있다.

한편 제40회(1994)에는 위례성, 웅진, 사비를 연계한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서울 송파구의 한성백제문화제 행사가 바로 그것이었는데 천도제 및 정도제, 고유제를 공동으로 진행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 과도한 재정적 부담과 역사성의 문제 때문에 2년 만에 중단하였고, 현재는 홀수 년에 공주, 짝수 년에 부여에서 각각 격년으로 개최되고 있다.

백제문화제는 대개의 지역문화축제와 유사하게 10월 중에 개최되는데, 개최 시기를 보면 10월 초순이 33퍼센트, 10월 중순이 53퍼센트, 10월 하순이 14퍼센트의 비율이었으며, 기간은 2일간이 4퍼센트, 3일간이 48퍼센트, 4일간이 43퍼센트, 5일간이 5퍼센트 정도의 비중이다. 그러다가 문주왕(文周王)의 공주 천도 시기가 10월 상순이고 또한 관람객의 편의와 행사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하여 주말을 포함하는 10월 6~10일 기간으로 고정되었다.


백제문화제는 최근 매우 다양한 형태로 출발한 다른 지역 축제와 달리 백제라는 역사문화 배경을 하나의 주제로 선정하면서 발전해온 역사문화 축제로 신라문화제(新羅文化祭)나 개천예술제(開天藝術祭)와 함께 잘 알려져 있다. 공주와 부여는 백제문화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유적과 역사의 밀집지이자 완성된 백제의 문화 모습을 보여주는 곳이다. 한편으로는 의자왕의 비화(悲話), 낙화암의 삼천궁녀 설화, 삼충신의 충절 등 백제 최후를 지킨 영령들의 숨결도 함께 살아 있어 백제 패망의 아픔도 동시에 전하는 곳이다.

최근 백제문화제는 다양한 백제문화 소재들을 수요 계층별로 올바로 이해시키고, 흥미롭게 전승하고 현대의 가치로 승화시키자는 목표를 설정하고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백제문화제의 초기 단계인 1950~1960년대는 백제의 충절인(忠節人) 제향과 삼천궁녀 위령제(수륙재)가 중심이었고, 감성적 차원의 정신문화 계승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 시기의 축제 내용을 보면 백제 중흥 5대왕 추모제와 더불어 민속, 예술, 체육대회 등을 가미한 지역적 성격의 행사 위주로 개최되었는데 전적으로 민간주도의 행사였다. 이때의 행사 종목을 보면 백제원혼에 대한 제의를 제외한다면 백제문화제로서의 특성을 보여주는 별다른 행사가 없는 일종의 문화예술제로서의 성격을 지닌 소박한 지역 행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과 운영은 1960년대에 들어와 변화를 겪었다. 곧 행사가 관주도로 변화하고, 행사 종목이 해마다 늘어나 종합적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특히 1960년대 중반 박정희 대통령의 백제문화제 참석과 지역 정서가 연계되면서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이때에 백제 가장행렬, 계백장군 동상과 궁녀사(宮女祠) 기공, 정림사지(定林寺址) 발굴, 국립부여박물관 건립 같은 가시적 행사들이 많아졌고, 특히나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백제문화 유산 정리와 민족문화 계승이라는 기치가 강화되면서 다소 권위적이고 대형화를 추구하는 경향까지 생겼다.

1970년대의 백제문화제는 1960년대에 행해졌던 문화예술 행사를 근간으로 하되 부수적 문화 행사가 눈에 띄게 늘었다. 초기 백제문화제의 예산을 보면 행정기관 보조금은 20~30퍼센트에 지나지 않고 비용의 대부분을 지역 주민의 찬조금에 의존하여야 했으나, 1973년 이후 백제문화제의 활성화 대책이 수립되면서 백제문화선양위원회를 조례화하고 행정기관의 보조금이 전체 예산의 80퍼센트 이상으로 증가됨으로써 백제문화제를 전국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한편 공주와 부여의 윤번제 시행으로 정착된 1980년 제27회 백제문화제는 공주에서 개최되고 부여에서는 소제로 제전 행사(삼충제, 궁녀제, 대왕제)만 치렀는데, 이러한 윤번제 시행은 보다 많은 준비 기간을 확보함으로써 행사의 수준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 결과 윤번 개최가 시작된 1980년대 이후 우선 행사의 종목이 양적으로 크게 늘었다. 부여의 경우 40여 종, 공주는 70~100여 종에 달하는 매우 다채로운 행사를 치르게 되었다. 특히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의 문화상품으로 선정되어 행정과 재정적 지원이 확대되기도 하였다.

백제문화제의 꽃으로 관람객들의 관심이 큰 행사로는 비판도 많고 문제도 없지 않지만 백제역사문화행렬이 있고, 제14회(1968)부터 지속적으로 개최한 백제문화심포지엄이 있다. 1971년의 무령왕릉유물 특별전시회, 백제의 밤(문학, 음악, 무용), 1972년의 백제문화 사진촬영대회 그리고 1973년 이후 종합예술제의 성격으로 다양하게 열린다. 각종 문화예술단체들의 행사 및 경연대회도 관람객의 관심을 많이 끌었다. 그동안 고증을 통한 백제문화 재현에도 노력을 기울여 백제갑옷, 산유화가(1975), 행렬, 복식과 국악(1979), 백제천도 행사(1994), 복식, 제의, 행렬(1996), 역사문화 체험장(1998) 등도 이루어졌다.

그리고 최근에는 주제를 정하여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백제문화 특성을 부각하려는 의도적 노력과 기획이 돋보이는데, 예컨대 제48회(2002)의 경우 ‘부활- 정도- 재현- 충절추모- 대동화합’이라든가, 제50회(2004)의 ‘개벽- 중흥- 눈물- 어울림’, 제51회(2005)의 경우 ‘백제의 불, 금강의 빛’이라는 테마로 백제역사 퍼레이드, 백제나라로 시간여행(백제군사 성곽지키기, 성곽밟기, 백제 4왕 추모제, 백제왕 연희 등), 금강으로의 초대(불꽃놀이) 그리고 각종 문화예술 행사들이 개최되고 있다.

이러한 양적인 성장에도 불구하고 백제문화제는 다채롭기는 하지만 행사 종목이 너무 많고 특징이 없다는 비판도 받았다. 몇몇 문화 행사를 제외하고는 행사의 대부분이 중복되거나 비슷한 행사로 채워져 있는데 특히 백제문화제라는 이름에 걸맞은 내용을 담보하지 못한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리하여 백제문화제의 발전을 위한 다각적인 방법들이 모색되고 있다. 이를테면 추모제, 행렬, 즉위식류의 행사 비중을 줄이고, 대신 백제문화를 소재로 한 다양한 창작예술과의 접목을 통한 계승 방법의 창출로 수요층의 폭을 확대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창작예술발표회, 마당극, 인형극, 애니메이션 같은 교육체험 프로그램의 확대를 통한 백제문화 이해와 홍보를 강화하는 방안이 그 하나이다. 아울러 백제문화제의 경쟁력과 차별성을 확보하는 방편으로 철저한 역사고증작업의 필요성, 관광문화상품의 개발과 자원 활용 아이디어 개발 등이 과제로 손꼽히고 있다.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백제문화제는 찬란한 문화를 꽃 피워 이웃나라에 전파함으로써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던 '한류원조로서의 백제문화'를 국내외에 확산시키고, 세계적인 축제로 거듭나기 위하여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 일원에서 "백제의 빛과 향"이라는 주제로 화려하게 펼쳐진다. 세계유산인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백제문화제에서 다양한 축제 프로그램과 더불어 백제로의 흥겨운 시간여행에 흠뻑 빠져보시기 바란다.

무령왕(武寧王)

충청남도 공주시 금성동 송산리고분군 내에 있는 백제 제25대 무령왕과 왕비의 무덤. 사적 제13호.

이칭별칭 기타 사마(斯摩), 기타 사마(斯麻), 기타 융(隆)


백제 제25대 국왕[생몰년: 462(개로왕 8)∼523(무령왕 23), 재위 501∼523].

이름은 사마(斯摩, 斯麻) 또는 융(隆)이다. 동성왕(東城王)의 둘째아들, 또는 개로왕(蓋鹵王)의 동생인 혼지(混支)·곤지(昆支)의 아들로서 동성왕의 배다른 형이라고도 한다.

이처럼 그의 계보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있으나,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지석(誌石)에 따르면 그는 462년에 출생하였다. 키는 8척이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며, 성품은 인자하고 관대하였다고 한다.

무령왕 정권의 탄생은 동성왕의 시해라는 정변을 통해 이루어졌다. 501년 12월 위사좌평(衛士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게 동성왕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 정변에는 왕족과 한성(漢城)에서부터 내려온 귀족, 웅진(熊津)에 기반을 둔 신진세력 등 다양한 세력이 연루되었다.

무령왕은 이듬해 1월 가림성(加林城)에 웅거해 저항을 꾀하던 백가를 토벌했다. 그리고 고구려와 말갈과의 전쟁을 준비는 등 북방정책을 추진했다.

501년 달솔(達率) 우영(優永)을 보내 고구려 수곡성(水谷城)을 습격하고, 503년 마수책(馬首柵)을 태우며 고목성(高木城)에 쳐들어온 말갈을 격퇴하였다. 그 뒤 506년 말갈이 다시 고목성에 쳐들어오자, 이듬해 고목성의 남쪽에 두 개의 책(柵)을 세우고 장령성(長嶺城)을 축조해 이에 대비하였다.

고구려·말갈과의 싸움은 그 뒤 계속되어 507년 고구려 장군 고로(高老)가 말갈과 합세해 한성을 치고자 횡악(橫岳) 방면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격퇴하였다. 512년에는 고구려가 가불성(加弗城)과 원산성(圓山城)을 함락시켜 약탈을 자행하자, 친히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위천(葦川)의 북쪽으로 진출해 고구려 군사를 크게 무찔렀다.

523년 좌평 인우(因友)와 달솔 사오(沙烏) 등에게 명해 한북주(漢北州)의 15세 이상 장정을 동원, 쌍현성(雙峴城)을 쌓게 했는데, 이 때 이를 독려하기 위해 친히 한성에 행차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고구려·말갈의 침입에 착실히 대처하는 한편, 중국 남조의 양(梁)과도 외교 관계를 강화해 512년과 521년 두 차례에 걸쳐 사신을 보냈다. 521년 양으로부터 ‘사지절도독백제제군사영동대장군(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았다.

한편, 512년 상차리(上哆唎)·하차리(下哆唎)·사타(娑陀)·모루(牟婁) 등 네 현을 합병했다고 하는데, 이는 섬진강 유역의 어느 곳이거나 가야 지역으로 짐작된다. 513년과 516년에는 오경박사 단양이(段楊爾)와 고안무(高安茂)를 각기 왜국에 보내 문화를 전파하였다.

무령왕은 정치 형태를 바꾸는 근본적인 개혁을 시도했다. 무령왕 때 추진된 정치적 변화 중의 하나는 직책을 가진 좌평이 등장하지 않는 점이다. 천도 이후 일어난 두 차례 반란은 모두 병관좌평(兵官佐平), 위사좌평이라는 관직을 가진 좌평에 의해 일어났다. 그 원인은 지배귀족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을 바탕으로 좌평이 되었고, 다시 좌평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는 정치구조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이러한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좌평제의 변화가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좌평을 지배귀족들의 신분서열을 나타내는 관등적 성격으로 변화시키고 행정 업무는 22부사(部司)가 전담할 때 최고의 신분을 가진 귀족이 실권마저 장악하는 사태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좌평제를 22부사제로 개혁하는 안이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무령왕은 지배층 뿐만 아니라 백성들을 안정시키는 정책도 추진하였다. 506년 기근으로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자 창고를 풀어 이를 구제했고, 510년 영을 내려 제방을 수축하는 한편,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고먹는 사람들을 구제하여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였다. 백성들의 유망(流亡)은 세수(稅收)의 감소 뿐만 아니라 인력 동원 등 여러 면에서 국력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있다. 이에 무령왕은 적극적인 진휼을 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추진하고 국가재원의 확보로 이어지는 경제정책을 펼쳐나갔다.

이러한 대민정책은 한강 유역의 상실 이후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수리시설을 확충·완비함으로써 금강유역권을 개발하고 농업생산의 증대를 도모하여 왕정의 물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백성들의 안정을 통해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고자 한 것이다.

무령왕 9년(509)에는 임나(任那) 지역에 도망가서 호적이 끊긴지 3∼4세대가 지난 자를 찾아내서 호적에 올리도록 하였다. 도망간 백제의 백성을 찾아내서 다시 백제로 옮기어 호적에 편입시키는 것은 이전과는 다른 이를 수용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임나 지역에 대한 호구조사(戶口調査)를 하고 있다면 백제 영역 내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그 이전부터 호구를 조사하여 호적을 만드는 조치들이 이미 실시되었음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무령왕 때에는 전국적인 호구조사 사업을 실시하여 호적체계를 정비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은 제반정책의 추진으로 민심이 크게 그를 따랐다. 523년 5월 7일 62세를 일기로 승하했으며, 2년 뒤인 525년(성왕 3) 8월 12일공주 송산리에 안장되었다. 시호는 무령(武寧)이다.


성왕(聖王)

삼국시대 백제의 제26대(재위:523~554) 왕.

재위 523∼554. 이름은 명농(明濃) 무령왕의 아들이다. ≪양서 梁書≫ 백제전에는 이름을 명(明)이라 했고, ≪일본서기≫에는 명왕(明王) 또는 성명왕(聖明王)으로 표기되어 있다.

≪삼국사기≫에는 “영민하고 비범하며 결단력이 있어 나라 사람이 성왕으로 칭하였다.”라 했고 ≪일본서기≫에는 “천도·지리에 통달해 그 이름이 사방에 퍼졌다.”라고 찬양해 그의 인물 됨됨이가 비범했음을 알 수 있다.

동성왕·무령왕이 웅진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을 수습하면서 추진해 온 왕권 강화 정책을 계승해 538년(성왕 16)에 사비(泗沘) 천도를 단행하였다. 성왕의 사비 천도는 고구려의 남침이라는 외부 세력의 강요에 의해 행해졌던 웅진 천도와는 달리 성왕의 의도적인 계획하에 단행된 것이다.

따라서 이 사비 천도는 왕권과 국력 강화 정책의 마지막 마무리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사비 천도에는 사비 지역의 토착 신진 세력이었던 사씨(沙氏, 沙宅氏)의 정치적 지지가 강하게 작용하였다.

사비 천도 후 국호를 일시 ‘남부여(南扶餘)’라 개칭해 부여족으로서의 전통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양조(梁朝)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모시박사(毛詩博士)·공장(工匠)·화공 등을 초빙하고 열반등경의(涅槃等經義)를 수입해 백제 문화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힘썼다.

또한 성왕은 인도에서 산스크리트로 된 5부율(五部律)을 가지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해 고승들을 모아 5부율을 번역시키고, 아울러 담욱(曇旭)·혜인(惠仁) 등이 지은 율소(律疏) 30권에 친히 비담신율서(毗曇新律序)를 써서 백제 신율을 성립시켰다. 성왕의 이러한 계율의 장려는 불교 교단의 정비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思致契) 등을 일본에 파송해 석가불금동상 1구,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보내 줌으로써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게 되었다. 이 밖에도 의박사·역박사 등의 전문가와 기술자를 교대로 파견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선진 문물의 전수자로서의 구실을 하였다. 이와 더불어 사비 천도를 전후해 웅진시대 이후 이루어졌던 내외 관제를 정비해 지배 체제의 정비와 통치 질서를 확립하였다.

중앙 관제로는 1품 좌평(佐平)에서 16품 극우(克虞)에 이르는 16관등제와 전내부(前內部) 등 내관 12부와 사군부(司軍部) 등 외관 10부로 된 22부제가 정비되었다. 또 왕도의 통치 조직으로는 수도를 상부·전부·중부·하부·후부의 5부로 구획하고 5부 밑에 5항(五巷)을 둔 5부5항제를 정비하였다.

지방 통치 조직으로는 종래의 담로제(檐魯制)를 개편해 전국을 동방·서방·남방·북방·중방의 5방(方)으로 나누고 그 밑에 7∼10개의 군을 두는 5방·군·성(현)제를 정비하였다. 이와 같이 중앙 관제와 지방의 통치 조직을 정비함으로써 성왕은 정치 운영에서 귀족회의체의 정치적 발언권을 약화시켜 왕권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를 확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성왕은 국제 관계에도 힘을 기울여 전대부터 유지되어 온 신라와의 동맹 관계를 그대로 지속함으로써 고구려의 남진 압력에 대항해 나갔다. 그리고 양(梁) 및 왜(倭)와의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역과 이에 따르는 문화 교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백제의 국제적 지위를 높였다.

한편, 성왕은 숙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 탈환 작업에 나섰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551년에 백제군을 주축으로 해 신라군과 가야군으로 이루어진 연합군을 일으켰다.

이 연합군은 북진해 백제군이 먼저 고구려의 남평양(南平壤 : 지금의 서울)을 공격, 격파함으로써 기선을 제압해 고구려군을 패주시켰다. 그 결과 백제는 한강 하류의 6군을 회복했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진흥왕은 나제동맹 관계를 무시한 채 한강 하류 유역을 빼앗고자 당시 남북으로부터 군사적 위협에 처해 있던 고구려와 밀약을 맺고 553년에 군사를 돌이켜 백제를 공격해 옴으로써 백제는 한강 하류 유역을 신라에 빼앗기게 되었다.

신라의 공격으로 백제의 실지 회복이 수포로 돌아가자 성왕은 554년에 비전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라에 보복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켰다. 여기에는 가야의 원군도 합세하였다. 백제의 이와 같은 군사 동원으로 양국간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이 때 양국의 싸움은 관산성(管山城)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이 싸움에서 초기에 우세를 보였던 백제는 성왕이 구천(狗川) 지역에서 신라 복병의 기습 공격을 받아 전사함으로써 대패하고 말았다. 이 전쟁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해 4명의 좌평이 전사하고 3만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전사하는 결정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패전의 결과로 국내 정치 정세도 심대한 영향을 받아 동성왕 이후 성왕 대까지 확립되었던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귀족 중심의 정치 운영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1세기 이상 신라와의 사이에 맺어졌던 나제동맹 관계는 이 싸움 이후 완전히 결렬되었다. 이리하여 양국은 최후까지 적대적으로 대결하는 원수의 관계가 되었으며, 이는 한반도에서 삼국의 역학 관계의 성격을 결정 짓게 되었다.

의자왕(義慈王)

성은 부여(扶餘)이며, 이름[諱]은 의자(義慈)이다. 백제의 제30대 무왕(武王, 재위 600∼641)의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생모에 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왕비에 관한 기록도 전해지지 않지만, 《삼국사기》에는 657년(의자왕 17)에 왕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佐平)으로 임명하고 그들에게 식읍(食邑)을 지급했다고 기록되어 있어서 자녀가 무척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의 왕자로 부여효(孝), 부여태(泰), 부여융(隆), 부여연(演), 풍왕(豐), 궁(躬), 부여충승(忠勝), 부여충지(忠志)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니혼쇼키(日本書紀)》에는 ‘풍’의 이름이 ‘풍장(豐璋)’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충승’이 그의 형제가 아니라 숙부라고 되어 있다.

의자왕(義慈王)은 632년(무왕 33) 태자로 책봉되었다. 《삼국사기》에는 그가 용감하고 대담했으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에게도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는 641년(무왕 42) 봄에 부왕인 무왕이 죽자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 의자왕의 출생연도는 확인되지 않지만 1920년 중국 뤄양[洛陽]의 북망(北邙)에서 발견된 ‘부여융묘지석(扶餘隆墓誌石)’에는 그의 넷째아들인 융이 682년에 68세의 나이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이를 기준으로 추산하면 의자왕은 왕위에 올랐을 때 적어도 40세는 넘은 나이였을 것으로 보인다.

왕위에 오른 의자왕은 642년에 직접 각 주와 군을 돌아보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죄수들을 대규모로 사면했다. 그리고 그해 가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신라 공격에 나서 미후성(獼猴城)을 비롯한 40여 개의 성을 빼앗았고, 장군 윤충(允忠)으로 하여금 대야성(大耶城, 지금의 경남 합천)을 공격하게 해서 성주 품석(品釋)을 죽이고 성을 함락시켰다. 643년(의자왕 3) 겨울에도 의자왕은 신라의 당항성(黨項城, 지금의 경기도 화성)을 공격하려 했으나, 신라가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군대를 철수시켰다.

의자왕의 재위기간에 백제는 끊임없이 신라와 대립했다. 644년(의자왕 4) 가을에 신라의 김유신(金庾信)이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등 7개 성을 공격해 점령했다. 그러자 의자왕은 이듬해 당나라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공격하면서 신라의 병력을 징발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신라 공격에 나서 7개의 성을 빼앗았고, 신라는 김유신을 상주장군(上州將軍)으로 임명해 반격해왔다. 647년(의자왕 7)에는 신라에서 비담(毘曇)과 염종(廉宗)의 반란이 일어나자 장군 의직(義直)을 보내 무산성(茂山城)과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을 공격했다. 그러나 백제군은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에 크게 패하고 물러났다. 648년(의자왕 8) 봄에도 의직이 이끄는 백제군은 신라를 공격해 요거성(腰車城) 등 10여개의 성을 점령하고 옥문곡(玉門谷)까지 진군했으나, 김유신이 이끈 신라군에 크게 패해 진례(進禮) 등 9개의 성을 빼앗겼다. 649년(의자왕 9) 가을에는 좌장(左將) 은상(殷相)이 신라의 석토성(石吐城) 등 7개의 성을 빼앗았으나, 도살성(道薩城) 아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신라군에 패했다.

중국에서는 통일왕조인 수(隋)와 당(唐)이 들어선 뒤에 주변 국가들로 영토를 넓히려는 경향이 커지고 있었다. 이에 의자왕은 왕위에 오른 뒤 중국의 영토 확장을 사전에 막고 신라를 압박할 목적으로 거의 해마다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대외적인 화친과는 달리 백제와 당나라는 때에 따라 서로를 견제하기도 했다. 백제는 고구려와 연합해 당나라의 압박을 극복하려 했고, 당나라는 노골적으로 신라와 손을 잡고 백제와 고구려를 복속시키려고 했다. 신라가 648년(의자왕 8) 김춘추(金春秋)를 당나라로 보내 백제를 공격할 병력의 파견을 요청해 오자 당나라 태종(太宗)은 출병을 약속했다. 당나라 고종(高宗)도 651년(의자왕 11)에 빼앗은 성들을 신라에 돌려주지 않으면 백제를 공격하겠다고 직접 사신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자왕은 이러한 당나라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653년(의자왕 13) 왜국(倭國)과 우호관계를 맺고, 655년(의자왕 15) 가을에는 고구려·말갈과 연합해 신라를 공격해 30여개의 성을 빼앗았다.

《삼국사기》에는 이 무렵부터 왕이 사치스럽게 생활하며 향락에 빠져 나라에 변고가 잇달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의자왕은 657년(의자왕 17)에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임명했다. 이는 왕자들을 중심으로 친위체제를 구축해 왕권을 강화하려는 조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656년(의자왕 16)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왕에게 간언을 하다가 투옥되어 목숨을 잃었고, 660년에는 좌평 흥수(興首)가 귀양을 살고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귀족사회의 반발도 컸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의자왕이 644년(의자왕 4)에 넷째아들인 융(隆)을 태자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660년(의자왕 20)의 기록에서는 태자의 이름이 효(孝)라고 되어 있다. 태자의 교체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지만, 뒷날 당나라 군대가 사비성을 포위했을 때 의자왕의 둘째아들인 태에 반발해 태자 효의 아들인 문사(文思)가 왕자 융과 함께 성을 빠져나가 당나라에 항복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왕자들 간의 갈등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655년(의자왕 15) 이후에 백제에 수많은 변고가 나타나 나라의 멸망을 예고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655년 여름에는 붉은 말이 북악(北岳) 오함사(烏含寺)로 들어와 불당을 돌면서 울다가 죽는 일이 일어났고, 659년(의자왕 19)에는 흰 여우가 궁궐로 들어와 상좌평(上佐平)의 책상에 앉는 일이 일어났다. 태자궁에서는 암탉이 박새(小雀)와 교미하는 일도 일어났고, 왕성 서남쪽의 사비하(泗沘河)에서는 크기가 3장(丈)이나 되는 물고기가 떠올라 죽었고, 가을에는 생초진(生草津)에 키가 18척(尺)이나 되는 여자의 시신이 떠내려왔다. 궁궐 뜰의 홰나무(槐樹)가 사람의 통곡소리를 내며 울었고, 밤에는 왕궁 남쪽의 길에서 귀신이 통곡하는 소리가 들렸다. 660년(의자왕 20) 봄에는 사비의 우물과 사비하의 물이 붉게 변했고, 서해에 작은 물고기들이 떼로 죽어서 떠올랐다. 여름에는 두꺼비 수만 마리가 나무꼭대기로 몰려들었고, 사비의 주민들이 까닭도 없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1백여 명이 쓰러져 죽는 일도 일어났다. 음력 5월에는 천왕사(天王寺), 도양사(道讓寺), 백석사(白石寺)에 벼락이 쳤으며, 음력 6월에는 궁궐에 귀신이 나타나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땅속으로 들어가는 괴이한 일도 있었다.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서 백제를 공격해오자 의자왕은 장군 계백(堦伯)에게 5천의 결사대를 이끌고 황산(黃山)으로 가서 신라군과 싸우게 했다. 당나라의 침공 소식을 듣고 대책을 논의할 때 귀양을 살고 있던 좌평 흥수는 백강(白江, 지금의 백마강) 하구의 기벌포(伎伐浦)와 사비성 동쪽의 내륙 통로인 탄현(炭峴)이 요충지이므로 그것을 지켜 당나라와 신라 군대의 진입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의자왕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그래서 당나라와 신라 군대가 백강과 탄현을 지난 뒤에야 뒤늦게 계백 장군의 결사대를 보내 싸우게 했으나 병력 부족으로 패할 수밖에 없었다. 당나라와 신라의 협공으로 사비성(泗泌城)이 함락될 위기에 놓이자 의자왕은 태자 효와 함께 웅진성(熊津城)으로 피신했다. 의자왕의 둘째아들인 태가 사비성에 남아 성을 지켰으나 넷째아들인 융이 성을 나가 당나라에 투항하면서 사비성은 함락되었다. 웅진성에서 당나라 군대와 맞서던 의자왕도 전투에 패하면서 항복했다.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은 의자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演) 및 대신과 장병 88명, 주민 12,807명을 당나라로 끌고갔다. 그리고 백제 지역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 등 5개의 도독부(都督府)를 설치하고, 좌위낭장(左衛郞將) 왕문도(王文度)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았으며 낭장(郞將) 유인원(劉仁願)에게 사비성을 지키게 했다.

당나라로 압송된 의자왕은 그해에 사망했다. 《삼국사기》에는 병으로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죽음의 정확한 원인은 확인되지 않는다. 의자왕이 죽자 당나라 고종은 그를 금자광록대부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으로 추봉하고 옛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했다. 그리고 뤄양에 있는 오(吳)와 진(陳)의 마지막 왕들인 손호(孫皓, 재위 264~280)와 진숙보(陳叔寶, 재위 582~589)의 무덤 곁에 의자왕을 묻게 하고 비석도 세웠다. 그러나 의자왕 무덤의 자세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유물도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백제왕 계보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1]]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충화 팔충제(忠化八忠濟)

충청남도 부여군 충화면 지석리 팔충사(八忠祠) 일원에서 백제 말의 8충신과 황산벌싸움에서 전사한 5천 결사대의 넋을 추모하기 위해 올리는 제사로 매년 10월 초 백제문화제와 함께 열린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계백무예축제

축제는 백제의혼 계백장군을 추모하는 행사로, 전국클럽태권도회를 비롯해 전통무예 연무대회가 개최된다. 궁남지 오천결사대 출정상에서 백제오천결사대의 넋을 달래는 이 행사에는 백제전통무예원 korea 싸울아비무사단의 추모공연과 태권도시범단 축하공연이 포함되어 있다. 충남 부여와 공주는 백제문화제뿐만 아니라, 대백제전 등 역사문화도시로 크게 부각되고 있고, 무예행사는 충주의 세계무술축제와 세계무예마스터십, 전국무전 등으로 부각되지 못해 왔다. 하지만 이 대회는 백제의 고도 부여의 역사문화 탐방과 함께 매년 정례적으로 개최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토현동학농민혁명기념제

매년 양력 5월 개최되는 행사로서 조선시대 봉건제도의 학정에 대한 순수한 농민의 개혁혁명운동의 발상지로서 근대화를 앞당겼고 민족독립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의미있는 행사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