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재집
낙재집(樂齋集) 조선 중엽 달성에서 활동한 학자 서사원(徐思遠)의 문집. [저자] 서사원(徐思遠)은 조선 중엽의 학자로 한강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 미락재(彌樂齋), 만오당(晩悟堂)이다. 1550년(명종 5)에 출생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사망하였다.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청안 현감(淸安縣監) 등을 지냈다.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낙재집(樂齋集)』은 서문이 중간서(重刊書)라고 되어 있다는 점과 연보의 내용으로 보아 서사원이 죽고 난 후 다음해에 문인과 사우들이 서사원의 유고(遺稿)와 서찰들을 수집하여 문집을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초간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다만 초간된 문집이 있었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이후 후손 서택렬(徐宅烈)이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서사원의 시문을 모으고, 손처눌(孫處訥)이 지은 서사원의 행록과 박종우(朴宗祐)가 지은 「이강 서원 상량문(伊江書院上樑文)」 등을 증보·재편하여 1843년(헌종 9)에 『낙재집』을 간행하였다. 박광석(朴光錫)과 서인순(徐麟淳)의 중간서가 실려 있다. 『낙재 문집(樂齋文集)』, 『낙재 선생 문집(樂齋先生文集)』이라고도 불린다.
[형태/서지] 『낙재집』은 10권 4책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으로 상이엽 화문 어미(上二葉花紋魚尾)이다. 크기는 세로 31.7㎝, 가로 20.5㎝, 반곽은 20.7㎝세로, 가로 16.1㎝이다. 1면 10행에 1행의 자수는 20자이다. 권수제와 판심제는 모두 '낙재 선생 문집(樂齋先生文集)'이다. 규장각 한국학 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은 시(詩), 권2는 시(詩), 장편(長篇), 만사(挽詞), 부(賦), 권3~4는 서(書), 권5는 묘갈(墓碣), 비문(碑文), 제문(祭文), 축문(祝文), 권6~7은 잡저(雜著), 권8~10은 연보(年譜)와 연보의 부록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1의 시에는 차운시(次韻詩)와 경물을 읊은 시가 많은 편이며, 시체별로 편차되어 연대순으로 실려 있으며, 권2에는 1575년(선조 8) 향시에서 장원한 부 「유덕동천(惟德動天)」이 실려 있다. 권3~4에는 주로 문인 정구, 체찰사(體察使), 방백(方伯)[관찰사]에게 보낸 편지가 많다. 잡저에는 여러 책을 보면서 핵심이 되는 중요한 점만을 기록한 「공부차록(工夫箚錄)」, 입지(立志)·검신(檢身)·독서(讀書) 등 16개의 강학 조건 항목을 제정해 제자들에게 실천을 권하는 「학교모범(學校模範)」, 임진왜란 때 향병을 모집하는 글인 「초집 향병문(招集鄕兵文)」, 정유재란 때 군량을 모집하는 내용이 담긴 「승차걸속문(承差乞粟文)」 등이 실려 있다.
[의의와 평가] 잡저에 실린 「공부차록」,「학교모범」,「초집 향병문」,「승차걸속문」 등과 같은 글들은 조선 중기 교육사를 연구하고 임진왜란·정유재란의 의병 활동에 관한 연구를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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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낙재(樂齋). 대구 이천리 출신. 서필(徐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응기(徐應期)이고, 아버지는 전교 서흡(徐洽)이며, 큰아버지 서형(徐泂)에게 입양되었다.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주자학 및 이황(李滉)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는 후진을 가르쳤다.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찰방을 지내고, 1595년(선조 28) 청안현감(淸安縣監)에 부임하여 학문의 진흥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그 뒤 1597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하였다.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호조 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 청안(菁安)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대구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자리잡은 이강서원. 낙재 서사원을 배향하는 서원으로 1639년(인조 17) 서원의 모습을 갖췄으나 1871년(고종 8) 훼철된 뒤 복설되지 않았다.
"나라가 파괴되고 집이 망했으며, 임금이 피란했으니 조금이라도 혈기를 가진 이라면 누구인들 피로 얼굴을 적시고 눈물을 삼키지 않을 수 있으랴. 활과 화살을 소지하고 궁시가 없으면 창이나 칼, 혹은 도끼를 잡되 모두 자루를 길게 하라". 임진왜란 당시 대구지역 의병장을 지낸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이 향병 모집을 위해 지은 '초집향병문(招集鄕兵文)'의 한 구절이다. 그는 온 나라가 황폐화되고 백성들이 도륙당하는 처지를 통탄하며 지역민들이 분연히 일어나 적에 대항하기를 주문했다. 평생 학문 연구에만 힘을 쏟은 문인이면서도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목숨을 걸고 지역 의병 활동의 중심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또한 그는 전쟁이 끝난 뒤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 후학 양성을 통해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송담(松潭) 채응린(蔡應麟), 임하(林下) 정사철(鄭師哲)의 학문을 이어 지역 학풍을 후대에 계승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달성에서 꽃 피운 역사 인물 8편'에서는 낙재 서사원의 삶에 대해 다룬다.
서사원의 묘소는 달성 서씨 선산이 아닌 달서구 호산동에 위치하고 있다.
서사원의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이다. 달성 서씨는 대구지역에서 명망이 높은 가문 중 하나다. 대구를 근거로 오랜 기간 세거했을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에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도 실천해왔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달성공원 일대를 나라에 헌납하면서 지역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받게 해 준 일화다.
달성읍지 등에 따르면 세종은 달성 서씨 세거지에 요새를 짓길 원했다.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추고 있어 군사적 요충지로 적격하다는 판단에서다. 세종이 새로 정착할 땅을 줄 테니 세거지 터를 달라고 하자 서씨 가문은 흔쾌히 협조해 포상을 받게 됐다.
하지만 구계(龜溪) 서침(徐沈)은 "나라 땅이 모두 왕의 땅인데 보상을 받음은 당치 않다"며 포상 대신 지역 백성들의 환곡(還穀)이자를 감면해 줄 것을 청했다. 환곡은 곡식을 저장했다가 백성에게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던 제도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세종은 서침의 인품을 높이 사 그의 청을 들어줬다. 이후 지역 백성들은 조선 말까지 환곡이자를 한 섬당 5되씩 감면 받았다. 사사로운 이익보다 민초들의 고된 삶을 먼저 고려한 것이다.
전경창·채응린·정사철의 학문 계승 임란 일어나자 공산의진군 수장 역할 영남의병 활동 기록한 일기도 남겨 전쟁후 하빈현 이천에 머물며 강학 학문업적 기려 1639년 이강서원 배향
서씨 가문의 이 같은 행동은 지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유림들은 서침의 송덕을 기리는 서원을 세웠다. 1665년(현종 6) 조성된 구암서원(龜岩書院)의 탄생 비화다.
서씨 가문의 선행은 수백년의 세월을 지나 또다시 재현됐다. 2019년 달성 서씨 대종회가 서침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대구 중구 동산동 구암서원 터와 남은 건물을 대구시민에게 기부한 것이다.
구암서원은 동산동 일대로 한 차례 이전한 뒤 1995년 북구 산격동 연암공원 내 현 위치로 다시 옮겨졌다. 옛 구암서원 터는 2천500㎡ 규모로 감정가만 35억여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직보다는 학문 연구에 전념
서사원은 1550년(명종 5) 6월4일 세상에 첫발을 내디뎠다. 태어난 곳은 그의 외가가 있던 경상도 성주목 팔거현(현 칠곡)이다. 6세 때 백부인 연정(蓮亭) 서형(徐泂)에게 처음 글을 배운 서사원은 이듬해 그의 양자가 됐다. 비교적 어린 나이에 생모를 잃은 그는 부친의 뜻을 받아 공부에 매진한다. 1566년(명종 21)에는 송담 채응린의 문하에서 수학을 시작했다. 채응린은 위기지학에 전념한 유학자로 당시 지역에서 명성이 높았다. 서사원은 학문에 탁월한 재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채응린뿐만 아니라 전경창과 정사철, 한강(寒岡) 정구(鄭逑)에게도 가르침을 받았는데 모두 그의 능력을 높이 샀다. 특히 정사철은 경전을 강학한 뒤 서사원에게 "그대는 나의 외우(畏友)"라고 극찬했을 정도다. 1575년(선조 8)에는 26세의 나이로 향시에서 장원 급제까지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같은 해 양부인 서형(徐泂)이 타계하고 만다.
3년간 복상을 마친 뒤 그는 1579년(선조 12) 선사(仙査·현 다사읍 이천리)에 이천정사(伊川精舍)를 지어 학문 연구와 강학의 장소로 삼았다.
1584년(선조 17)에는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됐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87년(선조 20)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직을 맡았으나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2년 뒤 재차 동몽교관에 임명됐으나 이번에도 나아가지 않았다. 관직에는 큰 뜻을 두지않고 공부에만 전념한 것으로 보인다. 때때로 그는 지역 여러 곳을 탐방하기도 했다. 1590년(선조 23) 존재(存齋) 곽준 등과 더불어 안동 도산서원, 역동서원을 참배하고 청량산을 유람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듬해에는 연경서원을 찾아 화암(畵巖)을 돌아보고 퇴계의 시에 차운(次韻)을 했다고 한다.
◆임진왜란과 공산의진 의병장
강학에 매진했던 서사원의 삶이 급격하게 바뀐 것은 1592년(선조 25)의 일이다. 임진왜란이 발발, 온 나라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대구지역 인사들은 상황이 날로 악화되자 의병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서사원도 동화사(桐華寺)에 머무르면서 향병 모집을 독려하는 격문인 초집향병통문(招集鄕兵通文)을 짓고, 여러 인사들과 의논해 향병입약(鄕兵立約)을 제정했다.
지역 의병장직도 그가 맡게 됐다. 당시 의병장으로 추대된 정사철이 연로한 나이 탓에 직수행을 고사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임진년 7월6일 공산의진군(公山義陣軍)이 조직됐다. 서사원 외에도 모당(慕堂) 손처눌(孫處訥), 낙애(洛涯) 정광천(鄭光天) 등이 뜻을 함께했다. 대구부사도 군사를 편성하면서 서사원이 참여하도록 배려했다.
수장 역할을 해오던 서사원은 연이어 상(喪)을 당해 손처눌에게 의병장직을 맡겼다. 이후 그는 1594년(선조 27) 청안현감(淸安縣監)에 제수되면서 항쟁 활동을 이어나갔다. 1596년(선조 29) 7월에는 이몽학(李夢鶴)이 반란을 일으키자 군대를 이끌고 목천(木川)에 가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돌아왔다. 또 1597년(선조 30) 4월에는 군대를 이끌고 문경새재를 축성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의병 활동 외에도 그는 또 다른 유산을 남겼다. 임진왜란 시기 일기를 써 당시 영남지역 관군과 의병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을 후대에 전한 것이다. 낙재선생일기에는 전쟁 직후인 1592년 4월12일부터 1595년(선조 28) 9월20일까지 3년5개월 동안의 일상이 기록돼 있다.
◆대구 유학의 르네상스를 열어 서사원의 묘소 관리를 위해 1860년경에 지어진 낙선재.
전쟁이 끝난 뒤에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달성군 하빈현 이천에 머물며 거처하는 곳을 '미락재(彌樂齋)'라 이름 붙였다. 이때부터 자신의 호를 미락재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나중에 '미(彌)'자를 떼고 '낙재(樂齋)'로 호를 고쳤다. 또한 성리학 연구도 본격적으로 파고들었다. 그는 특히 퇴계의 문집을 즐겨 읽으며 퇴계학을 지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01년(선조 34)에는 전쟁으로 불탄 선사재(仙査齋)를 다시 지어 강학 장소로 삼았다. 선사재는 고운 최치원이 해인사에 들어가기 전 잠시 머문 적이 있는 선사암 옛터에 정사철이 세운 서재다. 서사원은 대구 유학 1세대로 평가받는 전경창·채응린·정사철 세 명의 인물 가운데 정사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는 1601년부터 꾸준히 나라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다만 손처눌 등과 함께 지역 유생을 모아 선사재와 연경서원에서 강학하며 대구의 문풍을 진작시켰다. 당시 그는 학생들과 강학하면서 "자고로 후학들이 힘을 얻을 곳으로 주자서만 한 것이 없다"며 강조했다고 한다.
평생을 학문 연구와 함께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인 그는 대구 유학의 전성기를 꽃 피운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시 문학적으로도 업적을 남겼다. 금호강의 경치를 감상하며 시를 짓는 것을 즐겼는데, 선유에 참여한 문인들과 어울리며 탈속적 감성과 도학적 감성을 공유했다. 대구 유학사의 큰 족적을 남긴 그는 1615년(광해군 7)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후 1639년(인조 17)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있는 이강서원(伊江書院)에 배향됐다.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낙재집(樂齋集)
조선 중엽 달성에서 활동한 학자 서사원(徐思遠)의 문집. [저자] 서사원(徐思遠)은 조선 중엽의 학자로 한강 정구(鄭逑)[1543~1620]의 문인이다.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낙재(樂齋), 미락재(彌樂齋), 만오당(晩悟堂)이다. 1550년(명종 5)에 출생하여 1615년(광해군 7)에 사망하였다.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 청안 현감(淸安縣監) 등을 지냈다. 이후 여러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구암서원(龜巖書院)
소재지대구광역시 북구 산격동 산79-1
대구광역시 북구에 있는 조선후기 서침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교육시설.
1675년(숙종 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침(徐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연구산(連龜山) 기슭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18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고 서거정(徐居正)을 추가배향하였으며, 1741년에 서성(徐渻), 1757년에 서해(徐嶰)를 추가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 유림에 의해 복원되었으며, 1943년에 숭현사(崇賢祠)와 강당을 중수하고 1974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숭현사, 3칸의 신문(神門), 5칸의 강당 등이 있다.
사우인 숭현사의 중앙에는 서침과 서거정의 위패가, 오른쪽에는 서해, 왼쪽에는 서성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대구 구암서원은 숭현사는 조선시대 애민정신과 사회지도층의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를 보여주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서원이다.
또한 대구시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이 잘된 서원이기도 하다.
구암서원은 1665년 연구산 서남쪽 숭현사를 건립하고 대구부민이 구계 서침 선생을 봉향 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1717년 중구 동산동으로 이건하고 1718년 3월에 사가 휘거정 선생, 1741년 2월 약봉 휘성 선생, 1757년 8월 함재 휘해 선생을 추가 배향했다 1778년 본도유림이 서원 청액소를 올리고 1779년 유림과 본손 합의에 의해 서원수계를 받았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철 됐다고 1924년 유림에서 복설했고 1943년 숭현사와 강당이 증수됐다. 숭현사를 1974년 보수하고 1975년 2월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됐다가 대구직할시 승격 후 대구시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됐다.
1995년 대구시 북구 산격1동 연암공원 내로 옮겼다.
대구부민이 구계선생을 숭현사에 봉향하게 된 이유는 애민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구계선생은 조선 초 달성 서씨 주손으로 세거지인 달성에 살았으며 임금이 달성이 국가의 군사요새로 필요하다는 뜻을 전했다. 땅을 내주는 대신 지금의 영선시장과 서문시장 자리에 대한 세금을 서씨 일문에 받게 했다. 또한 남산고역과 동산일대 땅을 주고 두터운 상과 세록을 주겠다는 뜻을 보였다.
중요한 것은 구계선생이 이를 백성들에게 사용했다는 점이다.
구계선생은 ‘이 나라의 모든 것이 국왕의 땅이거늘 국가시책에 따라 땅을 바친다고 어찌 신 혼자만이 부귀를 바라겠습니까’라고 사양했다.
가문보다는 대구부민이 고르게 은혜를 입었으면 좋겠다고 청한 뒤 대구지방의 환곡이자를 한섬에 다섯되씩 감해 달라고 상소를 올렸다.
국왕이 선생의 애국애족의 마음을 칭찬한 뒤 대구 도호부에서 이를 실시하도록 만들었다. 그 뒤 대구부민은 조선말까지 그 혜택을 입은 것으로 알려졌다.
서침의 은혜에 백성들은 감동했고 1665년 구암서원의 최초 건물인 숭현사를 세워 선생을 모셨다. 후대에도 선생을 기리는 일이 이어졌으며 1971년 달성 성내 중심부에‘달성 서씨 유허비’가 세워졌다.
숭현사는 강당 바로 뒤에 3m쯤 떨어져 있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구암서원 숭현사는 대구 시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서원 안에 있을 뿐 아니라 보존 상태가 좋은 편이다.
달성서씨대종회가 문중 서원 격인 옛 구암서원 소유권을 무상으로 대구 중구에 넘긴다.
6일 대구 중구청에 따르면 달성서씨대종회는 동산동·약령시 일원 도시재생뉴딜사업 추진을 위해 옛 구암서원(약 2500㎡)을 중구청에 기부하기로 했다.
구계 서침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옛 구암서원은 북구로 이전하기 전 자리했던 터로 현재는 한옥 숙박 등 전통문화체험관으로 쓰이고 있다.
옛 구암서원. 달성 서씨 문중이 서원을 중구에 기부채납함으로써 이 공간은 도시재생뉴딜사업의 주요 거점공간으로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중구는 국가공모에 선정돼 이 일대를 대상으로 뉴딜사업을 계획하고 있다.
사업이 본격화되면 옛 구암서원은 고택 문화 전시와 숙박 체험이 가능하고 공연이 상설화되는 전통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보인다.
중구는 이 일대에 한옥이 밀집해 있는 점과 연계해 새로운 관광코스 개발도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현재 인기를 끌고 있는 근대문화골목과도 맞닿아 있어 많은 관광 수요를 창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중구청은 이 지역 주민들을 위한 생활 인프라 개선, 골목경제 활성화 등도 추진할 방침이다.
류규하 중구청장은 "달성서씨대종회가 옛 구암서원을 중구 구민과 대구시민을 위해 내어주심으로써 큰 선물이 될 것 같다. 의미있는 결정을 해주신 데 대해 존경과 감사를 표하고 뉴딜사업이 성공적으로 추진될 수 있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기부채납 업무 협약식은 권영진 대구시장, 류규하 중구청장, 서영택 달성서씨대종회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2019년 12월 7일 오전 인터불고호텔에서 열렸다.
구계서원(龜溪書院)
구계서원(龜溪書院)은 남차1리에 세웠던 서원으로, 광해군 5년(1613)에 현감 조인행(趙仁行)과 신경행(辛景行) 등이 인근의 사람들에게 통문을 보내, 청안현감과 호조좌랑(戶曹佐郞)을 지낸 서사원(徐思遠), 보령현감을 역임한 이득윤의 스승 박지화(朴枝華), 괴산현감을 지낸 이득윤(李得胤)을 배향하였다. 그 후 현종 7년(1666)에는 송시열의 문인 황처검(黃處儉) 등이 사림들에게 통문을 보내, 다시 이준경(李浚慶)과 헌릉참봉을 지낸 이당(李塘)을 추가로 배향했다. 이때 송시열에게 문의해 위치를 정하였는데, 이준경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서사원ㆍ박지화ㆍ이득윤ㆍ이당을 차례로 배향했다. 숙종 5년(1679)에는 현감 남한명(南漢明)이 상량문과 서원기 및 고적 사실을 써서 걸었으나, 영조 4년(1728)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없어지고 말았다. 이인좌의 난은 당시 소론(小論)과 남인(南人)이 중심이 되어 영조(英祖)와 노론(老論)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모반사건이다. 이인좌는 경기도와 경상도 등 여러 지역의 선비들과 난을 모의했으며, 이들은 상여를 가장해 그 안에 무기를 숨기고 ‘수름재’를 거쳐 청주로 들어가 청주성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청주 지역에서 일어난 의병군과 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시 도안을 비롯한 청안 일대가 이들에 의해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이때 곡산연씨 가문의 연세홍(延世鴻)ㆍ연수창(延壽昌)은 의병을 모아 이인좌의 무리들로부터 백성을 보호하고, 연수창은 상당산성의 적을 물리쳐 1등공신에 책록되었다. 당시 이 지역의 사족(士族)들은 소론계도 있었지만, 노론계 성향이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구계서원’은 고종 6년(186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어 지금은 초석만 남아있다. 구계서원 터는 증평군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되었다.
서사원(徐思遠, 1550∼1615)은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달성이다. 자는 행보(行甫)이고, 호는 악재(樂齋)이다. 전교 서흡(徐洽)의 아들이며, 큰아버지인 서형(徐泂)에게 입양되었다. 그는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이황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였고,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과 찰방을 지냈다. 선조 28년(1594년)에 청안현감으로 부임하여 연충수 등과 함께 향교를 정비하고 학사(學舍)에서 사림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 그 후 1597년 옥과현감(玉果縣監)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하였으며,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 형조ㆍ호조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伊江書院)과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악재집(樂齋集)』이 있다.
이준경(李浚慶, 1499∼1572)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자는 원길(原吉)이고, 호는 동고(東皐)이다. 홍문관수찬 이수정(李守貞)의 아들이며, 한성부 동부 연화방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이세좌(李世佐)는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 때 화를 입어 죽음을 당했다. 이때 연좌되어 아버지, 형 이윤경과 함께 6살의 나이로 충청도 괴산에 유배되었다. 그 후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났다. 그는 외할아버지 신승연과 황효헌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연경 문하에 들어가 성리학을 본격적으로 배웠다. 중종 26년(1531)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한림을 거쳐 1533년에 홍문관부수찬이 되었다. 그 해에 구수담(具壽聃)과 함께 경연에서 기묘사화 때 죄를 받은 사류들의 무죄함을 역설하다가, 김안로(金安老) 일파의 모함을 받아 파직되었다. 1537년에 김안로 일파가 제거된 뒤 다시 등용되어 사헌부장령ㆍ홍문관직제학ㆍ부제학으로 승진하였고, 그 후 성균관대사성ㆍ형조참판ㆍ병조판서ㆍ대사헌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550년 정적이었던 영의정 이기(李?)의 모함을 받아 충청도 보은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는 1555년에 을묘왜란을 물리쳐 우찬성에 오르고 병조판서를 겸하였으며 1558년에 우의정, 1560년에 좌의정, 1565년에 영의정에 올랐다. 그는 1567년 하성군 균(鈞)을 선조로 즉위시키고 원상(院相)으로서 국정을 보좌하였는데, 이때 기묘사화로 희생된 조광조(趙光祖) 등과 을사사화로 처벌을 받은 모든 사림들을 신원하였다. 그러나 기대승(奇大升)ㆍ이이(李珥) 등 신진사림들과 뜻이 맞지 않아 이들로부터 비난과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동고유고(東?遺稿)』와 『조선풍속(朝鮮風俗)』등이 있다.
박지화(朴枝華, 1513∼1592)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본관은 정선(旌善)이다. 자는 군실(君實)이고, 호는 수암(守庵)이다. 서경덕의 문하에서 학문을 수학하여 유ㆍ불ㆍ선 등에 통달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죽었다. 그의 가문은 고조 때 청주로 이주하였고, 그는 이득윤에게 역학 등을 가르치는 등 후진의 양성에도 힘을 기울여 후에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그의 저서로는『수암유고(守庵遺稿)』ㆍ『사례집설(四禮集說)』등이 있다. 이득윤(李得胤, 1553∼1603)은 조선 중기의 역학자이자 악인(樂人)으로, 본관은 경주이다. 자는 극흠(克欽)이고, 호는 서계(西溪)이다. 고려 말의 문신 이제현의 후손으로, 청원군 옥화동(玉華洞)에 거주하였다. 그는 서기(徐起)의 문하에서 수학한 뒤 근처에 살던 박지화(朴枝華)에게 역학을 배웠고, 선조 21년(1588)에 진사가 되었다. 1597년에 학행으로 추천되어 희릉참봉이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독서에 전념하다가 왕자사부가와 형조좌랑ㆍ의성현령을 지냈다. 그는 광해군 때 혼란한 정계를 피해 고향에 머무르면서 선영 옆에 정사(精舍)를 짓고 완역재(玩易齋)라고 하였다. 김장생(金長生)ㆍ정두원(鄭斗源) 등과 서한을 교환하며 역학과 음악을 토론하였다. 음악에 남다른 관심을 두어 고향에 머무르는 동안 거문고에 관련된 것을 집대성하여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라는 거문고악보를 남겼다. 그는 인조반정 후 선공감정(繕工監正)이 되었고, 이듬해 괴산군수가 되어 이괄(李适)의 난으로 소란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기강을 바로잡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과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서계집』 등이 있으며, 특히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는 『안상금보(安常琴譜)』ㆍ『조성금보(趙晟琴譜)』와 더불어 임진왜란 이전의 음악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이당(李塘, 1567∼1644)은 본관이 고성이고, 자는 진언(縝彦)이다. 청안현 남쪽 군방촌(群芳村)에 거주하였다. 선조 39년(1606)에 사마시에 입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나, 광해조에 국가기강이 문란해지자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인조반정 후 헌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학문에 더욱 힘써 인근사림들이 모여들어 경내의 문풍(文風)이 크게 일어났다. 이득윤ㆍ황후천(黃朽淺) 등 여러 선비들과 친하게 사귀었고, 주역과 춘추를 강학하였다. 만년에 스스로 방촌거사(芳村居士)라고 불렀고, 현종 7년(1666)에 구계서원에 추가로 배향되었다.
다사읍 이천리 이강서원(伊江書院)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있는 이강서원(伊江書院). 조선 중기의 학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에 있는 이강서원(伊江書院)은 조선 중기의 학자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 1550∼1615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1639년(조선 인조 17년)에 창건해 19세기 중엽에 중건됐다.
이강서원은 산기슭 경사진 곳에 남향으로 세워져 있으며 경내에는 강당인 완락당(琓樂堂), 동경재, 서의재, 이락루(二樂樓)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완락당은 전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고 그 앞에 있는 이락루는 3칸으로 이루어진 건물이다.
서사원은 조선 중기 명종에서 광해군 때의 학자다.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행보(行甫), 호는 미락재(彌樂齋)'악재(樂齋)다. 전교 서흡(徐洽)의 아들이며, 큰아버지 서형(徐浻)에게 입양되었다. 달성 이천 출신이며,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주자학 및 이황의 문집을 깊이 연구하고 중년 이후는 후진을 가르쳤다. 선조 때 감역'찰방을 지내고 1595년(선조 28년) 청안현감에 부임해 학문 진흥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그뒤 1597년 옥과현감에 임명됐지만 부임하지 않고 이듬해 사임했다. 1602년에도 연기현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후에도 형조'호조 정랑, 역학교정 등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대구의 이강서원, 청안의 구계서원에 제향됐다. 저서로는 '악재집'(樂齋集)이 있다.
정의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면 이천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서원.
개설
이강서원은(伊江書院) 낙재(樂齋) 서사원(徐思遠)[1550~1615]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서사원의 본관은 달성(達成), 자는 행보(行甫)이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이다. 선조 때 학행으로 감역(監役), 찰방(察訪), 청안 현감(淸安縣監) 등을 지냈다. 1597년(선조 30) 옥과 현감(玉果縣監) 등 여러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응하지 않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저서로는 『낙재집(樂齋集)』이 있다.
위치
이강서원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다사읍 이천리 277번지에 있다. 대구 다사 초등학교[달성군 다사읍 다사로 86] 정문에서 다사로[북쪽]를 따라 2.1㎞ 가면 왼쪽으로 이강 서원 안내 표지석과 함께 삼거리가 나온다. 안내 표지석 방향을 따라 왼쪽 산길을 260m 오르면 갈림길이 나오고, 갈림길에서 우회전하여 20m 가면 이강서원이 있다.
변천
1636년(인조 14) 박종우(朴宗祐)가 쓴 「이강서원 묘우 상량문(伊江書院廟宇上樑文)」에 따르면 이강서원은 서사원의 문생(門生)인 도성유(都聖兪)와 박종우가 고을의 사우(士友)들과 도모하여 서사원이 강학하던 자리에 묘우(廟宇)를 세운 것에서 출발한다. 1639년(인조 17) 서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 집권기 때인 1871년(고종 8) 훼철된 후 복설되지 않았다. 별도의 재실에서 춘추로 향사를 지낸다고 한다.
형태
서원의 배치는 강당인 완락당(玩樂堂)과 외삼문인 이락루(二樂樓)가 남북축 선상에 자리한다. 완락당은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중당 협실형(中堂挾室形)이며, 가구는 삼량가(三樑架)이다. 이락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어칸의 지붕을 높인 산형 대문(山形大門)인데, 어칸은 대문으로 사용하고 양측 칸에는 온돌방을 두었다.
의의와 평가
이강서원은 1639년 창건된 역사가 깊은 서원이다. 하지만 자료가 소략하여 내력을 명확히 알 수 없고, 19세기 훼철된 이후 완락당만을 복원하여 춘추로 향사를 지내며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