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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 | ||
+ |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 |
2022년 10월 9일 (일) 10:30 판
탐라문화제(耽羅文化祭)
매년 10월 초에 제주도 일원에서 열리는 전통문화 축제. 본래 한라문화제(漢拏文化祭)라고 하였는데 2002년에 탐라문화제(耽羅文化祭)로 바뀌었다. ‘한라’로는 제주도 전통문화 축제라는 점을 온전하게 담기 어렵다고 보아 이를 대신하여 ‘탐라’로 바꾸게 된 것이다.
탐라문화제는 1962년 제주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제주의 대표 행사입니다.
새 기상, 알찬 문화, 풍요한 제주’의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제12회 한라문화제가 1973년 11월 17일부터 11월 19일까지 제주도 일원(서제: 제주도공설운동장)에서 제13회 한라문화제 추진위원회(대회장 이승택 제주도지사, 집전위원장 현용준 한국예총제주도지부장) 주최, 제12회 한라문화제 집행위원회 주관으로 열렸다.
주요행사로 11월 17일 서제(제주도 공설운동장)를 시작으로 서판관 추대(서련), 사굴제(김녕사굴), 걸궁 경연, 가장행렬을 비롯한 공연, 전시행사 등 26개 종목이 펼쳐졌다.
예년에 없던 ‘서판관 추대(서련)’와 ‘사굴제(김녕사굴)’가 신규행사로 개최되었는데 당초부터 기획된 것이 아니라 모범공무원 추대 및 1계급 특진 행사인 ‘서판관 추대(서련)’, 관광자원화 방안으로 김녕사굴 전설을 연극화한 ‘사굴제’를 도 당국에서 추진하는 것을 인지한 예총 지부장단이 한라문화제와 연계하는 방안을 제시함으로써 중단 위기를 맞은 한라문화제를 개최할 수 있었다.
한라문화제가 도민의 잔치라고 하면서도 제주시 지역서만 열렸으나 12회에는 걸궁 및 민속가장행렬을 비롯하여 칠십리제 등 7개의 행사를 서귀포시 지역에서도 개최함으로써 진정한 축제장의 ‘제주도일원’을 펼치게 되었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재일본ㆍ재부산ㆍ재대전 향우회 인사를 초청함으로써 향토문화축제를 도외권으로 확장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서련(徐憐)제주판관
목차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連城君))-서준영(徐俊英 연성군(連城君))-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관계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작은고고고고고조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미신을 타파한 서련(徐憐) 판관
서련(徐憐) 판관은 김녕사굴(金寧蛇窟) 일화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제주도와 연관된 서씨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입도조 서희례(徐希禮)보다 4대를 앞서는 인물이다.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19세 손이며 연산(連山)을 관(貫)으로 한 연성군(連城君) 서준영(徐俊英)으로부터는 5세 손이 된다. 그는 성종 25년(1494)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천성이 총명하였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다.
부모 없이 자람을 가엽게 여긴 외조부 양경공(良敬公) 정문형(鄭文炯)은 그의 이름을 련(憐 : 불쌍히 여길 련)이라 짓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쳤다. 외조부 슬하에서 학문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낸 서련은 중종 6년(1511)에 18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중종 8년에 제주 목판관(牧判官)으로 임명되어 도임(到任)했는데 그는 역대 판관 중 가장 연소자로 알려진다.
그 무렵 제주의 구좌(舊左) 지방에는 미신에 얽매인 해괴한 폐습이 있었다.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김녕사굴(蛇窟)에는 속칭 「대맹」이라는 큰 뱀이 숨어 살아,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15~16세 되는 청순한 처녀를 제물(祭物)로 바쳐오고 있었다. 만약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뱀이 조화를 일으켜 큰 바람을 불게하여 모처럼의 농사가 폐작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윤번제로 집집마다 사굴(蛇窟)에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했기 때문에 딸을 가진 집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 같은 폐습은 관아(官衙)에서도 알게되어 전임 관원(官員)인 이필희(李必希)가 인명을 희생시키는 일을 삼가도록 극구 만류했으나 뿌리 박힌 미신 탓인지 주민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부임 후 이런 사정을 듣게 된 서련은 "아무리 무지(無知)한 백성이라 하나 귀중한 인명(人命)을 뱀에게 바친다니 될 말이냐."고 통탄하명서 잔인무도한 악습(惡習)을 뿌리뽑겠다고 나섰다.
중종 10년(1515), 그는 주민들에게 전과 같이 제(祭)를 올리도록 한 후 병졸 수십 명으로 하여금 창칼을 지니고 숯과 염초(焰硝 : 충격으로 열을 발생시켜 폭발시키는 물질)를 준비하여 굴 입구에 대기시켰다. 북을 치자 과연 큰 구렁이가 굴 밖으로 나와 소녀를 삼키려 하였다. 이 때를 기다려 서련이 들고 있던 창으로 뱀을 향해 내리 찌르자, 병졸들과 역사(力士)들도 일거에 도끼와 창으로 사정없이 난자(亂刺)하였다. 이와 동시에 독약과 기름을 꿈틀대는 뱀의 몸뚱이에 퍼붓고 불을 당기자 오랫동안 주민을 괴롭혀 온 뱀은 드디어 타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청년 판관 서련(徐憐)을 존경하고 추앙하는 소리가 전도에 날로 높았다. 그러나 인걸(人傑)은 단명(短命)하는 것인지 중종 10년(1515) 4월 10일, 겨우 22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순직하니 그를 애도하는 도민의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다. 일설(一說)에 는 서련이 뱀을 죽인 뒤 말을 타서 성안(城內)으로 달려오는데 등뒤에서 한줄기 붉은 요괴가 구름을 타고 따랐으며, 그가 관아(官衙)에 도달하자마자 쓰러져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더니 10여일 후에 기어이 관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서련 판관은 충남 홍성군 보개산(寶蓋山) 덕은(德隱) 땅에 안장되었다. 그의 관구(棺柩)가 제주를 떠날 때에 도민들은 이를 붙들며 애절한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한다. 미신이 만연했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서련 판관의 대담무쌍한 행동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폐습을 퇴치하려는 살신구민(殺身救民)의 지성(至誠)과 선정(善政)을 베풀려는 호연한 용기와 의지가 있음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김석익(金錫翼)은 「탐라기년(耽羅紀年)」에서 서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련(徐憐)이 연소(年少)했기 때문에 기질과 태도가 거칠고 경솔하여 비록 당나라의 한유(閒遊)가 종용(慫慂)의 악어를 길들인 고사(故事)에는 비길 수 없으나, 그 굳세고 올바른 기질과 백성들의 재해(災害)를 제거해 준 공(功)을 우러러 볼 때 중국 광동(廣東)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제주 사람은 마땅히 한시라도 서련의 공적을 잊어서는 아니될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오늘날 그의 공을 알아주는 이가 드므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서련이 재임시 제주 목사(牧使)는 성수재(成秀才)였는데 그는 청렴정대(淸廉正大)하고 과묵엄숙(寡默嚴肅)하였으므로 아전(衙前)들이 감히 부정을 저지르지 못했던 선정관(善政官)이었으며 그 또한 재임 중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녕사굴에 얽힌 서련 판관의 유덕(遺德)을 기리고자 1942년에는 구좌읍 하도리의 유지 동은(東隱) 강공칠(康共七) 선생이 앞장서 김녕사굴 앞에 서련을 추모하는 조그만 공덕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서련 판관의 행적은 조금씩 잊혀져 전설처럼 되어가고 공덕비마저 노후되었다. 그러자 이천 서씨 제주문중회가 중심이 되어 1972년 4월 10일에 다시금 그의 용기와 슬기를 기리는 사적비(事跡碑)를 세웠으니 그의 치적은 천세(千歲) 만대(萬代)에 영원히 기억되어질 것이다.
김녕사굴(金寧蛇窟)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현무암 동굴. 예전에 이 굴에 사는 뱀에게 매해 봄가을에 처녀를 제물로 바쳤다는 전설이 있다. 만장굴과 함께 우리나라 천연기념물로, 천연기념물 정식 명칭은 ‘제주 김녕굴 및 만장굴’이다. 길이는 705미터.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동김녕리의 사굴(蛇窟)과 관련된 전설로서, 조선 중종(中宗) 때 서련(徐憐) 판관이 사굴에 사는 큰 구렁이를 퇴치했다는 전설.
탐라문화제(耽羅文化祭)
탐라문화제는 1962년 제주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제주의 대표 행사입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대전 효문화 뿌리축제(大田 孝文化 祝祭)
대전효문화뿌리축제는 천혜 자연환경 속에 위치한 뿌리공원, 한국족보박물관, 효문화마을, 효문화진흥원을 아우르는 효문화 인프라를 기반으로 효의 가치와 의미를 경험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보고 가족의 정을 느낄 수 있는 축제이다. 전국에 어르신과 청소년, 그리고 3대가 모두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축제의 장이 되어 전국에 효 실천 문화 확산 계기를 마련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