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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9월 12일 (월) 13:13 판

신채호 선생은 그의 저서 《조선사연구초》와 《조선상고사》에서 말하기를 고조선(古 朝鮮)은 세 개의 영역으로 나뉘어 다스려졌는데 신조선(眞朝鮮)과 불조선(番朝鮮)과 말조선(馬朝鮮)이라 하였다. 그리고 이 3개의 조선을 다스리는 군왕(君王)의 명칭이 각각 신한(辰韓), 불한(番韓, 번한), 말한(馬韓, 마한)이라 하였는데, 신한의 ‘신’은 太(태)의 뜻이며 總(총)의 뜻이며 上(상)의 뜻이고, 불한의 ‘불’은 地(지)의 뜻이고, 말한의 ‘말’은 天(천)의 뜻이라 하였으니, 신한이 가장 높고 불한과 말한은 신한을 보좌한다고 하였다. 그 위치는 대략 불한이 신한의 서남쪽이고 말한이 신한의 동남쪽이라 하였다. 그리고 《관자(管子)》에 기록된 發朝鮮(발조선)은 ‘불조선’의 전음(轉音)이고 지나국(支那國)에서 가까우므로 기록에 보였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고조선이라 불리는 신단(辰 檀)은 3개의 영역으로 나뉜바 없으며 불조선(番朝鮮)이 신단(辰檀)의 서남쪽에 위치한 적도 없었고 말조선(馬朝鮮)이 신단(辰檀)의 동남쪽에 위치한 적도 없었다. 오히려 말조선(馬朝鮮)으로 인식되었던 말한(馬韓, 마한)은 신단(辰檀)의 서남쪽에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에 쫓기어 건국되었고, 불조선이라 불리던 변진(弁辰)은 신단(辰檀)의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니, 삼조선(三朝鮮) 설(說)이 우리 역사에 미치는 폐해가 크다 하겠다.

이제 삼조선(三朝鮮) 설(說)이 틀렸음을 증명하고 《관자》에 보인 발조선(發朝鮮)이 무엇이었는지 그 실체를 파악해 보고자 한다.

·

삼조선 (三朝鮮) 설(說) 비판

신채호 선생의 삼조선설은 주로 《사기(史記) 조선렬전(朝鮮列傳)》을 근거로 한다.

《사기 조선렬전》

朝鮮王滿者故燕人也. 自始全燕時嘗略屬眞番[一]朝鮮[二]

조선왕 위만은 옛 연국(燕國) 사람이다. 연국(燕國) 전성기 때부터 일찍이 眞番朝鮮(진번조선)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위 구절의 주석서인 집해(集解)와 색은(索隱)을 보면 眞番朝鮮(진번조선)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우선 집해(集解)를 보면

[一] 徐廣曰一作莫

서광(徐廣)이 말하기를 眞番(진번)은 眞莫(진막)으로도 쓴다고 하였다.

그리고 색은(索隱)을 보면

[二]如淳云燕嘗略二國以屬己也

여순(如淳)이 말하기를 연국(燕國)이 일찍이 두 나라를 침략하여 자신들에 복속시켰다.

신채호 선생은 색은(索隱)의 주석에 眞番朝鮮(진번조선)이 2개의 나라이므로 이것은 眞朝鮮(진조선)과 番朝鮮(번조선)을 나타내며, 집해(集解)에 말하기를 眞番(진번)은 眞莫(진막)으로도 쓰므로 莫朝鮮(막조선)도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삼조선 설은 집해와 색은을 잘 살펴보면 틀린 것을 알 수 있다.[1] 眞番朝鮮(진번조선)이 2개의 나라라는 것은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이 두 개의 나라라는 말이지 진조선(眞朝鮮)과 번조선(番朝鮮)이라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기 조선렬전》에는 故滿得兵威財物侵降其旁小邑眞番臨屯皆來服屬(그래서 위만은 군사의 위세와 재물을 얻게 되어 그 주변의 소읍들을 침략하여 항복시키니, 진번과 림둔도 모두 와서 복속하였다)라는 구절이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眞番朝鮮(진번조선)은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나타내는 것이지 진조선(眞朝鮮)과 번조선(番朝鮮)을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그렇다면 《관자》에 기록된 발조선(發朝鮮)은 과연 무엇인가? 이것을 풀기 위해서는 람이(藍夷)와 풍이(風夷)의 실체를 파악하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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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이(藍夷)와 풍이(風夷)의 실체

《해동역사》에 람이(藍夷)와 풍이(風夷)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해동역사 동이총기》

藍夷卽風夷

람이(藍夷)는 즉 풍이(風夷)이다.

여기서 람이(藍夷)이란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나온 람국(藍國)이 분명하다.

《규원사화》

蚩尤氏之後封于南西之地巨野浩豁海天靚碧曰藍國宅奄慮忽.

치우의 후손에게는 서남쪽의 땅을 봉하였다.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람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규원사화》에 람국(藍 國)이라 이름한 이유는 하늘이 푸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생각해 보면, 신단(辰檀)의 다른 봉국들은 대부분 우리말을 한자(漢字)로 음차(音借)하였다. 비류 옥저 개마 예 진번 부여 구려 등등 모두 음차하여 나라이름을 지었지만, 유독 람국(藍國)만 藍(람)의 뜻을 빌어 나라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며 《규원사화》의 저자가 藍이란 글자를 해독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좀더 객관적으로 고려해보면, 《규원사화》에 나온 람국(藍國)과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에 나온 번한세가(番韓世家)의 공통점이 두 가지가 있다.

- 첫 번째는 초대 임금이 치우의 후손이라는 점이다.

- 두 번째는 그 위치가 신단(辰檀) 도읍으로부터 서남쪽에 존재하였다는 점이다.

이런 공통점이 있는 이유는 《규원사화》에 나온 람국(藍 國)과 《한단고기》에 나온 번조선(番朝鮮)이 같은 국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환단고기》에서는 번조선(番朝鮮)이라 하였고 《규원사화》에서는 람국(藍國)이라 하였을까요? 그 해답은 앞서 보여준 《해동역사》의 藍夷卽風夷(람이는 즉 풍이다)에 있는 것이다. 風은 “바람”이란 뜻이므로 람국(藍國)은 즉 “바람국”의 “람”을 藍(람)으로 사음(寫音)하여 줄여 쓴 것이다. 그렇기 때문이 藍夷(람이)가 風夷(풍이)라고 적은 것이다.

그렇다면, 《관자(管子)》에 기록된 發朝鮮(발조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재야학계에서는 신채호 선생의 설명에 따라 발조선(發朝鮮)을 하나의 나라로 보고 있지만, 발조선(發朝鮮)은 하나의 나라가 아니라 두 개의 나라이다. 즉, 發(발)이란 나라와 朝鮮(조선)이라는 두 개의 나라를 일컬은 것이다.

發(발)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사기(史記)우제기(虞 帝紀)》에 이르기를 南撫交阯北發西戎析枝渠廋氐羌北山戎發息愼(남쪽으로 교지(交趾) 북발(北發)을, 서쪽으로 융(戎) 석지(析枝) 거수(渠搜) 저족(氐族) 강족(羌族)을, 북쪽으로 산융(山戎) 발(發) 식신(息愼)을 위무하였다)고 하였으니 發(발)이라는 나라는 진국(秦國)의 북쪽이므로 신단(辰檀)의 서남쪽임이 분명하다. 한편, 지나인들이 사용하는 조선(朝鮮)이란 표현은 단군(檀君)이 건국한 신단을 가리키지 않는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지나인들에게 인식되기를 항상 은국(殷國)에서 망명한 서여(胥餘)와 위만(衛滿)의 조선국(朝鮮國)을 나타냈었던 것이다.

따라서 發(발) 이란 나라는 바로 藍國(람국)이다. 제대로 쓰자면 “바람국”인데 이름 한자로 寫音(사음)하여 發藍國(발람국)으로 쓴 것이나, 《규원사화》에서는 藍으로 썼고 지나인들은 發로 썼으며 《한단고기》에서는 신채호 선생의 이론에 따라 番으로 쓴 것이다. 그러므로 番(번)은 “불”이 아니라 “바람”인 것이며 번한(番韓) 즉 변진(弁辰)은 신단(辰檀)의 서남쪽이 아니라 동남쪽에 있던 나라이다.

치우가 첫 임금이었던 람국(藍國)의 뜻이 “바람국”이었기 때문에《규원사화》에 이런 구절이 존재하는 것이다.

《규원사화》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풍이는 곧 치우씨의 일족이다.

이상 진술한 바에 따라 《한단고기 삼한관경본기》의 이름을 바로잡으면, 〈번한세가〉의 치두남(蚩頭男)에서 소정(小丁)까지는 〈바람국세가〉로 고쳐져야 하며 서여(西余)에서 수한(水韓)까지는 〈바람국본기〉로 고쳐야 한다. 기후(箕詡)에서 기준(箕準)까지는 〈조선국본기〉가 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마한세가〉의 마한(馬韓)은 확실하지 않으나 아마도 진번국(眞番國) 군왕들의 역사가 아닌가 하는데 《사기》에 眞番(진번)은 眞莫(진막)으로도 쓴다고 하였으므로 莫(막)을 馬(마)로 사음(寫音)한 것이 아닌가 한다.


왜 바람의 나라인가?

그런데 왜 치우가 첫 임금이었던 나라이름이 바람국(發 藍國)인가 하는 점을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하느님 환인(桓仁)의 아들 환웅(桓雄)이 고마족(熊族)과 연합하여 단군(檀君)이 정권을 잡아 나라 이름을 신단(辰檀)이라 하였으니 이는 해(日)와 달(月)과 별(星)들의 광명신(光明神)의 나라이기에 신단(辰檀)이라 하였던 것처럼 치우씨는 환웅(桓雄) 시절에 풍백(風伯)이었기 때문에 바람국이라 이름 한 것이다.

《환단고기》

桓雄天皇使風伯釋提羅雖除鳥獸蟲魚之害

한웅천왕께서 풍백(風伯) 석제라(釋提羅)를 시켜 짐승과 벌레와 물고기의 해를 제거하도록 하였다.

《규원사화》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鳥獸雜處, 人民艱困殊甚, 且猛獸‧毒蟲不時衝動, 人民被害不少. 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이 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었기에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신시씨는 곧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 두 개의 기록을 비교하여 보면 짐승들의 해를 제거한 것은 풍백이고 그가 바로 치우임을 알 수가 있다(환단고기에 석제라라고 한 것은 아마 치우가 성씨이고 석제라가 이름이 아닌가 한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