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선(삼국)"의 두 판 사이의 차이
39번째 줄: | 39번째 줄: |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 ||
+ | == 삼국지 [[서선(삼국)|서선]](徐宣)전 == | ||
+ | [[서선(삼국)|서선]](徐宣)의 자는 보견(寶堅)이고, 광릉군(廣陵郡) 해서현(海西縣) 사람이다. 전란을 피해 강동(江東)으로 갔었는데, 손책의 초빙을 거부하고 본군(本郡)으로 돌아왔다. | ||
+ | |||
+ | 서선은 진교(陳矯)와 함께 요직을 맡았으며, 두 사람은 명성이 나란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태수(太守) 진등(陳登)에게 중시되었고, 또 진등과 함께 태조에게 마음을 의지했다. 해서(海西)와 회포(淮浦) 두 현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위(都尉) 위미(衛彌)와 현령(令) 양습(梁習)은 밤에 서선의 집으로 도망쳤으며, 서선은 몰래 그들을 호송하여 죽음을 면해 주었다. 태조는 독군(督軍) 호질(扈質)을 파견하여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토벌하도록 하였지만, 병력이 적어 나아가지 않았다. 서선은 몰래 호질을 만나 문책하고, 형세를 설명했다. 호질은 곧 진군하여 적을 무찔렀다. 태조는 그를 불러 사공연속(司空掾屬)으로 삼았다. 동민(東緡)ㆍ발간(發干)의 령(令)으로 임명됐으며, 제군태수(齊郡太守)로 승진하였고, 중앙으로 들어가 문하독(門下督)이 되었으며, 태조를 따라 수춘(壽春)으로 갔다. 마침 마초(馬超)가 난리를 일으켰고, 대군은 서쪽 정벌에 나섰다. 태조는 관속(官屬)을 보고 말했다. | ||
+ | |||
+ | “지금 나는 원정을 가야만 하는데, 이곳이 평정되지 못하였으니, 후에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오. 응당 청렴하고 공정하며 덕이 있는 사람을 뽑아 이곳을 진무하고 통솔하도록 해야만 하오.” | ||
+ | |||
+ | 그래서 [[서선(삼국)|서선]]을 좌호군(左護軍)으로 삼아 남아서 군사들을 통솔하도록 했다. 대군이 돌아오자, 서선은 승상동조연(丞相東曹掾)이 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위군태수(魏郡太守)가 되었다. 태조가 낙양(洛陽)에서 붕어하자, 신하들은 궁전 안으로 들어와서 상(喪)을 발표했다. 어떤 사람이 여러 성의 군수를 교체시키고, 조씨와 동향인 초(譙)ㆍ패(沛) 사람을 기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선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 ||
+ | |||
+ | “지금 국가는 통일되었고, 사람들은 각기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초(譙)ㆍ패(沛) 사람만을 기용해야 하는가? 이것은 각 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들의 마음을 싸늘하게 하는 것이다.” | ||
+ | |||
+ | 문제는 [[서선(삼국)|서선]]의 말을 듣고 말했다. | ||
+ | |||
+ | “이른바 사직지신(社稷之臣)이오.” | ||
+ | |||
+ |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승진했으며,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았고, 성문교위(城門校尉)로 바꿔 임명되었으며, 1개월 후에는 사예교위(司隸校尉)로 승진하였고,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전임되었다. 그는 문제를 따라 광릉(廣陵)에 갔는데, 전군이 배를 탔을 때 폭풍이 불어와 파도가 쳤다. 문제의 배가 빙그르 돌더니 기울어지자, 서선은 뒤에 떨어져 있는 것이 싫어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 제일 먼저 목적지에 도달했다. 문제는 그의 용감함을 칭찬하고 상서(尚書)로 승진시켰다. | ||
+ | |||
+ |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서선은 진양정후(津陽亭侯)로 봉해졌으며, 식읍은 2백 호였다. 중령군(中領軍) 환범(桓範)은 [[서선(삼국)|서선]]을 명제에게 천거하며 말했다. | ||
+ | |||
+ | “신이 듣건대 제왕께서 인물을 기용하실 경우에는 시대를 헤아리는 유능한 인재를 임명하고, 천하를 쟁탈하는 시대에는 책략을 우선으로 하며, 천하가 평정된 이후에는 충의(忠義)를 제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진문공(晉文)은 구범(舅犯)의 계책을 사용했지만 옹계(雍季)의 정의로운 말을 칭찬했고, 고조(高祖)는 진평(陳平)의 지혜를 사용했지만 어린 군주를 주발(周勃)에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사사로이 상서(尚書) [[서선(삼국)|서선]](徐宣)을 살펴보았는데, 사람됨이 충의롭고 성품은 돈후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유달리 청결하고 전아하며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확고하여 움직이기 어려우며 국가에 대한 절의가 있고, 주와 군의 장관을 역임하면서 모두 그 직무를 빛냈습니다. 지금 복야(僕射)의 직책이 결원이니, [[서선(삼국)|서선]]에게 이 일을 대신 관장하도록 하십시오. 책임이 무거우니, [[서선(삼국)|서선]]보다 적임자는 없을 것입니다.” | ||
+ | |||
+ | 여씨춘추(呂氏春秋): 옛날에 진문공(晉文公)은 성복(城濮)에서 초나라(楚) 사람들과 전쟁할 적에 구범을 불러 물었다. "초나라 사람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구범이 답하길: "예절을 중시하는 자는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에 능한 자는 속임수 쓰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속임수를 써 보십시오." 문공이 구범의 말을 옹계에게 말했다. 그러자 옹계는 | ||
+ | |||
+ | "못의 물을 모두 퍼내어 물고기를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다음 해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게 될 것이고, 산의 나무를 모두 불태워서 짐승들을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다음 해에는 잡을 짐승이 없게 될 것입니다. 속임수는 지금은 쓸 수 있지만 뒷날에는 다시 쓸 수 없을 것이니 장기적인 술책은 아닙니다." | ||
+ | |||
+ | 진문공은 구범의 말을 따랐고, 초나라는 성북에서 패하였다. 하지만 돌아와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옹계를 가장 위에 놓았다. 신하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성북의 공은 구범의 계책 덕분입니다. 주군께서는 그의 계책을 사용하였음에도 상에서는 뒤에 두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진문공이 말했다. “옹계의 말은 백세의 이익이고, 호언의 말은 일시적인 방책이다. 어찌 일시적인 방책을 백세의 이익 앞에 놓을 수 있겠는가?” | ||
+ | |||
+ | 명제는 그래서 [[서선(삼국)|서선]]을 좌복야(左僕射)로 임명하였고, 후에 시중광록대부(侍中光祿大夫)의 관직을 더하였다. | ||
+ | |||
+ | |||
+ | 명제가 허창으로 갔을 때, [[서선(삼국)|서선]]은 수도의 일을 총괄하였다. 명제가 돌아오자 상서의 담당자가 문서를 상정했다. 명제가 조서를 내렸다. | ||
+ | |||
+ | - 내가 보는 것이 복야(僕射 : [[서선(삼국)|서선]])가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 ||
+ | |||
+ | 결국 보지 않았다. 상방령(尚方令)에서 기물을 함부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질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서선은 상소를 올려 형벌이 너무 엄하다고 진술하였으며, 또 궁전을 세우는 일로 백성들의 힘을 소모시키지 말 것을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명제는 모두 직접 조서를 작성하여 그의 의견을 칭찬하고 장려하고는 아울러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서선은 말했다. | ||
+ | |||
+ | “예의 규정에 의하면 일흔 살에는 응당 관직을 떠나야만 합니다. 지금 저는 이미 88세가 되었으니 떠날 수 있습니다.” | ||
+ | |||
+ | 그리고 질병을 이유로 하여 관직을 떠날 것을 강력히 피력했지만, 명제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 ||
+ | |||
+ | 청룡(青龍) 4년(236), 세상을 떠났다. 포의(布衣 : 평민이 입는 베로 만든 옷)를 입히고 소건(疏巾 : 눈으로 보아 조잡한 두건)을 써서 당시 통행하던 상복으로 염을 하도록 유언했다. 명제가 조서를 내렸다. | ||
+ | |||
+ | [[서선(삼국)|서선]]은 성실하고 겉과 속이 곧고 바르며, 세 조대를 지나며 관리생활을 하였고, 공명하며 엄정하고 나의 보좌를 맡은 절조가 있으니 국가의 주석(柱石) 같은 신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항상 그로 하여금 삼공(台輔)의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려고 했는데, 관직에 오르게 하지도 못하고, 안타깝게도 그는 세상을 떠났구나! 기를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추증하고, 공작(公)의 예로써 장례를 지내도록 하라. | ||
+ | |||
+ | 시호를 정후(貞侯)라고 했으며, 아들 [[서흠(삼국)|서흠]](徐欽)이 후사를 이었다. |
2022년 9월 9일 (금) 14:28 판
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
아들 서헌(徐憲)
손자는 서방(徐防)
한국의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1]]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徐偃王(서언왕)(伯益卅三世孫)—二世徐寶宗字棟、徐寶衡、徐寶明——三世徐滄——四世徐平——五世徐瑯——六世徐璞——七世徐瑩——八世徐陽——九世徐仁——十世徐忠——十一世孫徐興、徐君(徐國國君)——十二世徐秀字章翳——十三世徐雅居南昌郡——十四世徐勝——十五世徐樞居河南偃師——十六世徐釗——十七世徐相——十八世徐匯——十九世徐燁——二十世徐坩——廿一世徐銘遷東海郡瑯琊——廿二世徐龍——廿三世徐福(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徐遜(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徐真、——廿六世徐尚——廿七世徐天——廿八世徐守、——廿九世徐魯——三十世徐振、徐揆——卅一世徐錫——卅二世徐芳、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徐秋(志子)——卅四世徐昶——卅五世徐晟、——卅六世徐綬——卅七世徐升、——卅八世徐喬——卅九世徐琰、——四十世徐垓——四一世徐怡居河南偃師——四二世徐賢——四三世徐禮——四四世徐宗——四五世徐成——四六世徐漢——四七世徐靈——四八世徐中(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徐佃——五十世徐豫、徐章(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徐倉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徐田(衢州2代)——五三世徐泉(衢州3代)——五四世徐昌(衢州4代)、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徐陵(507-583,儒士)、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徐惟(衢州9代585-668)、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徐盛公(洎次子)居江西、徐奇(洎季子)居丹陽、徐洪官衢州刺史(洎四子)居信安、徐攀(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徐柔(633-715,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徐矜(636-720,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徐務(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徐敏(衢州12代字大立,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徐珍公(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徐玖守居浙江信安、徐珖居建安、徐玠(937-942,南唐宰相)、徐宰(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徐晦長子)遷居臨沂、徐湖(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徐江(狀元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徐回(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徐陶(700-770,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徐堅(衢州15代,回公長子)、徐寅(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徐商(859-873,字義聲,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宰相)——六十七世徐仁嗣(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徐孝嗣(商公次子)、徐彥若(888-904,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宰相)——六十八世徐綰(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徐溫(862-927,字敦美,吳國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徐知訓、徐知詢、徐知誥(南唐皇帝養子李升)、徐知諫、徐知證、徐知諤、徐知海(885-968)——七十一世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中華徐氏入閩徐矜公(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一門22名進士:1、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徐矜公(760-840衢州剌史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徐晦(760-838,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徐江(784-860)——4世徐棋(808-882)——5世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徐墩(856-933)——7世徐錚(880-958)——8世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徐楔(926-1000)——10世徐燈(950-1032)——11世徐坊(986-1065)——12世徐鐘(1010-1088)——13世徐清(1032-1100)——14世徐植(1058-1135)——15世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徐烊(1072-1150)、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徐光實(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徐培(1095-1173)、徐宗義(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徐宗禮(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徐孺子(1142-1220)、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徐明淑(1166-1243,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徐雷聞 (遷德化徐公店)、徐春聞(1192-1265)、——21世嗣子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삼국지 서선(徐宣)전
서선(徐宣)의 자는 보견(寶堅)이고, 광릉군(廣陵郡) 해서현(海西縣) 사람이다. 전란을 피해 강동(江東)으로 갔었는데, 손책의 초빙을 거부하고 본군(本郡)으로 돌아왔다.
서선은 진교(陳矯)와 함께 요직을 맡았으며, 두 사람은 명성이 나란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모두 태수(太守) 진등(陳登)에게 중시되었고, 또 진등과 함께 태조에게 마음을 의지했다. 해서(海西)와 회포(淮浦) 두 현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도위(都尉) 위미(衛彌)와 현령(令) 양습(梁習)은 밤에 서선의 집으로 도망쳤으며, 서선은 몰래 그들을 호송하여 죽음을 면해 주었다. 태조는 독군(督軍) 호질(扈質)을 파견하여 반란을 일으킨 백성들을 토벌하도록 하였지만, 병력이 적어 나아가지 않았다. 서선은 몰래 호질을 만나 문책하고, 형세를 설명했다. 호질은 곧 진군하여 적을 무찔렀다. 태조는 그를 불러 사공연속(司空掾屬)으로 삼았다. 동민(東緡)ㆍ발간(發干)의 령(令)으로 임명됐으며, 제군태수(齊郡太守)로 승진하였고, 중앙으로 들어가 문하독(門下督)이 되었으며, 태조를 따라 수춘(壽春)으로 갔다. 마침 마초(馬超)가 난리를 일으켰고, 대군은 서쪽 정벌에 나섰다. 태조는 관속(官屬)을 보고 말했다.
“지금 나는 원정을 가야만 하는데, 이곳이 평정되지 못하였으니, 후에 걱정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오. 응당 청렴하고 공정하며 덕이 있는 사람을 뽑아 이곳을 진무하고 통솔하도록 해야만 하오.”
그래서 서선을 좌호군(左護軍)으로 삼아 남아서 군사들을 통솔하도록 했다. 대군이 돌아오자, 서선은 승상동조연(丞相東曹掾)이 되었고, 지방으로 나가 위군태수(魏郡太守)가 되었다. 태조가 낙양(洛陽)에서 붕어하자, 신하들은 궁전 안으로 들어와서 상(喪)을 발표했다. 어떤 사람이 여러 성의 군수를 교체시키고, 조씨와 동향인 초(譙)ㆍ패(沛) 사람을 기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서선이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국가는 통일되었고, 사람들은 각기 충성을 다하려고 생각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초(譙)ㆍ패(沛) 사람만을 기용해야 하는가? 이것은 각 성을 지키고 있는 장수들의 마음을 싸늘하게 하는 것이다.”
문제는 서선의 말을 듣고 말했다.
“이른바 사직지신(社稷之臣)이오.”
문제가 제위에 오르자,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승진했으며,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받았고, 성문교위(城門校尉)로 바꿔 임명되었으며, 1개월 후에는 사예교위(司隸校尉)로 승진하였고, 산기상시(散騎常侍)로 전임되었다. 그는 문제를 따라 광릉(廣陵)에 갔는데, 전군이 배를 탔을 때 폭풍이 불어와 파도가 쳤다. 문제의 배가 빙그르 돌더니 기울어지자, 서선은 뒤에 떨어져 있는 것이 싫어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가 제일 먼저 목적지에 도달했다. 문제는 그의 용감함을 칭찬하고 상서(尚書)로 승진시켰다.
명제(明帝)가 즉위하자, 서선은 진양정후(津陽亭侯)로 봉해졌으며, 식읍은 2백 호였다. 중령군(中領軍) 환범(桓範)은 서선을 명제에게 천거하며 말했다.
“신이 듣건대 제왕께서 인물을 기용하실 경우에는 시대를 헤아리는 유능한 인재를 임명하고, 천하를 쟁탈하는 시대에는 책략을 우선으로 하며, 천하가 평정된 이후에는 충의(忠義)를 제일로 한다고 하였습니다. 때문에 진문공(晉文)은 구범(舅犯)의 계책을 사용했지만 옹계(雍季)의 정의로운 말을 칭찬했고, 고조(高祖)는 진평(陳平)의 지혜를 사용했지만 어린 군주를 주발(周勃)에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사사로이 상서(尚書) 서선(徐宣)을 살펴보았는데, 사람됨이 충의롭고 성품은 돈후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성격을 갖고 있으며, 유달리 청결하고 전아하며 세속에 구애되지 않고, 확고하여 움직이기 어려우며 국가에 대한 절의가 있고, 주와 군의 장관을 역임하면서 모두 그 직무를 빛냈습니다. 지금 복야(僕射)의 직책이 결원이니, 서선에게 이 일을 대신 관장하도록 하십시오. 책임이 무거우니, 서선보다 적임자는 없을 것입니다.”
여씨춘추(呂氏春秋): 옛날에 진문공(晉文公)은 성복(城濮)에서 초나라(楚) 사람들과 전쟁할 적에 구범을 불러 물었다. "초나라 사람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어찌하면 좋겠소?" 구범이 답하길: "예절을 중시하는 자는 번거로움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에 능한 자는 속임수 쓰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속임수를 써 보십시오." 문공이 구범의 말을 옹계에게 말했다. 그러자 옹계는
"못의 물을 모두 퍼내어 물고기를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다음 해에는 잡을 물고기가 없게 될 것이고, 산의 나무를 모두 불태워서 짐승들을 잡으면 잡지 못할 리 없지만 다음 해에는 잡을 짐승이 없게 될 것입니다. 속임수는 지금은 쓸 수 있지만 뒷날에는 다시 쓸 수 없을 것이니 장기적인 술책은 아닙니다."
진문공은 구범의 말을 따랐고, 초나라는 성북에서 패하였다. 하지만 돌아와 논공행상을 하는 자리에서 옹계를 가장 위에 놓았다. 신하들이 어리둥절해하며 말했다. "성북의 공은 구범의 계책 덕분입니다. 주군께서는 그의 계책을 사용하였음에도 상에서는 뒤에 두니 뭔가 잘못된 게 아닙니까!" 진문공이 말했다. “옹계의 말은 백세의 이익이고, 호언의 말은 일시적인 방책이다. 어찌 일시적인 방책을 백세의 이익 앞에 놓을 수 있겠는가?”
명제는 그래서 서선을 좌복야(左僕射)로 임명하였고, 후에 시중광록대부(侍中光祿大夫)의 관직을 더하였다.
명제가 허창으로 갔을 때, 서선은 수도의 일을 총괄하였다. 명제가 돌아오자 상서의 담당자가 문서를 상정했다. 명제가 조서를 내렸다.
- 내가 보는 것이 복야(僕射 : 서선)가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결국 보지 않았다. 상방령(尚方令)에서 기물을 함부로 만들었기 때문에 매질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서선은 상소를 올려 형벌이 너무 엄하다고 진술하였으며, 또 궁전을 세우는 일로 백성들의 힘을 소모시키지 말 것을 간언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명제는 모두 직접 조서를 작성하여 그의 의견을 칭찬하고 장려하고는 아울러 그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서선은 말했다.
“예의 규정에 의하면 일흔 살에는 응당 관직을 떠나야만 합니다. 지금 저는 이미 88세가 되었으니 떠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질병을 이유로 하여 관직을 떠날 것을 강력히 피력했지만, 명제는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청룡(青龍) 4년(236), 세상을 떠났다. 포의(布衣 : 평민이 입는 베로 만든 옷)를 입히고 소건(疏巾 : 눈으로 보아 조잡한 두건)을 써서 당시 통행하던 상복으로 염을 하도록 유언했다. 명제가 조서를 내렸다.
서선은 성실하고 겉과 속이 곧고 바르며, 세 조대를 지나며 관리생활을 하였고, 공명하며 엄정하고 나의 보좌를 맡은 절조가 있으니 국가의 주석(柱石) 같은 신하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항상 그로 하여금 삼공(台輔)의 직무를 담당하도록 하려고 했는데, 관직에 오르게 하지도 못하고, 안타깝게도 그는 세상을 떠났구나! 기를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추증하고, 공작(公)의 예로써 장례를 지내도록 하라.
시호를 정후(貞侯)라고 했으며, 아들 서흠(徐欽)이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