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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22일 (월) 19:34 판

성씨 = 부여 서씨(扶餘 徐氏)

관향 = 충청남도 부여군

시조 = 부여융(扶餘隆)

중시조 = 서존(徐存)

집성촌 =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경기도 양주시 광적면 광석리
평안남도 개천군

년도 = 2015

인물 = 서익, 서필원, 서성 , 서승진, 서민석

인구 = 17,145명

순위 =

비고 = 백제의 왕족


부여 서씨(扶餘 徐氏)는 충청남도 부여군을 본관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역사

시조는 백제 의자왕의 첫째(혹은 셋째 아들이라고도 함, 아직도 학계의 설이 분분함) 아들 부여융(扶餘隆)이다. 660년(의자왕 20)에 백제가 나당(羅唐) 연합군에 패한 뒤에 멸망되어 의자왕과 태자 등 2,000여명은 당나라에 압송되었다. 당나라 고종은 의자왕에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내리고, 아들 부여융에게 서씨의 성을 하사하여 본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부여서씨의 문호는 열렸으나, 그 후 세계는 알 수 없었는데 서융(부여융)의 원손으로 이천 서씨(利川徐氏) 아간공 (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의 5세 후손인 고려 때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源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받들고 부여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서존의 11대손은 서수손(徐秀孫)이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 종1품 문하시중門下侍中)
  • 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고조할아버지: 서정(徐靖) (정2품 평장사.종1품 판삼사사)
    • 고고조할아버지: 서존(徐存) (정3품 병부상서 태원군)
      • 고조할아버지: 서청습(徐淸習 정2품 판전의시사)
        • 증조할아버지: 서효리(徐孝理 정2품 좌복야)
          • 할아버지:서찬(徐贊 종2품 정당문학)
            • 아버지: 서희팔(徐希八 종2품 정당문학)
              • 본인: 서춘(徐椿 정2품 판내부사사)
                • 아들: 서첨(徐詹 예빈사(禮賓寺) 소윤(少尹)
                  • 손자: 서구덕(徐仇德)
                    • 증손자: 서열(徐悅 봉예랑)
                      • 고손자: 서정수(徐貞壽 판내부시사)   
                        • 고고손자: 서수손(徐秀孫)
                          • 고고고손자: 서관(徐寬 진사)
                            • 고고고고손자: 서진남(徐震男 진사) 
                              • 고고고고고손자: 서익(徐益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룡갑(徐龍甲)
                                  • 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운기(徐雲驥)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필원(徐必遠 병조판서)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조(徐敬祖 목사(牧使)))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정덕(徐定德)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인달(徐寅達)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진태(徐鎭泰)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명록(徐命祿)  
                                    • 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치원(徐致遠 음직직장(蔭職直長))
                                      • 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경선(徐敬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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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상진(徐相晉)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범례(徐範禮)   
                                              • 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고손자: 서도유(徐道裕 진사)  
                                • 고고고고고고손자: 서양갑(徐羊甲 혁명가.홍길동의 모델) 
                    • 서이(徐怡 성균관직장(直長))
                  • 손자: 서호덕(徐好德 봉정대부 진의부위(進義副尉))
              • 동생: 서능(서릉)(徐稜 종1품 문하시중)
              • 동생: 서박(徐樸 봉례공)
              • 동생: 서적(徐迪남양군)
              • 동생: 서직(徐稷 연성군)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면(徐冕 정4품 주부)
      • 작은고조할아버지: 서린(徐嶙) (정2품 판대부사)
  • 작은고고고조할아버지 :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작은고고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서씨일가연합회 [[1]] [[2]]

인물

  • 서익(徐益, 1542 ~ 1587년) : 본관은 부여(扶餘). 자 군수(君受), 호 만죽(萬竹), 만죽헌(萬竹軒). 아버지는 진사 서진남(徐震男)이며, 어머니는 광주이씨(廣州李氏)로 직제학 이약해(李若海)의 딸이다. 1554년(명종 9) 13세 때 향시(鄕試)에 장원하고, 1564년 생원시에 1등 5인중에 2위으로에 합격하였다. 1569년(선조 2)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조, 병조·이조좌랑, 병조정랑, 교리,수찬,군기경차관, 종부시첨정, 함경북도 순문관, 사인(舍人)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고창현감, 안동부사, 평양서윤, 서천군수·의주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삼당시인, 팔문장, 정철과 더불어 이십팔숙회라 칭하여졌고,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으며, 1585년 5월 의주목사 재직시 박순, 정철, 이이 등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동인의 탄핵을 받아 벼슬을 내렸놓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충청남도 은진(恩津)의 갈산사(葛山사)에 배향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불타 우암 송시열이 현 가야곡면 산노리에 효암서원에 배향되었다가 다시 가야곡면 육곡리 행림사에 모셔져 있다. 저서로는 『만죽헌집(萬竹軒集)』 1권과 시조 2수가 있다. 유품으로 장검1점, 옥피리 1점이 전해지고 있으며 시조2수는 청구영언, 국조시산, 기아 등 실려있으며 야담 및 일화 다수가 야사로 전해지고 있다.
  • 서양갑(徐羊甲 혁명가.홍길동 모델)

서자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재주가 있었으나 서얼차대(庶孼差待)로 관리에 등용되지 못함을 불만으로 여겨오던 중, 같은 서출인 박응서(朴應犀)·심우영(沈友英)·박치의(朴致毅)·박치인(朴致仁)·이경준(李耕俊)·김평손(金平孫) 등과 소양강 부근을 근거로 강변칠우·죽림칠우(竹林七友)를 자처하며 시와 술로 교유하였다.

  • 서필원(徐必遠, 1614년 ~ 1671) : 1648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669년 형조판서를 거쳐 1671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왕에게 직언을 잘하여 당대의 오직(五直)이라 불렸다. 시호는 정의(貞毅)이다.
  • 서성 (법조인)(徐晟, 1942년 ~ ) : 대법원 대법관
  • 서한범(徐漢範, 1945년 ~ ) : 단국대학교 국악과 교수
  • 서승직(徐承稷, 1949년 ~ ) : 인하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 서승진(徐承鎭, 1953년 ~ ) : 대한민국 제24대 산림청장
  • 서의식(徐毅植, 1956년 ~ ) : 서울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 서희석(徐熙錫, 1968년 ~ ) : 부산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익(徐益)

여창가곡 계면조 평거에 <녹초 청강상에>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다.

녹초 청강 상에 굴레 벗은 말이 되어

때때로 머리 들어 북향하여 우는 뜻은


석양이 재 넘어가매 임자 그려 우노라

푸른 들판과 푸른 강에 굴레를 벗은 말이 되었다는 것은 벼슬에서 물러났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가끔은 머리를 들어 임금이 살고 계신 곳을 향하여 소리 내어 우는 까닭은 임금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다, 라는 내용이다.

이렇게 임금을 그리워하는 내용의 시조를 연주가(戀主歌) 혹은 연군가(戀君歌)라고 한다.

이 시조를 지은 사람은 서익(徐益:1542-1587)이라는 사람이다. 선조 때 병조·이조 좌랑, 안동부사·의주 목사 등을 지냈다.

문장과 도덕, 그리고 기절(氣節)이 뛰어나 이이(李珥)·정철(鄭澈)로부터 지우(志友)로 인정받았다.

율곡을 지지하다가 의주 목사직을 물러나기도 했다.

그런데 이 서익의 서자로 서양갑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서양갑은 광해군 때 같은 서자 출신 친구들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서자도 관계에 진출할 수 있게 해 달라는 상소다.

이것이 조선 사회에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그래서 이들은 ‘강변칠우(江邊七友)’라는 일종의 모임을 만들어 소양강가에서 같이 시를 짓고 술을 마시며 인생을 한탄하면서 살았다.

맨날 술 마시며 놀면 천하 갑부가 아닌 이상 돈이 떨러질 수밖에 없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서 여주(驪州)에 모여 서로 결의 형제하고 도적이 되어 악행의 길로 들어섰다. 문경새재에서 상인을 죽이고 거액을 훔쳤다.

이들은 곧 포도청에 모두 잡히고 만다. 이 해가 계축년(1613년)으로 광해군 5년의 일이다.

당시 조선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와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가 대립하고 있었다.

그 전에 대북파가,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소북파 영의정 유영경(柳永慶)을 죽였다. 대북파가 남은 불씨를 완전히 제거하고자 하던 차에 바로 이 강도 살인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대북파인 이이첨 일파는 이들 도적들에게 허위자백을 강요한다. 돈을 모아 군자금을 확보해서 영창대군의 모반에 사용하려고 했다, 이렇게 조작을 하려고 했다.

영창대군의 어머니는 인목대비다. 인목대비의 아버지가 김제남이다. 이 모든 것이 김제남이 시켜서 한 일이다, 이렇게 자백을 하게 만들었다.

즉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가 꾸민 일이다, 이렇게 되어 큰 사단이 벌어진다.

이것이 바로 역사에서 말하는 계축옥사이다. 서양갑의 친구인 박응서가 거짓 자백을 했고, 서양갑도 위협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한다. 그리고 서양갑은 바로 사형을 당한다.

결국 이 조작극으로 인해 김제남도 죽고 영창대군도 강화로 유배되었다. 어린 영창대군은 강화부사가 바로 죽여버렸다.

강화부사는 영창대군을 온돌방에 가두어 두고 장작을 많이 때서 분사(焚死)시켰다고 전한다.

쪄죽인 셈이다.

서양갑 등 7인은 당시의 제도에 불만을 품고 악행을 일삼다가 이이첨 일파의 꼬임에 빠져, 자신도 죽고 죄없는 사람까지 죽게 만든 역사의 죄인으로 남았다.

이이첨도 인조반정 이후 사형당하고 만다. 계축옥사는 당시의 서얼 문제와 함께 당쟁의 폐해를 직접 보여 준 사건이다. 서익은 그런 충성스러운 노래를 불렀건만, 그의 아들은 역사의 죄인으로 남아 있다.

제도나 법이 잘못되었다고 그것을 핑계 삼아 범죄를 행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용서받을 수 없다.

이이첨과 같이 개인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혹세무민하는 행위도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


서양갑(徐羊甲)

선조 22년(1589) 기축년 정월. 추위가 기승을 부린다. 그날 서양갑(徐羊甲) 이라는 사내가 허연 입김을 내뿜으며 나를 만나러 상 곡 집을 찾아왔다. “나를 알아보기 어려울 거요. 단보가 요양할 때 처외삼촌 심우영과 밤에 잠시 들른 적이 있어요.” “아, 예. 여러 분들이 함께 오셨지요?” 서양갑을 찬찬히 훑어봤다. 언사가 차분하고 태도가 의연하다. 어딘가 일군의 군사를 지위할 위엄이 느껴지는 사내였다. 나는 그가 보기에 좋았다. “어인 일로 이렇게?” “한 사람을 소개하려 합니다.” 잠시 뒤 나는 서양갑의 사람됨에 혹해 그를 따라 아무 의념 없이 용진으로 나아가 한 허름한 주막에서 변숭복(邊崇福)이라는 사내를 만났다. 변숭복은 근골이 억세고 큰 사내였다. “무슨 일이오?” “우리는 인재가 필요하오.” “우리라니요?” “정여립(鄭汝立)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셨소?” 그런 이름은 금시초문이었다. “이렇게 어두워서야…. 하여간 우리들이 ‘대인(大人)’이라 부르는 정여립이란 분이 계시는데, 근본적으로 우리는 그분을 모시고 있소.” 무슨 뚱딴지같은 얘기인가. “자를 인백(仁伯)이라 하는 ‘대인’께선 지금 사람을 모으고 있어요. 인백 정여립은 본디 전라도 전주 태생으로 율곡 이이의 문하에서 공부하다가 금왕 2년에 식년 문과로 급제하여 예조좌랑, 홍문관부수찬과 수찬 등을 지내고 있었는데, 당이 서인이었으나 곧 동인으로 옮겨가면서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요. 스승이던 이율곡을 비판한 일로 서인의 반발을 샀어요. 그런 일로 임금의 눈 밖에 나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대인께선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로서 입을 열기만 하면 사람들이 칭찬하고 탄복했으며, 당당하고 자신감에 차 있으므로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요.” “요약해 주셨으면.” “그게 사실 어려운데…. 그렇다면 두 분께서 황해도에 한 번 다녀가시는 것이?” “거긴 왜요?” “아니면 전라도에라도.” “우리가 왜 거길 찾아가야 하오?” 그때 용산진에 배가 도착해서인지 주막에 일군의 사람들이 들이닥쳤으므로 변숭복은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는 사람이 필요해요.” “그 말씀은 이미 하셨고. 아니, 달리 묻습니다. 왜 우립니까?” “그것은 우선 서양갑 선생은 심우영, 박치의, 박치인, 박응서, 김경손, 이경준 등과 계(契)를 이루어 자주 만난다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단보의 경우는, 지난 계미년에 배소된 형님 허봉 전한께서 최근 귀천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게 당신네에게 무슨 의미를 갖지요?” 변숭복은 더욱 목소리를 낮췄다. 탁주 거품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훔치며 눈알을 내리깔고는 입술을 움직이지 않으면서 마치 복화술을 펴듯 하는데, 그 내용이 실로 놀라웠다.

대인 정여립은 관직을 떠났지만 영향력은 대단하다. 인근 수령들이 앞 다퉈 그를 찾아온다. 중국에서 들여온 천문학과 풍수지리학 책을 함께 읽고 토론한다. 기도처로 유명한 제비산 중턱의 치마바위에서 천일기도를 올린다. 병법에도 일가견 있으며, 특히 ‘천하에 정해진 주인이 없다.’는 파격적인 주장을 한다.

정여립은 양반, 승려, 상민, 천민 등 신분을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친다. 죽도에서 그리했으므로 ‘죽도 선생’으로도 불리는 정여립은 따르는 무리에게 무예를 가르치는 데도 힘을 쓴다. 천반산의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오르면 무술을 가르치는 곳이 나타나는데, 무려 6백여 명이 ‘대동계(大同契)’라는 이름으로 한 달에 한 번 그곳에 모인다. 대동계의 위력은 대단하다. 그 한 예로 정해(丁亥, 1587) 왜변에 열읍(列邑)이 군사를 조발하였는데, 전주 부윤 남언경이 도움을 요청하자 정여립은 하루도 안 돼 군사를 모아 왜구를 격퇴했다. 이토록 범상치 않는 인물이 인백 정여립이라는 대인이다. 그러므로 남쪽에서도 그러하지만, 북쪽 황해도 안악 사람인 변숭복 자신은 물론 친구 박연령, 해주에 사는 지함두 등과 몰래 서로 교결하여 돌려가며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사람을 모으니 응하는 자가 지금 수백 명이다.

변숭복의 말을 정리하면 대체로 이러했다. “왜 굳이 우리입니까?” “한 마디로 말씀드리면, 뜻있는 모임에 기개 있는 두 분이 동참하길 바란다는 겁니다.” 나와 서양갑은 뭔가 불길한 예감이 한강의 물고기처럼 퍼뜩 휘젓고 지나가는 찜찜한 기분을 떨쳐내지 못한 채 후일을 기약하고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중춘(仲春)이 됐지만 기온은 여전히 차다. 진즉에 소과 시험이 있다는 소식이 나와 있었다. 생원진사시나 진사시라고 불리고 사마시라고도 하는 소과에 입격하여도 그것으로 당장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는 사대부로서 어차피 걸쳐야 할 시험이었다. 그리하여 시험 당일 나는 작은형 사후 애써 마음을 다스려 마침내 아니, 다행스럽게도 무사히 입격했다. 그러나 다시 문제는 대과다. 그 치명적 관문을 언제쯤 통과하게 되려나….

소과 입격 뒤 나는 성균관에서 공부하게 됐는데, 그 첫날 하관 후 막 집에 돌아온 즈음이었다. 방금 내가 들어온 중문으로 초희 누님 집에서 보낸 하인이 뒤를 따라 황망히 도착하여 숨가빠하며 소리쳤다. “도련님, 초희 아씨가 그만, 그만….” 하인이 땅에 팍 엎어져 고갤 주억거리고 컥컥 울음을 삼켰다. “도련님, 주인마님께서 오늘 시진, 아니 운명하셨습니다.” “뭐라?!” “주인마님께서 소복단장하고 곱게 누워설랑은 일어나지 않아 의원을 급히 불러 보였더니, 그만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신다 하여, 아이고 도련님, 이 어인 일이.” 그 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달려 나와 하인을 일으켜 다시 물으니, 하인은 눈물로 범벅된 얼굴을 어머니 치맛자락에 묻으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순간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정신이 어질해졌다. 휘청, 흔들리다가 겨우 툇마루를 잡고 일어서서 하인을 잡아 흔들었다. “다시 말하라. 뭐라 했느냐?” “아이고, 도련님. 전들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겠습니까요. 비녀 아이가 들어가 보곤 놀라 자빠지고, 저희 모두 실신할 뻔했습지요. 주인어른께서 곧 돌아오셨고, 시댁 식구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잠시 들어가 보니, 마님은 두 손 모아 ‘참동계(參同契)’라는 책을 안고 마치 주무시듯 누워 계시는데, 숨을 쉬지 않았사옵니다.” 이럴 수는 없다! 작년 가을에 작은형이 그렇게 돌아가셨는데, 오늘 누님 또한 같은 길을 가셨다니, 도대체 이 어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는 곧 누님 집으로 향했다. 정신을 차릴 수 없어 나귀에 탄 어머니는 넋을 잃을 지경이 됐다. 2 년 전에 누님이 쓴 ‘몽유광상산시’의 ‘부용삼구타(芙蓉三九朶) 홍타월상한(紅墮月霜寒)’ 곧, ‘연꽃 스물일곱 송이 붉게 떨어지니, 붉은 꽃잎 추운 서리 달에 무너졌구나.’라는 문구가 진정 누님이 자신의 운명을 예언한 참시(讖詩)였단 말인가. 겨우 스물일곱 해를 살고 누님은 그만 저 세상으로, 누님의 그토록 바라던 신선의 세상으로 넘어가고 말았구나. “처남, 미안허이.” 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 보니, 자형 김성립이 눈물을 흘리는데, 첫째 자형 박순원과 둘째 자형 우성전도 안 됐다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본다. 어쩌겠나. 그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이는 수밖에. 누구의 운명인들 슬프지 아니하랴. 눈을 매처럼 만들다가 나는 돌아오지 않을 누님의 마음으로 용허하여 가슴으로 끌어안으니, 자형이 내 허리를 붙잡고 엉엉 통곡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상을 치르느라 잠을 못 자 충혈이 된 눈으로 나는 성균관 신삼문을 지나 서계를 올라 대성전 옆 북장문을 열고 서재쪽으로 가려는데, 마당을 가로질러 달려오는 유생이 있어 보니, 처남 김확과 친구 최천건과 임수정이었다. “자형.” “반갑네.” 우리들은 서로 얼싸안고 성균관에서 만나게 된 사실에 다들 새삼 조금씩 감동하면서 다시 협문을 빠져나와 33 칸의 긴 진사식당으로 갔다. 입안이 깔깔하여 술을 뜰 수가 없었다. “어이, 친구들! 이리로 잠깐 오시게.” 식사 후 경계석에 앉아 쉬는 우리에게 한 유생이 허리에 손을 얹고 청랑한 목소리로 오라 이른다. 허우대 좋은 김확을 앞세워 그들 앞에 섰다. 최천건과 임수정은 성균관 유생 생활이 일 년이 됐으므로 그들을 잘 아는 터수였다. 망건 위에 흑립 통영갓을 쓰고 옥색 명주 도포를 입은 잘 생긴 유생이 웃었다. 미남이라 할 만한 얼굴이다. 눈에 약간 쌍꺼풀이 지고 눈썹이 짙었다. 코는 선 굵게 내려와 오뚝 섰으며, 입 꼬리가 살짝 올라가 늘 웃는 것처럼 보였고, 미간이 깨끗하고 얼굴색이 밝았다. 무엇보다 벼슬길에 나서서 크게 일어서 천하를 호령할 듯한 기상을 내뿜는다 하여 지나치다 못할 듯했다. 어딘가 기교적이라는 느낌을 주는 면이 없지 않았지만. “신출인가 보이. 여기 두 분은 늘 뵙고 있고. 어때요? 반궁(泮宮, 성균관)에 들어온 지 보름쯤 지난 듯한데, 견딜 만하오?” 김확이 대답했다. “저는 이젠 견딜 만합니다만, 이분은 오늘이 처음과 같아서.” “아니, 어찌하여?” “첫날 하루 왔다가 누님이 귀천하여 그동안 등관 못했지요.” “그래요? 육친을 잃은 슬픔도 그러하거니와 상을 치르자면 여간 힘들지 않지요. 자, 소개합니다. 이분은 유생들의 자치기구인 재회의 수장인 장의, 여긴 간부인 색장, 조사, 당장이오. 나로 말씀드리자면 이들의 고문 격이라 할 수 있지. 하하. 이름은 이이첨(李爾瞻), 자는 득여(得輿), 호는 관송(觀松) 또는 쌍리(雙里)라 하오. 앞으로 재회에 많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불렀소.” 그리고 그는 자신이 지난 임오년(선조 15년, 1582)에 사마시에 입격했으니 말하자면 한 7 년쯤 지났으므로 성균관에서 비교적 윗길인 셈이라 일렀다. 나는 관송 이이첨이 어딘가 좀 으스댄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워낙 능란하게 이야기를 이끌어갔으므로 한 순간에 그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오 일과가 끝나자 나와 이이첨이 반촌(泮村, 성균관 근처의 동네)에서 다시 만났다. 고향이 경기도 광주인 이이첨은 보낸 세월이 오래 됐으므로 성균관을 드나들기에 비교적 자유로웠고, 한성부에서 사는 나는 관유(館儒, 성균관에서 기숙하는 유생)가 아니었으므로 생활에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사실 엄격한 기숙 시설이지만, 하고자 하면 성균관 하급관리인 직학이나 학유의 눈을 피해 얼마든지 시간을 내 밖으로 나와 일을 볼 수 있었다. 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며 봄날이 아름답게 지나가는 어스름 저녁 무렵이었다. 이럴 때 친구들과 진탕 술을 마시면 나는 형님이나 누님의 죽음을 잊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이이첨은 다른 한 유생과 더불어 약조한 주점에 도착했다. “이분은 사정(士靖) 기자헌(奇自獻)이라 하지. 나와 비슷한 연배이니, 단보와는 좀 차이가 나지요?” 이이첨은 말을 아래로 놓았다가 제자리에 놓았다가 했다. 그래서 나는 “말씀을 낮추세요. 두 분 다 제 형님과 같습니다.” 하고 스스로 낮은 자세를 취했다. 그게 우선 이이첨의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이 친구는 시원한 성정이구나. 마음이 두서너 개로 겹쳐 있지 않아. 적어도 구밀복검 같은 짓을 꾸밀 사내가 아니야. 교언영색은 이 친구에 이르러 어울리지 않는 짓이고. 고것 참, 흥미로운 녀석일세. 허나 어딘가 만만치 않아. 그의 선친 초당 선생도 그러하고 그의 작은형인 미숙 허봉도 그러하듯 보라, 저 깊은 눈이며, 발달한 하관이며, 떡 벌어진 가슴에다가 큰 머리통 하며 결코 만만하게 볼 사내가 아니지. 그의 시는 이미 사림에 널리 알려져 있음이야. 나에게 우군이 아니라면 예의 괄목상대의 위인일 것.

이렇게 이이첨은 나를 자기 사람으로 분류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니, 그도 대과에 들어 앞으로 옥당으로 나아갈 것이 분명하므로 뒷날을 도모하려면 반드시 나를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이이첨이 그렇게 마음을 굳혔던가? “오늘은 내가 책임질 터이니 가슴 풀어헤치고 한 번 마셔 봅시다.” 나와 기자헌을 번갈아 보며 이이첨이 너스레를 떨었다. “종로 육의전 부근은 아니지만, 여기 반촌도 유생들을 유혹하는 술집이 적지 않아요. 이 집도 그 중 하나지. 자 우선 내 잔을 받게, 단보. 사정, 자네도.” 이이첨은 나보다 9 살 위고, 기자헌은 7 살 위였다. 권커니 잣거니 하며 두어 시진을 주점에서 보냈다. 자리를 옮겨 또 다른 주점으로 갔다. 기자헌은 사렸으나 이이첨은 두주불사였고, 나 또한 주는 술잔을 마다하지 않았다. “꺼억, 이젠 일어서야겠지? 그런데, 이 술기를 어디서 깨고 들어가나? 사정도 나와 마찬가지니, 우리 식당교 앞에서 잠시 쉬었다가 인경이 울리면 그때 귀신도 모르게 재실에 들어가세나. 꺼억.” 시끌벅적하던 낮 동안의 진사식당은 어둠 속에 가라앉아 가뭇없다. “자, 사정. 자네 오늘 기분 괜찮았지? 저 단보가 물건이야. 꺼억. 그러니 시도 한 번 읊을 만하지 않나. 자네, 이백의 ‘춘야연도리원서(春夜宴桃李園序)’를 시작하게나.” “마다 할 일 아니지.” 기자헌이 즉각 읊어 나아갔다. “부천지자는 만물지역려요, 광음자는 백대지과객이라.” 이어 이이첨이 “이부생이 약몽하니 위환이 기하오, 고인병촉야유가 양유이야라.” 하자 나는 또한 다 풀어서 노래했다. 시를 외우는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가 아니더냐. 중국과 조선의 시를 일만, 아니 이만 수나 외는 내가 아니더냐.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숙소요, 시간은 영원한 나그네라. 인생이란 한바탕 꿈처럼 덧없으니, 이 세상에서 기쁨을 누린들 얼마나 계속되리. 옛사람들이 촛불을 밝히고 밤에도 노닌 것은, 참으로 그 까닭이 있음이로다. 하물며 화창한 봄날이, 아지랑이 황홀한 경치로 우릴 부르고, 대자연은 아름다운 문장을, 우리에게 빌려 주었음에랴….” 그때였다. 타다다닥, 걸음을 내달려 한 사내가 성균관 동편 담을 돌아 향석교와 중석교를 지나 우리들이 시를 외며 즐거이 놀며 쉬며 하는 식당교 쪽으로 다가왔다. 그만이 아니라 다른 사내 여럿이 그를 쫓는지 곧 이어 도착했다. 왼편은 성균관의 담이고, 오른편은 언덕이었다. 나무 사이에 요즘 들어 한두 채씩 민가가 들어서는 중이지만, 아직 집들이 성겨 등창을 넘어 내비치는 불빛이 거의 역할을 하지 못해 성균관 동편은 기우는 달의 교교한 달빛만이 있을 따름 그저 어두컴컴한 상태 그대로였다.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앞선 사내는 분명 쫓기는 신세라 그들을 떨어뜨리려 안간힘을 다하고, 뒤 따르는 사내들은 무슨 짓이라도 하여 놓쳐서는 안 된다는 듯 바짝 뒤쫓아 붙으려 하는 형국이었다. 나는 사태가 그러함을 한 눈에 파악했다. 앗, 순간 눈을 쏘는 한 가닥 섬광이 있었으니, 그건 다름 아니라 앞선 사내나 뒤쫓는 사내들의 손에 쥐어진 칼날에서 반사된 빛이었다. “칼이다!” “환도야!” 나뿐 아니라 이이첨과 기자헌도 신음하듯 소리쳤다. 앞 사내의 절박한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보이는 듯했다. 일 대 서너 명이라. 그대로로는 앞의 사내가 뒤의 칼날에 곧 그어질 판이었다. 세 사람은 그들의 칼날이 어쩌면 자신들에게 미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순간 갇혔다. 술이 확 깼다. 불과 십여 걸음 앞으로 다가오자 한 곳에 모여 있던 우리 세 사람은 즉각 흩어졌다. 이이첨과 기자헌은 본능적으로 식당교 아래의 어둠 속으로 뛰어내렸다. 그러나 나는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앉아서 사태를 주시했다. 나를 한 차례 힐끗 보던 앞 사내가 뒤돌아서서 뒤의 사내들을 정면으로 맞는다. 한 번 힐끗 보는 그 눈빛에서 나는 사내의 절박함을 그 순간 함께 느껴 가졌다. 담과 언덕 사이의 이 좁은 길에서 숨 가쁜 대결이 곧 펼쳐질 것이다. 눈빛으로 사내는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어쩔 것인가. 내가 찾을 방법은 뭐지? 나는 주위를 휘둘러보았다. 마침 나무 막대 하나가 담을 타고 흐르는 도랑 곁에 버려진 것이 보였다. 나는 일단 그것을 집어 들었다. 좇아온 사내들은 하나같이 성긴 30 죽 죽립을 목 뒤로 젖히고 살기등등한 기세로 홀로 저항하는 사내에게 한 발짝씩 다가들었다. 직감적으로 초립들이 사내를 죽일 작정이란 걸 느꼈으므로 나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한 생명이 도와 달라하므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 긴박한 순간에 나는 크게 소리쳤다. “형님들, 담을 넘어 우리 유생 친구들을 불러와요. 제가 시간을 벌지요.” 초립 사내들이 나의 외침을 듣고 멈칫거리다가 다시 조여드는 것을 보고 나는 그 중앙을 향해 뛰어들었다. 다리 아래에 있던 두 형님 이이첨과 기자헌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눈만 겨우 내놓고 떨리는 몸으로, 아니 두 다리를 탈탈 털어대며 사태를 관망할 따름이었다. 두 사람은 꾸부정하게 등뼈를 휘뜨린 채 나의 무모함을 크게 염려스러워할 터였다. 사달이 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휘익, 칼날이 한 차례 달빛 빗기는 허공을 긋자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나 쉬익, 칼날은 나의 유건 윗부분을 잘라 작은 자락이 공중에서 한 마리 나비처럼 훨훨 날다가 발밑으로 사뿐 떨어져 내리는 것이 보였다. 초립들은 모두 얼굴에 두건을 쓰고 있었다. 두건 속에서 내뿜는 녀석의 숨소리가 생생히 들려 왔다. 내 유건을 그은 놈은 두건 속에서 이빨을 드러내며 웃을지 모른다. 네 이놈, 내 몽둥이맛을 봐라, 하며 한 발 앞을 내딛으려는데, 나와 등을 맞대고 대치하던 사내가 순식간에 언덕으로 치올라갔다. 그 뒤를 따라 함께 언덕을 오르려 하자 갑자기 어깨에 엄청난 충격과 함께 뼈가 뻐개지는 듯한 통증이 왔다. 어깨를 쥐어 봤는데 피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녀석이 칼등으로 내리친 모양이다. 내 앞서 달아나던 사내를 바짝 쫓은 초립의 칼이 높이 치솟다가 곧장 떨어졌으니, 아, 그만 허리에서 피가 튀며 사내가 그 자리에 푹 주저앉고 만다. 치명적 상처를 입은 사내의 입에서 비명이 터지고 허리에서 피가 솟구치자 잠시 머뭇거리던 초립들이 거의 동시에 언덕 위로 치올라가 남쪽으로 가뭇없이 사라졌으니, 다친 나는 그들을 따라잡아 그 까닭을 캐보려는 마음을 잠깐 가졌으나, 그러기보다 소나무 사이에 쓰러져 피 흘리는 사내를 돌보는 것이 순서라 생각했다. 허나 사내는 죽어갔다. 나는 사내의 뺨을 치며 정신 차리라 하는데, 그때 사내가 마지막 힘을 다하여 가슴을 헤치고 한 통의 한지 봉투를 꺼내 내게 주며 “이, 이, 이걸… 태학 이생에게….” 하고는 더 잇지 못하고 숨을 놓아 버렸다. 그런 뒤에야 이이첨과 기자헌이 단보, 단보, 하며 찾아들고 곧 사내의 죽어가는 모양을 보자 두 사람 다 다리가 풀려 그 자리에 풀썩 무너져 내렸다. 일상에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눈앞에서 사람이 칼을 맞고 죽어가는 기막힌 일을 당한 우리 일행은 사내의 시신을 그대로 두고 언덕을 내려와 지체하지 않고 정선방 파자교(把子橋, 서울 종로구 종로 3가)에 있는 좌포도청으로 달려갔다.

집성촌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 삼전리에 부여서씨 재실(夫餘徐氏 齋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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