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성 연산서씨 석보"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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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신을 타파한 서련(徐憐) 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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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27일 (목) 21:34 판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4호 _ 홍성 연산서씨석보 (洪城 連山徐氏石譜)

수 량 : 4매

지정일 : 1997.08.05

소재지 : 충청남도 홍성군 홍성읍, 홍주성 박물관

홍성의 연산 서씨 족보를 돌에 새긴 특이한 유물이다.

족보라는 것은 한 집안의 세계(世系)를 기록하여 가문의 형통과 맥을 후대에 책으로 만들어 보존하여 전해지는 것이 보통인데 연산 서씨는 특이하게 136년 전에 8매의 4각 오석(검은 빛이 나는 단단한 돌)에 족보를 새겨 보존하고 있다. 크기는 가로 25㎝, 세로 36㎝이며, 두께는 3㎝정도이다.


홍성 연산서씨 석보 (洪城 連山徐氏石譜) 표지판 국내 제일의 석재족보를 남긴 가문, 송성의 연산 서씨

연산 서씨의 시조는 연성군 서준영으로 성균관 생원이었던 아들 서보가 고려멸망 후 처가인 결성현 보개산 아래 구향촌(덕은동, 현 구향면)에 정착하면서 홍성에서 세를 이어갔다.

서보의 장인 김유무는 결성장씨의 시조 장하의 사위로, 처가로부터 물려받았는데, 다시 자신의 재산을 사위인 서보에게 남겨주었다. 연산 서씨 출신 인물로는 제주 김녕사굴에 있던 구렁이를 죽여 제주도를 안정시켰다는 전설을 남긴 제주판관 서련(徐練, ? ~ ?)과 전라우수사를 지낸 서간세(1680~?)등이 있으며, 근대에는 제2차 홍주의병 당시 홍주로 진격하는 홍주의진에 군량미를 지원해주고 이후 광천에 덕명학교를 세운 일농 서승태(徐承台)선생이 있다. 현재도 광천읍과 구향면 일대에 연산 서씨 집성촌이 자리잡고 았다.

연산석씨 석보는 구향면 지정리에 위치한 암벽을 깎아 만든 석고에 보관되어 전해져 왔다가 1996년 12월 5일 후손들에 의해 공개되어 처음 세상에 알려졌으며, 1997년 8월 5일 문화재자료 제354호로 지정되었다.

▼연산서씨석보가 보관된 암석굴(巖石窟)입니다.

홍성 연산서씨석보 (洪城 連山徐氏石譜) 소재지 : 홍성군 구항면 지정리 산112 연산(連山)이라고 쓴 글씨(기로 40cm, 세로 30cm 정도)안에 연산서씨 석보가 보관된 암석굴

구향면 지정리에 위치한 연산 서씨 석보 석문, 연산 서씨 석보는 암벽을 깎아 만든 기로 40cm, 세로 30cm 정도의 석고에 보관되어 전해져 오다가 1996년 12월 5일 후손들에 의해 공개되어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홍주성 역사관에 전시된 연산서씨석보입니다.

오석으로 만든 홍성 연산서씨 석보 (洪城 連山徐氏石譜)

홍성의 세거성씨인 연산 서씨 집안의 내력이 적혀 있는 국내 유일의 석재족보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서씨일가연합회 [[1]] [[2]]


미신을 타파한 서련(徐憐) 판관​

​ 서련(徐憐) 판관은 김녕사굴(金寧蛇窟) 일화에 등장하는 인물로서 제주도와 연관된 서씨 중 가장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입도조 서희례(徐希禮)보다 4대를 앞서는 인물이다.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19세 손이며 연산(連山)을 관(貫)으로 한 연성군(連城君) 서준영(徐俊英)으로부터는 5세 손이 된다. 그는 성종 25년(1494)에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천성이 총명하였으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었다.

부모 없이 자람을 가엽게 여긴 외조부 양경공(良敬公) 정문형(鄭文炯)은 그의 이름을 련(憐 : 불쌍히 여길 련)이라 짓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가르쳤다. 외조부 슬하에서 학문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낸 서련은 중종 6년(1511)에 18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어 중종 8년에 제주 목판관(牧判官)으로 임명되어 도임(到任)했는데 그는 역대 판관 중 가장 연소자로 알려진다.

그 무렵 제주의 구좌(舊左) 지방에는 미신에 얽매인 해괴한 폐습이 있었다.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김녕사굴(蛇窟)에는 속칭 「대맹」이라는 큰 뱀이 숨어 살아, 해마다 봄과 가을 두 번에 걸쳐 15~16세 되는 청순한 처녀를 제물(祭物)로 바쳐오고 있었다. 만약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뱀이 조화를 일으켜 큰 바람을 불게하여 모처럼의 농사가 폐작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지방에서는 윤번제로 집집마다 사굴(蛇窟)에 처녀를 제물로 바쳐야 했기 때문에 딸을 가진 집안에서는 어쩔 수 없이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이 같은 폐습은 관아(官衙)에서도 알게되어 전임 관원(官員)인 이필희(李必希)가 인명을 희생시키는 일을 삼가도록 극구 만류했으나 뿌리 박힌 미신 탓인지 주민들은 말을 듣지 않았다. 부임 후 이런 사정을 듣게 된 서련은 "아무리 무지(無知)한 백성이라 하나 귀중한 인명(人命)을 뱀에게 바친다니 될 말이냐."고 통탄하명서 잔인무도한 악습(惡習)을 뿌리뽑겠다고 나섰다.

중종 10년(1515), 그는 주민들에게 전과 같이 제(祭)를 올리도록 한 후 병졸 수십 명으로 하여금 창칼을 지니고 숯과 염초(焰硝 : 충격으로 열을 발생시켜 폭발시키는 물질)를 준비하여 굴 입구에 대기시켰다. 북을 치자 과연 큰 구렁이가 굴 밖으로 나와 소녀를 삼키려 하였다. 이 때를 기다려 서련이 들고 있던 창으로 뱀을 향해 내리 찌르자, 병졸들과 역사(力士)들도 일거에 도끼와 창으로 사정없이 난자(亂刺)하였다. 이와 동시에 독약과 기름을 꿈틀대는 뱀의 몸뚱이에 퍼붓고 불을 당기자 오랫동안 주민을 괴롭혀 온 뱀은 드디어 타 죽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청년 판관 서련(徐憐)을 존경하고 추앙하는 소리가 전도에 날로 높았다. 그러나 인걸(人傑)은 단명(短命)하는 것인지 중종 10년(1515) 4월 10일, 겨우 22세의 나이로 병에 걸려 순직하니 그를 애도하는 도민의 통곡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한다. 일설(一說)에 는 서련이 뱀을 죽인 뒤 말을 타서 성안(城內)으로 달려오는데 등뒤에서 한줄기 붉은 요괴가 구름을 타고 따랐으며, 그가 관아(官衙)에 도달하자마자 쓰러져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더니 10여일 후에 기어이 관사에서 사망하고 말았다는 얘기도 전한다.

서련 판관은 충남 홍성군 보개산(寶蓋山) 덕은(德隱) 땅에 안장되었다. 그의 관구(棺柩)가 제주를 떠날 때에 도민들은 이를 붙들며 애절한 통곡을 멈추지 않았다 한다. 미신이 만연했던 당시의 사정으로 보아 서련 판관의 대담무쌍한 행동은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폐습을 퇴치하려는 살신구민(殺身救民)의 지성(至誠)과 선정(善政)을 베풀려는 호연한 용기와 의지가 있음으로써 가능했을 것이다.

김석익(金錫翼)은 「탐라기년(耽羅紀年)」에서 서련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련(徐憐)이 연소(年少)했기 때문에 기질과 태도가 거칠고 경솔하여 비록 당나라의 한유(閒遊)가 종용(慫慂)의 악어를 길들인 고사(故事)에는 비길 수 없으나, 그 굳세고 올바른 기질과 백성들의 재해(災害)를 제거해 준 공(功)을 우러러 볼 때 중국 광동(廣東)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제주 사람은 마땅히 한시라도 서련의 공적을 잊어서는 아니될 일이지만, 세월이 흐르고 보니 오늘날 그의 공을 알아주는 이가 드므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서련이 재임시 제주 목사(牧使)는 성수재(成秀才)였는데 그는 청렴정대(淸廉正大)하고 과묵엄숙(寡默嚴肅)하였으므로 아전(衙前)들이 감히 부정을 저지르지 못했던 선정관(善政官)이었으며 그 또한 재임 중에 사망한 것으로 전해진다.

김녕사굴에 얽힌 서련 판관의 유덕(遺德)을 기리고자 1942년에는 구좌읍 하도리의 유지 동은(東隱) 강공칠(康共七) 선생이 앞장서 김녕사굴 앞에 서련을 추모하는 조그만 공덕비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흐르면서 서련 판관의 행적은 조금씩 잊혀져 전설처럼 되어가고 공덕비마저 노후되었다. 그러자 이천 서씨 제주문중회가 중심이 되어 1972년 4월 10일에 다시금 그의 용기와 슬기를 기리는 사적비(事跡碑)를 세웠으니 그의 치적은 천세(千歲) 만대(萬代)에 영원히 기억되어질 것이다.

김녕사굴(金寧蛇窟)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김녕리에 있는 현무암 동굴. 예전에 이 굴에 사는 뱀에게 매해 봄가을에 처녀를 제물로 바쳤다는 전설이 있다. 만장굴과 함께 우리나라 천연기념물로, 천연기념물 정식 명칭은 ‘제주 김녕굴 및 만장굴’이다. 길이는 705미터. 제주도 제주시 구좌읍 동김녕리의 사굴(蛇窟)과 관련된 전설로서, 조선 중종(中宗) 때 서련(徐憐) 판관이 사굴에 사는 큰 구렁이를 퇴치했다는 전설.

탐라문화제(耽羅文化祭)

탐라문화제는 1962년 제주예술제라는 이름으로 시작되어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는 제주의 대표 행사입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