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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생애 == | ||
+ | 돈암 서한정이 15세기 중반 무렵에 영주로 들어온 이래, 이 집안은 결코 적지 않은 수의 과거 합격자와 문중 학자 및 처사를 배출하였다. 이들은 돈암이 세운 처사적 풍모를 가풍으로 계승한 바탕 위에서, 다시 이상정(李象靖)・정종로(鄭宗魯)・류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권연하(權璉夏)・이만도(李晩燾) 등 주로 호파(虎派) 계열의 주요 학자들에게 나아가 예학(禮學)과 심학(心學) 등 퇴계학의 본령으로 거슬러 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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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들은 사마시 입격자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족보를 편찬하고, 선대를 모신 서원을 건립하고, 선대의 문집을 간행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문중적, 사회적 기반도 마련하였다. 또한 인근의 단계서원과 소수서원의 강임(講任)을 맡아 유생들을 지도하고, 서원 일을 경영하는 등 지역의 교육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음이 주목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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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한정(徐翰廷)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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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407년(태종7)~1490년(성종2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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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 돈암(遯菴). 생원(生員) 균(均)의 아들. 좌사간(左司諫) 충(衷)의 증손이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청도군사(淸道郡事) 사민(士敏)의 손자. 생원시에 입격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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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은 김응조(金應祖)가 편찬한 ������영주지(榮州誌)������에서는 “청조탁행(淸操卓行)”으로, 다른 본에서는 “낙선지행(樂善砥行 : 선(善)을 좋아하고 행실을 닦음)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중되었다.”고 일컬어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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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은 어버이 섬김에 효도를 다하고, 거상(居喪)에 있어 예법(禮法)을 준수하면서도 슬픔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고 함. 밤낮으로 단정하게 앉아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 잠심(潛心)하였음.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세상의 영리(榮利)에 마음을 쓰지 않았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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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좌사간을 지냈던 공의 증조 충은 언관(言官)으로서 활동하다가 언론 사건에 연좌된 이후에 다시 출사(出仕)하지 않고 대구(大丘) 화원현(花園縣)의 마이산(馬耳山) 아래로 물러난 바 있었음. 후에 공은 사마시에 입격하기는 하였으나, 세조(世祖)가 불의(不義)한 방법으로 보위(寶位)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대과(大科) 공부를 포기하고, 증조가 터를 잡은 대구로부터 처자를 거느리고 영주의 한성동(漢城洞 : 영주의 산이촌(山伊村), 곧 이산)으로 들어와 두문불출하며 세상사를 단념함.(공은 영주에 거주하던 참군(參軍) 손권(孫權)의 딸, 곧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한 정도복(鄭道復)의 외손과 결혼한 인연이 있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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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다가 다시 순흥 등강촌(登岡(登崗)村 : 당시로는 순흥부의 남쪽 죽계(竹溪)의 하류에 있던 궐봉(蕨峯)의 동쪽 촌락임. 운림(雲林)과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짐. 원래 이름은 등영(登瀛)이었으나, 공이 등강(登岡 혹은 登崗)으로 고침)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살 곳을 마련하고, 스스로 “돈암(遯菴)”이라고 불렀다고 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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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은 등강촌에 신거(新居)를 마련하고 시를 짓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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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人說登岡合遯居 남들이 등강촌은 숨어 살기에 참 좋다고 하는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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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暮年新搆數間廬 늘그막에 이곳에 몇 칸 오두막 얽었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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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春深僻巷人來少 깊은 봄 궁벽한 동네에 찾아오는 이 드무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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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遲日明窓坐看書 긴 해 밝은 창가에 앉아 책을 보노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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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고 하였고, 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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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時事如今不欲言 세상일은 이젠 말도 하고 싶지 않으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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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安身何處別區存 어느 곳에 몸 편안히 쉴 별구(別區) 있느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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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擇仁晩卜幽棲地 인리(仁里) 가려 늘그막에 그윽한 곳에 깃들고 보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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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擧世咸稱孝子村 온 세상 사람들이 효자촌이라 일컫는다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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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라고 하였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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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봉(檜峰) 권득평(權得平)이 공에게 증여한 시에서는 “맑은 표치는 백이(伯夷)의 반열에 못지않구나.[淸標不讓伯夷班]”라고 하였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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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돈암선생일집(遯菴先生逸集)������이 간행되었음.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遯菴集序」를 짓고, 9세손 창재(昌載)가 「家狀」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遯菴徐公墓誌銘」을,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遯菴徐公墓碣銘」을 찬함. 이밖에 이헌경(李獻慶)이 「登岡記」를 지음. 특히 김홍(金㙆)은 ������上蔡相國濟恭������을 지어, 조정으로부터 차질 없이 공의 행적에 대한 포상이 내려질 수 있도록 청원하였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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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구고서원(九皐書院)에 모셔지고, 후에 절의(節義)로 지평(持平)에 증직되었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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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고서원 추향제 == | == 구고서원 추향제 == |
2022년 8월 23일 (화) 23:15 판
목차
정의
1407(태종 7)∼1490(성종 21). 조선 초기의 학자.
개설
1407년(태종 7)∼1490년(성종 21).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호는 둔암(遯庵).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晉)의 후예이다. 증조부는 좌사간(左司諫) 서충(徐衷)이고, 조부는 지군사(知郡事) 서사민(徐士敏)이고, 부친은 생원 서균(徐均)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진사 신분이었는데, 47세 되던 해에 계유정난을 당하자, 단종과 명운(命運)을 함께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라 믿어 과거의 꿈을 접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 복위를 꾀했다가 실패했던 순흥(順興)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
아들로는 종사랑(從仕郞) 서진(徐震)이 있다. 후에 계룡산 숙모전(肅慕殿)의 단종 위패를 모시는 곳에 여러 지사들과 더불어 배향되었다. 이상정(李象靖)과 채제공(蔡濟恭) 등도 그의 충절과 고결한 얼을 기렸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구고리사(九皐里社)에 봉향되었다. 묘소가 있는 곳은 영지산(榮之山) 이촌(伊村) 구거지 뒷편 산록에 있는 한성동(漢城洞) 묘좌(卯坐) 언덕이다.
저서로는 『둔암일집(遯庵逸集)』 1책이 있다. 이헌경(李獻慶)의 『간옹집(艮翁集)』에 등강촌(登崗村)에서 은거했던 둔암(遯庵)의 지조를 기리는 기(記)가 실려 있다.
가족
- 고조할아버지: 서원(徐遠 생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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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돈암 서한정이 15세기 중반 무렵에 영주로 들어온 이래, 이 집안은 결코 적지 않은 수의 과거 합격자와 문중 학자 및 처사를 배출하였다. 이들은 돈암이 세운 처사적 풍모를 가풍으로 계승한 바탕 위에서, 다시 이상정(李象靖)・정종로(鄭宗魯)・류치명(柳致明)・김흥락(金興洛)・권연하(權璉夏)・이만도(李晩燾) 등 주로 호파(虎派) 계열의 주요 학자들에게 나아가 예학(禮學)과 심학(心學) 등 퇴계학의 본령으로 거슬러 갔다.
이들은 사마시 입격자를 지속적으로 배출하고, 족보를 편찬하고, 선대를 모신 서원을 건립하고, 선대의 문집을 간행함으로써, 사족으로서의 문중적, 사회적 기반도 마련하였다. 또한 인근의 단계서원과 소수서원의 강임(講任)을 맡아 유생들을 지도하고, 서원 일을 경영하는 등 지역의 교육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음이 주목된다.
서한정(徐翰廷)
1407년(태종7)~1490년(성종21)
호 돈암(遯菴). 생원(生員) 균(均)의 아들. 좌사간(左司諫) 충(衷)의 증손이고, 통훈대부(通訓大夫) 청도군사(淸道郡事) 사민(士敏)의 손자. 생원시에 입격함.
공은 김응조(金應祖)가 편찬한 ������영주지(榮州誌)������에서는 “청조탁행(淸操卓行)”으로, 다른 본에서는 “낙선지행(樂善砥行 : 선(善)을 좋아하고 행실을 닦음)으로 세상 사람들로부터 추중되었다.”고 일컬어짐.
공은 어버이 섬김에 효도를 다하고, 거상(居喪)에 있어 예법(禮法)을 준수하면서도 슬픔과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고 함. 밤낮으로 단정하게 앉아 경학(經學)과 성리학(性理學)에 잠심(潛心)하였음. 세상에 이름이 드러나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고, 세상의 영리(榮利)에 마음을 쓰지 않았음.
좌사간을 지냈던 공의 증조 충은 언관(言官)으로서 활동하다가 언론 사건에 연좌된 이후에 다시 출사(出仕)하지 않고 대구(大丘) 화원현(花園縣)의 마이산(馬耳山) 아래로 물러난 바 있었음. 후에 공은 사마시에 입격하기는 하였으나, 세조(世祖)가 불의(不義)한 방법으로 보위(寶位)에 오르는 것을 보고는 대과(大科) 공부를 포기하고, 증조가 터를 잡은 대구로부터 처자를 거느리고 영주의 한성동(漢城洞 : 영주의 산이촌(山伊村), 곧 이산)으로 들어와 두문불출하며 세상사를 단념함.(공은 영주에 거주하던 참군(參軍) 손권(孫權)의 딸, 곧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을 역임한 정도복(鄭道復)의 외손과 결혼한 인연이 있음)
그러다가 다시 순흥 등강촌(登岡(登崗)村 : 당시로는 순흥부의 남쪽 죽계(竹溪)의 하류에 있던 궐봉(蕨峯)의 동쪽 촌락임. 운림(雲林)과 수석(水石)이 아름다운 곳으로 알려짐. 원래 이름은 등영(登瀛)이었으나, 공이 등강(登岡 혹은 登崗)으로 고침)에 몇 칸의 집을 지어 살 곳을 마련하고, 스스로 “돈암(遯菴)”이라고 불렀다고 함.
공은 등강촌에 신거(新居)를 마련하고 시를 짓기를,
人說登岡合遯居 남들이 등강촌은 숨어 살기에 참 좋다고 하는데
暮年新搆數間廬 늘그막에 이곳에 몇 칸 오두막 얽었네.
春深僻巷人來少 깊은 봄 궁벽한 동네에 찾아오는 이 드무니
遲日明窓坐看書 긴 해 밝은 창가에 앉아 책을 보노라.
라고 하였고, 또
時事如今不欲言 세상일은 이젠 말도 하고 싶지 않으니
安身何處別區存 어느 곳에 몸 편안히 쉴 별구(別區) 있느뇨.
擇仁晩卜幽棲地 인리(仁里) 가려 늘그막에 그윽한 곳에 깃들고 보니
擧世咸稱孝子村 온 세상 사람들이 효자촌이라 일컫는다네.
라고 하였음.
회봉(檜峰) 권득평(權得平)이 공에게 증여한 시에서는 “맑은 표치는 백이(伯夷)의 반열에 못지않구나.[淸標不讓伯夷班]”라고 하였음.
������돈암선생일집(遯菴先生逸集)������이 간행되었음.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이 「遯菴集序」를 짓고, 9세손 창재(昌載)가 「家狀」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이 「遯菴徐公墓誌銘」을,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이 「遯菴徐公墓碣銘」을 찬함. 이밖에 이헌경(李獻慶)이 「登岡記」를 지음. 특히 김홍(金㙆)은 ������上蔡相國濟恭������을 지어, 조정으로부터 차질 없이 공의 행적에 대한 포상이 내려질 수 있도록 청원하였음.
구고서원(九皐書院)에 모셔지고, 후에 절의(節義)로 지평(持平)에 증직되었음.
구고서원 추향제
단산면 사천1리에 소재한 구고서원은 단종때의 절신 돈암 서한정을 모신 서원이다.
서한정은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단종(端宗)이 손위(遜位: 왕위를 사양함)하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달성에서 가족을 이끌고 소백산(小白山)으로 들어가 은둔(隱遁)하였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구고리사(九皐里社)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돈암일집(遯庵逸集)』 1책이 있다.
서한정의 학문에 대한 언급은 많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권득평이 쓴 제문에는 “청아한 절개와 탁월한 행실[淸操卓行]이 있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가장(家狀)에서도 학문과 관련한 것으로는 “과거를 폐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를 다하고 거상(居喪)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예에 따라 어김이 없었다.
밤낮으로 단정히 앉아서는 성리의 학문에 마음을 다하였다.”라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다. 여기서의 예는 당대 학자들이 모두 실천하고자 했던 『주자가례』로 보여진다.
이러한 구문을 통해 성리학을 체득하고, 몸소 실천하려 했던 조선 전기 학자의 모습을 서한정에게서도 잘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단종의 폐위와 함께 벼슬길을 접었던 그의 행적은 선비의 고고한 절개와 신하의 충을 실천한 것으로 후대에도 길이 남겨지게 되었다.
돈암 서한정을 배향한 서원으로 구고서원(九皐書院)이 있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어 구고서당(九皐書堂)이라는 현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 구고서원 현판과 여러 부속건물의 현판은 책실(冊室)에 보관하였었는데, 근래에는 소수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