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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희가 도를 깨우치자 [[서복(진나라)|서복]]이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이때 [[서복(진나라)|서복]]은 백호가 모는 수레, 사마생은 용이 모는 수레, 부연은 흰 사슴이 모는 수레를 타고 함께 심희를 맞이해 하늘로 올라갔고 이 때부터 사람들이 [[서복(진나라)|서복]]이 득도해 신선이 된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심희가 도를 깨우치자 [[서복(진나라)|서복]]이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이때 [[서복(진나라)|서복]]은 백호가 모는 수레, 사마생은 용이 모는 수레, 부연은 흰 사슴이 모는 수레를 타고 함께 심희를 맞이해 하늘로 올라갔고 이 때부터 사람들이 [[서복(진나라)|서복]]이 득도해 신선이 된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
당나라 때 등주의 바닷가에서 여러 사람들이 [[서복(진나라)|서복]]에게 배알했는데, 어떤 선비가 어떤 부인에게 그 광경에 대해 묻고 서복인 줄 깨닫자 사건에 대한 것과 병을 치료해줄 것을 청했다. 이때 [[서복(진나라)|서복]]은 선비에게 좋은 밥을 주었는데, 선비는 적다고 했지만 [[서복(진나라)|서복]]은 그 밥을 다 먹으면 또 주겠다 하면서 아마도 다 못 먹을 것이라 했다. 선비가 밥을 연이어 여러 술 삼키자 여러 그릇을 먹은 듯이 배가 불렀고 작은 그릇에 담긴 술을 마시자 곧 취했다. 다음날 그 선비에게 검은 환약을 여러 알 먹게 했다. 선비가 약을 다 먹자 검은 물과 같은 설사를 여러 번 하고 병이 바로 나았다. 선비가 남아서 섬길 것을 청하자 관직에 있기에 이 곳에 남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그 선비에게 노란 약 한 자루를 주면서 돌아가서 아픈 사람을 만나면 도규(刀圭. 약을 드는 약숟가락)로 조금만 떼어먹으라 했다. [[서복(진나라)|서복]]은 선비를 등주로 보냈고 선비는 당현종에게 약을 헌상하며 이 일을 아뢰었다. 현종이 병이 있는 사람에게 복용케 하자 모두 다 나았다. | 당나라 때 등주의 바닷가에서 여러 사람들이 [[서복(진나라)|서복]]에게 배알했는데, 어떤 선비가 어떤 부인에게 그 광경에 대해 묻고 서복인 줄 깨닫자 사건에 대한 것과 병을 치료해줄 것을 청했다. 이때 [[서복(진나라)|서복]]은 선비에게 좋은 밥을 주었는데, 선비는 적다고 했지만 [[서복(진나라)|서복]]은 그 밥을 다 먹으면 또 주겠다 하면서 아마도 다 못 먹을 것이라 했다. 선비가 밥을 연이어 여러 술 삼키자 여러 그릇을 먹은 듯이 배가 불렀고 작은 그릇에 담긴 술을 마시자 곧 취했다. 다음날 그 선비에게 검은 환약을 여러 알 먹게 했다. 선비가 약을 다 먹자 검은 물과 같은 설사를 여러 번 하고 병이 바로 나았다. 선비가 남아서 섬길 것을 청하자 관직에 있기에 이 곳에 남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그 선비에게 노란 약 한 자루를 주면서 돌아가서 아픈 사람을 만나면 도규(刀圭. 약을 드는 약숟가락)로 조금만 떼어먹으라 했다. [[서복(진나라)|서복]]은 선비를 등주로 보냈고 선비는 당현종에게 약을 헌상하며 이 일을 아뢰었다. 현종이 병이 있는 사람에게 복용케 하자 모두 다 나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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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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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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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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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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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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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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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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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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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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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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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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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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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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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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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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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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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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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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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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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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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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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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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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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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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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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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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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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성현]](徐城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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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 | ||
+ |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 | ||
+ |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 | ||
+ |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 | ||
+ |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 | ||
+ |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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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 | ||
+ |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 ||
+ |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 | ||
+ |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 | ||
+ |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 | ||
+ |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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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 | ||
+ |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 | ||
+ |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 | ||
+ |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 | ||
+ | 生時正偃,故以爲名。 | ||
+ |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 | ||
+ | 宮人聞之,更取養之。 | ||
+ |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 | ||
+ | 及長,襲爲徐君。 | ||
+ |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 | ||
+ |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 | ||
+ |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서언왕)|황룡]]으로 변했다. | ||
+ | 鵠蒼或名後蒼。」 | ||
+ |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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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국]]의 쇠퇴와 멸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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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 | ||
+ |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 ||
+ | |||
+ |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 | ||
+ | |||
+ |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 | ||
+ |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 ||
+ | |||
+ |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 ||
+ |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 ||
+ |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 | ||
+ | |||
+ |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 | ||
+ | |||
+ |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 | ||
+ |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 | ||
+ | |||
+ |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 | ||
+ | |||
+ |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 | ||
+ | |||
+ |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 | ||
+ |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 ||
+ |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 | ||
+ | |||
+ |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 | ||
+ | |||
+ |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 | ||
+ |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 | ||
+ |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 | ||
+ | |||
+ |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 ||
+ |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서국)|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 ||
+ |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 | ||
+ | |||
+ |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 | ||
+ | |||
+ |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 | ||
+ | |||
+ | 중국기록에서 | ||
+ | |||
+ |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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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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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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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 | ||
+ |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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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 | ||
+ |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서국)|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 | ||
+ |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서국)|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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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진나라)|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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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
+ | [[서복(진나라)|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진나라)|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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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기서 [[서복(진나라)|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진나라)|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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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진나라)|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 | == 역대 [[서국]](徐國) 국왕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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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복국제동도문화절]](舟山 저우산) == | == [[서복국제동도문화절]](舟山 저우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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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세(일본)|이세]](伊勢)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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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주(서복)|이주]](夷洲)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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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알래스카(서복)|알래스카]] == |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 | == [[황룡(서언왕)|황룡]](黃龍) == |
2024년 8월 16일 (금) 11:27 기준 최신판
서불(徐市Xú Shì)=서복(徐福Xú Fú)=서시(徐市Xú Shì)
진나라 재상 서복(徐福Xú Fú)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인물. 자는 군방(君房), 서불(徐巿)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제(齊)나라 사람이다. 기원전 219년, 방사로 진시황에게 중용되었고, 이후 명령을 받아 어린 남녀 수천명을 데리고 동쪽으로 가서 불로초를 구하러 갔지만 돌아오지 않았다. 서복의 탐험은 두번에 걸쳐 이뤄진 것으로 보이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기록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제나라 사람 서불(徐巿) 등이 글을 올려 "바다에 봉래(蓬山), 방장(方丈), 영주(瀛洲)라는 삼신산에 신선이 살고 있습니다. 청컨대 목욕재계하시고, 어린 남녀 아이를 데리고 신선을 찾게 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서불을 보내 어린 남녀 아이 수천 명을 선발하여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게 했다. - 진시황본기, 진시황 28년
시황이 대노하여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전에 천하의 쓸모없는 책들을 거두어 모두 불태우게 하고, 학자와 방사들을 아주 많이 모조리 불러 모아 태평을 이루려 했더니 방사들이 단약을 구워 기이한 약을 만들자고 했다. 지금 듣자하니 한중(韓衆, 한종)은 가더니 소식이 없고, 서불 등은 거금을 쓰고도 끝내 약을 구하지 못했다. 간사한 놈들이 서로 이익을 챙기고 고발한다는 말만 날마다 듣고 있다. 노생 등을 내가 존중해서 잘 대했거늘 지금 나를 비방하며 나의 부덕을 무겁게 하고 있다. 함양에 있는 이런 방사들을 조사해 보았더니 요망한 말로 검수(黔首)를 어지럽히는 자들도 있었다." - 진시황본기, 진시황 35년
방사 서불 등은 바다로 가서 선약을 구하길 몇 해가 지나도록 구하지 못하고 비용만 허비하자 문책 받을 것을 두려워해 거짓으로 "봉래의 선약은 구할 수는 있으나 커다란 상어 때문에 늘 어려움을 당하다보니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원하옵건대 활 잘 쏘는 사람을 함께 보내 상어를 보는 즉시 연속 발사되는 석궁을 쏘면 됩니다"라고 했다. - 진시황본기, 진시황 37년
서복(徐福)을 바다로 나아가게 하여 신기하고 기이한 물건들을 구해오도록 했습니다. 그러나 빈손으로 돌아온 서복이 말했습니다.
『신이 바다 한 가운데서 대신(大神)을 보았는데 말하기를 '너는 서쪽 땅 황제의 사자가 아니더냐?'라고 물어서 신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대신이 '무엇을 구하려고 왔는가?’라고 물었습니다. '복용하면 수명을 더하여 연장할 수 있는 신약을 찾기 위해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신이 말했습니다. '너희 진왕은 예의가 박하여, 그 약을 볼 수는 있으나 얻어서 복용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신이 즉시 그 대신을 따라 동남쪽의 봉래산에 이르러 영지(靈芝)로 이루진 궁궐을 보았는데 구리빛을 띤 용의 형상을 한 사자가 나타나 하늘을 밝혔습니다. 그래서 신이 재배하고 '마땅히 무엇을 바쳐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해신이 대답하기를 '양가집 사내 아이와 계집아이 그리고 백공(百工)을 바치면 얻을 수 있으리라!'라고 대답했습니다.』
이에 진황제가 크게 기뻐하며 동남 동녀 3천 명과 오곡의 각종 씨앗과 백공들이 만든 물건들을 가져가게 했습니다. 서복은 비옥하고 넓은 평원을 얻자 그곳의 왕이 되어 그곳에 머물며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 회남형산열전
서복의 이후 행보는 정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불로불사의 영약을 구하기 위해 먼 바다로 떠났다는 신비로운 소재를 후세 사람들에게 만들어줘서, 서복이나 불로불사를 다루는 창작물에서 서복이 진짜로 영약을 구했다는 설정이 자주 쓰인다. 아니면 당시 진시황의 무리한 만리장성 건설과 분서갱유등의 악명을 떨치고 본인에게 불로초를 찾거나 수은을 먹거나 하는 불사에 대한 집착을 한 행적도 있었다 보니 점점 제정신이 아닌 시황제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불로초를 찾는 빌미로 영원히 도주했다는 설도 나오기도 한다. 그러나 서복 자신이 불로불사를 누렸다기 보다는, 어른의 사정으로 다른 이들이 그 혜택을 보았다는 얘기가 많다. 대표적으로 장예모의 영화 진용이나 성룡과 김희선이 나온 영화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등이 있다.
서복에 관한 역사적 기록은 사마천 사기의 진시황본기 뿐만 아니라 사기의 '회남형산열전', 진수의 정사 삼국지, 후한서 등에 나온다. 기록에 따르면 서복은 은중국을 떠나 단주(亶洲) 또는 이주(夷洲)에 도달하였다고 나오는데, 중국에서 이주(夷洲)는 지금의 타이완을, 단주(亶洲)는 일본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또한 서복은 처음부터 불로초를 찾을 수 없음을 알고 아예 진시황의 손아귀를 벗어나 자기 나라를 세우기 위해, 일부러 용왕의 명을 빙자하여 어린 남녀 수천 명과 각종 기술자들을 요구하여 데리고 떠났으며, 동쪽 어느 섬에 자기의 왕국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동쪽으로 간 이후의 행방에 대한 전설로는 그가 일본, 대만 또는 제주도에 도달하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서복에 관한 전승은 동아시아 해안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베링 해협을 건너 알래스카, 즉 아메리카에 도달했다는 전설도 있다.
동쪽으로 흘러간 뒤에 왕국을 세웠다고는 하지만 그게 어느 나라인가는 실존이 불분명하다. 탐라국, 야마타이국, 야마토 왕국 등의 추정이 있기도 하고 아예 나라를 못 세웠을 수도 있지만, 중국이나 조선에서는 그게 일본이라는 풍문이 있었던 듯. 17세기 조선 문인 박인로의 '선상탄'에 보면 '진시황 때문에 서복이 일본에 나라를 세워서 그 후손들이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되었으니 이게 다 진시황 탓이다!'하고 탄식하는 구절이 있다. 또한 간양록에서 강항은 일본의 역사를 둘러보며 '일본에 서복이 도래했다는 설화는 있고 제사도 지내긴 하는데 세상사람들이 말하는것처럼 서복의 후손이 지금의 왜황이 된건 아니다'라고 지적하고 있다. 이 인식은 현대 중국에도 남아있는지 장위안은 "서복 일본 건국 썰"을 비정상회담 방송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당시 장위안의 한국어 말주변이 많이 부족해서 방송에선 그냥 '흔한 중국인의 어거지'로 연출되었는데 역사라기보단 그냥 한국의 연오랑과 세오녀처럼옛날부터 있었던 민담 중 하나 정도다.
서복에게 불로초를 찾게 한 것이나 서복에 관련된 전설이 있는데, 대완국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길가에 널브러져 있었다. 까마귀가 여러 차례 풀을 물고 와서 죽은 사람의 얼굴에 덮으면 모두 살아나자 관리로부터 진시황에게 알렸으며, 진시황이 사신을 보내 풀을 가져가서 귀곡자에게 물었다. 귀곡자는 동해의 조주에서 자라는 불사초로 경전에서 자라 양신지라고도 부른다고 이야기했으며, 진시황은 이 풀을 찾아낼 수 있다고 생각해 서복을 보냈지만 서복은 조주를 찾아 떠난 뒤에 돌아오지 않아 나중에 그가 간 곳을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중국 동쪽 바다로 불로초를 찾아나섰다는 전설 때문에 실제로 중국 동쪽에 있는 한국과 일본의 여러 해안가 지역에는 서복과 관련된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 많이 있다. 한국은 제주도 서귀포시에, 일본은 사가현에 서복 전시관이, 와카야마현에 서복공원과 서복의 무덤이 있다. 서귀포는 도시 이름부터가 서복이 서쪽을 향해 귀로에 오른 포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하며, 제주도에 중국인 관광객이 많고 중국인들 중 진시황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보니 중국인 관광객이 오면 서복 불로초 일화는 관광 가이드의 멘션에 거의 빠지지 않고 언급될 정도. 실제로 제주도에 귤은 자라도불로초가 자라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불로초 전설이 있을 정도로 제주도가 땅 좋고 물 맑은 청정지역이다라는 식으로 마케팅으로 써먹는 것도 있다.
일본의 소설 춘설궁장월에는 서복이 하치조지마에 남여 1000명을 데리고 상륙해 불로초를 찾으러 다녔으나 찾지 못하고 쿠마노에서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진다.* 정방폭포에는 서복이 다녀갔다는 의미의 서불과지(徐巿過之)는 글자가 폭포 옆에 새겨져 있다. 이 글자 자체는 2000년대 초에 중국인 관광객 유치 차원에서 주변 정리 사업을 할 때 새긴 것이며 원래는 폭포 절벽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2011년에 서귀포에서 글자를 찾아보겠다고 폭포 주변을 정밀 탐색했지만 발견되지 않았다.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서귀포에서 유배 생활을 한 추사 김정희가 이 글자를 탁본으로 남겨놨다는 기록이 전해지는데 현재 탁본의 원본은 남아있지 않고 사진으로만 남아있으며 정방폭포와 서복 기념관에 있는 글자는 이 사진을 참고하여 만든 것이다. 또한 1877년에 제주 목사로 부임한 백낙연(白樂淵)이 순시 중 정방폭포에 들렀을 때 서복 전승을 듣고 사람을 시켜 탁본을 했는데 올챙이, 벌레, 새 모양과 비슷한 12개의 글자였으며 중국의 고대 문자여서 해석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원본 글자가 근래까지는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주도 외 다른 지역에도 서복 전승이 있는데 거제시 해금강에는 서복이 이곳에 잠시 머물 때 남겼다는 서불과차(徐巿過此)라는 글자가 절벽에 새겨져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으며 남해군 금산에도 서불과차로 추정되는 글자가 새겨진 바위가 있다. 금산에 있는 글자는 서복 전승과 관련된 것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인데 다만 이것이 "글자"인지 "그림"인지 불분명하며 글자라고 해도 서불과차가 맞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글자의 전체적인 모양 자체는 김정희의 탁본 사진과 매우 유사한 모습이다. 일단 남해군은 서복과 관련이 있다 보고 계곡 입구에 서복상을 세워두었다. 부산광역시 영도구의 봉래산에도 서복 관련 전승이 있다.
심희가 도를 깨우치자 서복이 사신으로 파견되었고 이때 서복은 백호가 모는 수레, 사마생은 용이 모는 수레, 부연은 흰 사슴이 모는 수레를 타고 함께 심희를 맞이해 하늘로 올라갔고 이 때부터 사람들이 서복이 득도해 신선이 된 것을 알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나라 때 등주의 바닷가에서 여러 사람들이 서복에게 배알했는데, 어떤 선비가 어떤 부인에게 그 광경에 대해 묻고 서복인 줄 깨닫자 사건에 대한 것과 병을 치료해줄 것을 청했다. 이때 서복은 선비에게 좋은 밥을 주었는데, 선비는 적다고 했지만 서복은 그 밥을 다 먹으면 또 주겠다 하면서 아마도 다 못 먹을 것이라 했다. 선비가 밥을 연이어 여러 술 삼키자 여러 그릇을 먹은 듯이 배가 불렀고 작은 그릇에 담긴 술을 마시자 곧 취했다. 다음날 그 선비에게 검은 환약을 여러 알 먹게 했다. 선비가 약을 다 먹자 검은 물과 같은 설사를 여러 번 하고 병이 바로 나았다. 선비가 남아서 섬길 것을 청하자 관직에 있기에 이 곳에 남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했다. 그 선비에게 노란 약 한 자루를 주면서 돌아가서 아픈 사람을 만나면 도규(刀圭. 약을 드는 약숟가락)로 조금만 떼어먹으라 했다. 서복은 선비를 등주로 보냈고 선비는 당현종에게 약을 헌상하며 이 일을 아뢰었다. 현종이 병이 있는 사람에게 복용케 하자 모두 다 나았다.
전세계서씨(全世界徐氏)는 2,600만명으로
한국의 서씨는 서국(徐國)(서나라)에서 유래되며,단군한국의 임금들이 우리 해민족의 개국시조이신 한인.한웅.치우.한검 임금들께 제사를 지냈다고 [환단고기]에 기록되어 있는 영고탑이 위치한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뿌리를 둔 영고씨가 은나라 침략을 물리친 후에 산동지역의 서국(徐國)의 왕으로 봉해졌음을 알 수 있다.
나라의 왕으로 임명될 정도면 영고씨는 은나라 침략 때 고리(고구려).몽고리(몽골) 등 단군3한국의 군대를 지휘했던 군대 사령관들 중의 한명이였던 모양이다.
단군한국의 임금들의 한인.한웅.치우.한검에게 제사를 지내기도 했던 영고탑(寧古塔)은 청나라의 발상지로 현재 중국 흑룡강성(黒龍江省) 무단장시 닝안(寧安)에 위치하였다.영고탑은 대진국 발해 시대에 상경 용천부가 설치되어 있었던 지역으로 청대에서 1930년대 초까지 만주 동부의 무단장(牡丹江) 중류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영고탑은 건주여진의 5부족 중 탈알령(脱斡怜) 부족의 올적합(兀狄哈)이 근거하던 지역이었다. 청나라 초기에는 흑룡강성에 영고탑앙방장경(寧古塔昻邦章京)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단군한국 23대 이홀 단군임금 때 또 다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서쪽 영토인 불한국 땅을 침략하자, 은나라 격퇴에 참전하여 서국(徐國) 왕에 봉해진 영고씨는 서언왕 시기에 맹위를 떨치며 중국대륙의 중원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서국(徐國)은 서씨족(徐氏族)이 만든 우리 단군한국의 나라인데, 23대 아홀 단군임금 때는 영고씨가 왕에 임명되어 주나라를 서쪽으로 몰아 내고 중원지역의 맹주 국가가 되었다.
황하상류지역은 동남아에서 북상한 하족과 만주에서 서진한 한국배달족인 화족이 결합해서 살았던 지역으로 오늘날 중국의 시원지역이다. 그래서 중국을 화하족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오늘날 중국인들이 개국시조로 삼는 배달국 사람 공손헌원이다.
공손헌원은 백두산 지역에 위치한 신시배달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하나의 중국을 세우고자 배달국에 도전하자, 결국 배닭국 자오지 천왕은 백두산 지역에서 고리족의 본거지였던 요서지역으로 배달국의 신시를 천도하였다. 그래서 사마천이 사기에서 치우천왕을 코리아의 천자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요서지역에 살았던 고구려의 선조들의 왕이였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치우천왕 이후 단군한국이 배달국이 개국되었던 만주에 개국되기까지 배달국의 역사는 중국대륙과 티벳지역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다.이 때 많은 한국인들이 인도와 중동과 이집트 지역로 이주해 가는 것이다.
공손헌원은 10년간 전쟁을 벌었으나,결국 치우천왕이라는 배달국 자오지 천왕에게 패하여 신하가 되었으며 화하족의 고향인 황하상류지역에서 죽었다.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춘추전국시대를 열었던 주나라도 처음에는 황하 상류에서 일어난 조그마한 나라에 불과했다. 주날 주변에는 온통 단군민족으로 가득차 있었다.그래서 주나라 중심의 천하관으로 황하 동쪽지역의 우리 단군족을 일컬어 주나라 시각으로는 동쪽의 오랑캐라는 의미로 동이족(東夷族)이라 칭했다. 그런데, 주나라가 비하매도한 용어인 동이족이라는 호칭을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정신적으로 아직도 소중화사대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우리 해민족사에서 대영웅으로 우리는 화하족의 우두머리 공손헌원과 싸운 치우천왕을 든다. 하지만 우리는 또 다른 대영웅을 모르고 있었다. 이 분은 고구려 유민인 이정기 장군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이다. 그 인물은 바로 단군조선의 제후국이 되는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이다.
단군조선 중엽 제23세 아홀 단군임금 때 은나라의 다시 침략을 당하자, 은나라을 즉각 격퇴시키고, 은의 회대(산동지역)지방을 빼앗은 후 그 곳에 조선인을 이주시켜 은나라를 포위하게 한다. 이 때 세운 나라가 바로 제후국가들이 서(徐)국과 엄(奄)국이다. 춘추전국시대를 보면 회대 지역에 제후국이 표시되지 않은데 그 이유는 바로 이 지역이 서언왕의 나라가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나라의 서언왕(徐偃王)은 군대를 일으켜 지나 36개국의 조공을 받는 대서제국(大徐帝國)을 건설한 민족의 대영웅이었다. 『후한서』 동이전 서문을 보면 서언왕과 서이족에 대해 자세히 쓰여있다.
"(주나라 3대) 강왕(康王) 때 숙신(조선)이 다시 왔고, 서이가 왕호(王號)를 일컫고 구이(九夷구려:고구려의 전신)를 이끌어 주나라를 쳤다. 이 때 서쪽으로 그 세력이 성한 것을 두려워하여 동북지방의 제후들을 나누어 주고 서언왕을 시켜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서국(徐國)의 뿌리는 앞에서 말한대로 단군조선이었다. [환단고기]기록에 따르면 서기전 1263년 색불루 단군임금의 아드님이신 23세 아홀 단군임금이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평정하고 영고씨(寧古氏)를 서(徐)땅에 임명했는데 여기에 기원을 두고 있다.
중국 고대 문헌인 박물지(博物志)에는 서언왕의 출생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는데 놀랍게도 고대 우리민족의 출생신화인 난생신화 계통을 잇고 있다. 중국 학자들이 밝힌 바와 같이 난생설화는 단군족 고유의 것이라고 한다.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군(徐君서나라 왕)의 궁인(宮人)이 알을 낳았는데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물가에 갖다 버렸다. 어느 사람이 이것을 주워다가 따뜻하게 싸주었더니 이름을 언(偃)이라 했다. 궁인이 알에서 아이가 나왔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다시 데려다가 대를 잇게 하여 서군을 삼았다. 그는 신이한 사람이었다. 무원현 동쪽 십리에 서산(徐山)의 돌집으로 된 사당이 있다. 서언왕은 진(陳), 채(蔡)의 사이를 드나 들면서 주궁(朱弓)과 주시(朱矢)를 얻었다. 이것은 하늘의 상서로움을 얻었다 하여 언왕이라 하였다."
이 기록은 우리 해민족 고유의 설화유형인 난생설화이며 부여의 동명왕(논형에 기록된 난생설화의 주인공)과 고구려 시조 고추모의 탄생설화와도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원을 흔들었던 서국(徐國)이 고조선계 또는 고구려계였다는 결정적인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중국의 주나라는 이 서국(徐國)을 서이(徐夷)라 비하하여 불렀다. 서언왕의 나라인데, 기원전 1236년부터 기원전 512년까지 존속한 나라였다. 중국대륙에서 천제지자가 되는 서언왕이 단군족의 맹주가 되었고 이 때 주나라는 스스로 천자국이라고 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존재에 불과하였다.
[환단고기]에 보면 23대 아홀 단군의 기록에 등장한다. "을유년 기원전 1196년 (또는1236)년 남후 검달(금달,今達)이 청구군(靑邱君)과 구려군(句麗君)과 주개(周愷)라는 곳에서 모여서 몽고리(蒙古里)의 군사와 함께 은나라를 정벌하였고 깊숙히 들어가 회대(淮岱)의 땅을 평정하였다. 제후들이 회대의 땅을 평정, 포고씨(蒲古氏)를 엄국(奄國), 영고씨(盈古氏)를 서국(徐國), 방고씨(邦古氏)를 회(淮)땅에 각각 봉하였다. 이에 은나라가 크게 쇠퇴하였다."
서국(徐國)은 기원전 1236년에 영고씨(寧古氏)를 봉한 나라로 기원전1236년부터 기원전 668년 제나라에 합병될 때까지 570년간 존속하였다. 기원전 680년경 초나라 문왕에게 한 때 수도를 점령당하여 서산(徐山)으로 수많은 백성들과 피난하였다.
고구려 유민으로서 산동지역에서 제나라를 세우고 고구려를 재건하기 위하여 당나라와 맞섰던 이정기처럼 우리 민족사에서 기억 속에 잊혀진 인물인 서국(徐國)의 서언왕(徐偃王)은 중원에 진출하여 단군한국의 마지막 전성기를 구가했던 인물이다. 주나라 목왕이 서국(徐國)이 두려워 서언왕을 중원지역의 맹주로 인정한 것이다.
중국사에서 결국 주나라가 중국대륙을 평정하고 주나라를 천자국으로 삼는 춘추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이는 서국(徐國)이 주나라에게 패권를 상실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이는 주나라가 서국(徐國)을 따르던 단군나라들을 움직여서 서국에 도전기 때문이다. 주나라를 제압할 수 있었고 40여개국의 단군나라들을 이끌던 서국(徐國)이 왜 주나라에게 주도권을 상실했을까? 그것은 단군한국의 단군임금에게 조공을 바쳐 중원지역의 단군나라들이 주나라를 따르도록 외교전을 폈기 때문이다.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건설했다. 그 중에 산동, 산서, 하북 발해안, 하남성 동부, 강소성 북부, 안휘성 동북 각 지방의 고조선계열 소국들은 크게 융성했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서기전 1000년경 산동, 회(淮), 대(岱)지방의 서언왕(徐偃王)이 세운 서국(徐國)은 매우 강성하여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았으며 마치 황제를 자칭하면서 주(周)의 수도를 정벌하려고 황하상류까지 올라갔다. 이에 주(周)의 목왕(穆)王)이 그 세력의 치성을 두려워하여 동방제후를 나누어주고 서언왕(徐偃王)이라고 했다.(後漢書, 卷東85)
결국 서국(徐國)은 초나라의 공격으로 서언왕이 죽게 되면서 맹주시대는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서국(徐國)은 춘추전국시대에도 건재했었다.
서성현(徐城縣)
大徐城在泗州徐城縣北三十里,古徐國也。 대서성재사주서성현북삼십리, 고서국야. 泗州是一个存在于北周到清朝之间的州,辖地大概在今天的泗县、天长、盱眙、明光、泗洪一带, 사주시일거존재우북주도청조지간적주,할지대개재금천적사구,천장,우태,명광,사홍일대 最后州府在现在的泗县城。 최후주부재현재적사구성
현재 중국 역사는 사주(泗州)의 위치를 위 지도 일대 라고 해석을 합니다. 사주(泗州)는 사수(泗水)라는 하천을 배경으로 형성된 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현재 중국역사가 비정하는 사수(泗水)는 남사호 북쪽입니다.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사수(泗水)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땅입니다. 사(泗)라는 한자는 오직 사수(泗水)만을 쓰기 위해 마들어진 고유명사적 글자입니다. 따라서 현재 사주(泗州)로 비정되는 땅은 거짓으로 비정된 것을 의미 하는 것입니다.
박물지《博物志》云:「徐君宮人有娠而生卵,以爲不祥,棄之於水濱。 박물지《博物志》云:「서나라 임금의 궁인이 임신을 하여 알을 낳았는데, 불길하다고 생각하여, 알을 물가에 버렸다」 孤獨母有犬名一鵠蒼,衞所棄卵以歸,覆暖之,乃成小兒。 홀어미인 곡창이라는 개가 있었는데, 위에 알을 버리고 돌아 왔는데, 따뜻하게 데웠더니 아이가 나왔다. 生時正偃,故以爲名。 정언에서 낳았기 때문에, 옛 이름으로 했다. 宮人聞之,更取養之。 궁중사람들이 이 소식을 들고 술렁 거렸다. 及長,襲爲徐君。 그리하여 서 임금을 잇게 하였다. 後鵠蒼臨死,後鵠蒼臨死,生角而九尾,化爲黃龍也。 후에 곡창은 죽음에 이르렀고, 뿔과 꼬리가 9개인 황룡으로 변했다. 鵠蒼或名後蒼。」 곡창 혹은 후창이 이름이다.
서국의 쇠퇴와 멸망
중국기록에 “목왕(穆王)이 조보(造父)에게 초(楚)나라로 하여금 서(徐)국을 멸하게 명하라 하여 하루만에 초나라에 이르렀는데 이에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멸하였는 바 서언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서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은 연대가 맞지 않다.
즉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기록인데, 주(周)나라 목왕(穆王)은 서기전1001년에 즉위하였으며 초(楚)나라 문왕(文王)은 서기전689년에 즉위하였던 것이다. 즉, 주나라 목왕이 조보(造父)를 초나라에 보내어 서국을 멸망시켜라고 명하였던 때는늦어도 서기전980년경이 될 것이며 실제 초나라의 문왕이 서국을 정벌한 때는 서기전680년경이 되어 약300년의 시차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기록은 주나라의 입장에서 약 300년이 지난 후대에 초(楚)나라가 팽창하면서 서국(徐國)을 정벌한 것을 두고 이미 300년 이전에 주(周)나라가 제후국이 되는 초(楚)나라에 명령(命令)한 것을 후대에 수행한 것처럼 기록한 것이 되는 바 이는 역사날조에 버금가는 것이라 할 것이다. 다만, 한편으로는 300년의 역사를 몇 줄로 압축하여 적었다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초(楚)나라 문왕(文王:서기전689년~서기전677년)은 서주(西周)시대의 제5대 목왕(穆王) 시대가 아닌 서기전770년부터 시작된 춘추(春秋)시대가 되는 동주(東周)시대의 제16대 이왕(釐王:서기전682년~서기전677년) 때가 된다.
조보(造父)라는 인물은 주나라 목왕(穆王)을 섬겨 공을 세워 조성(趙城)에 봉해져 조씨(趙氏)의 시조가 되었는데 조보(造父)의 조부(祖父)가 비렴(蜚廉)이며, 비렴의 아들에 여방(女防)이라는 자가 있고 여방의 후대에 비자(非子)가 있었는데, 이 비자가 진(秦)나라에 봉해졌다.
비렴의 성씨는 영(嬴)이므로 조보(造父)의 원래 성씨가 영(嬴)인 것이다. 즉 조(趙)나라와 진(秦)나라의 공동 조상은 비렴(蜚廉)이 된다.
서기전680년경 초나라 문왕(文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나 실제로는 완전히 멸망시킨 것이 아니며, 서국이 수도를 서산(徐山)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된다.
여기서, 왕은 인자하나 권세가 없어 차마 싸우지 못하니 패전하게 되었으며 이에 언왕이 북으로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달아나니 백성들이 그를 따른 자가 수만이었고 이로 인하여 그 산 이름을 서산(徐山)이라 하였다라고 하는 데서 소위 서국의 왕이 초나라와의 전쟁에서 싸우지 못하고 패전하여 서산이라 불리는 곳으로 피한 것이 되는데 수만의 백성들이 따라갔던 것으로 보아 폭군이 아니라 왕도(王道)를 실천하던 인자한 왕이었던 것이다.
서국은 서기전680년경에 초나라에 패하여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이후 이곳이 서국(徐國)의 산(山)으로서 소위 서산(徐山)으로 불리는 것이다. 이후 서국(徐國)은 서기전668년에 제(齊)나라 환공(桓公) 때 제나라에 병합되었다라고 기록되고 있다. 이때는 주나라 제17대 혜왕(惠王:서기전677년~서기전652년) 시대이며 제(齊)나라 환공(桓公:서기전685년~643년) 시대이고 초(楚)나라 성왕(성왕:서기전672년~서기전590년) 시대로서 관중(管仲)이 제나라의 재상으로 있었고 제(齊)나라가 주(周)나라를 이끌던 때로서 제환공의 패자 12년째가 되는 해가 된다.
그런데, 다시 서기전530년에 초(楚)나라 영왕(靈王) 때 초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으며 서기전526년에도 제(齊)나라 경공(頃公) 때 제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였다라고 기록되는 바 이는 서국이 제나라에 복속하였던 서기전668년 이후에 망하지 않고 독립을 쟁취한 것이 되며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의 합려왕(闔閭王)에게 완전히 망할 때까지 존속한 것이 된다.
즉, 서국(徐國)은 서기전680년경 초나라에 의하여 완전히 망한 것도 아니며 서산(徐山)으로 옮겨가 존속한 것이 되고 서기전668년에 제나라 환공에게 정벌당하여 제나라에 병합되었으나 완전히 멸망한 것이 아니라 복속하던 제후국에 해당하는 나라로 존속한 것이 된다. 여기서 서언왕(徐偃王)은 서국(徐國)의 왕을 가리키는 명칭이 되는데 실제 역사상 서언왕(徐偃王)은 주나라 목왕(穆王) 시절인 서기전990년경 인물이나 서기전680년경의 사건에 관한 기록에서 언왕(偃王)이라 한 사실에서 서언왕의 후손인 왕을 통칭 언왕이라 부른 것이 된다.
서기전512년 오(吳)나라가 서국(徐國)을 정벌하여 멸망시켰다. 이때부터 비로소 서국(徐國), 서이(徐夷), 서(徐)라는 명칭이 역사기록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리하여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서기전1236년부터 서기전512년까지 725년간 존속한 나라가 된다.
중국내륙 동이 세력의 소멸
서국(徐國)의 전성기가 되는 서기전990년경 서언왕 (徐偃王) 시대에 서국(徐國)에게 복속하였던 36국이 거의 동이족 국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고 보이는데,황하 남쪽으로 하남성에서 산동지역과 회수지역에 걸치는 것이 된다. 이때는 황하 남동쪽으로 산동지역에 걸쳐 소재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杞), 허(許), 등(滕), 설(薛), 주(邾), 거(莒), 강(江), 황(黃), 추(鄒), 양(梁) 등의 제후국 말고도 주(周)나라의 제후국이 확실한 산동지역의 제(齊) 산동지역의 태산 서쪽의 노(魯), 하남성의 송(宋), 하남성의 채(蔡), 산동지역의 조(曹), 하남성의 정(鄭) 하남성의 위(衛), 하남성의 진(陳) 등 주나라 서울의 동쪽에 있던 동방(東方)의 여러 제후국들이 36국(國)에 속하였던 것이 된다.
중국기록에서
“서기전221년 진(秦)나라가 육국(六國)을 병합하자 회이(淮夷)와 사이(泗夷)가 모두 흩어져 백성이 되었다 <후한서 동이열전>”라고 기록하고 있다.
진시황(서기전247년~서기전210년)은 서기전221년에 제(齊), 초(楚), 진(秦), 연(燕), 한(韓), 위(魏), 조(趙)의 전국칠웅(戰國七雄) 즉 칠국(七國)의 전국(戰國)시대를 마감하고 주(周)나라 땅이던 중국내륙을 통일하였다.
즉, 진시황(秦始皇) 이전의 진왕(秦王) 정(政)은 서기전247년에 즉위하여 서기전240년에 소국이던 위(衛)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30년에는 전국칠웅의 하나인 한(韓)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5년에는 위(魏)나라를 멸망시켰고, 서기전223년에는 초(楚)나라를 멸망시켰으며 서기전222년에 조(趙)나라와 연(燕)나라를 멸망시켰고 마지막으로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를 멸망시킴으로써 통일을 이루어, 진시황(秦始皇)이라 자칭하였던 것이다.
회이(淮夷)는 회수(淮水) 지역에, 사이(泗夷)는 사수(泗水) 지역에 자리잡고 있던 동이족의 나라이며 진(秦)나라가 육국 중에서 마지막으로 제나라를 평정할 때인 서기전221년에 진시황에 의하여 완전히 중국에 흡수된 것이 된다. 회이(淮夷) 즉 회국(淮國)은 서기전1236년에 단군조선의 제후국으로 시작하여 서기전221년에 진나라에 망하니 1,016년의 역사를 가지는 나라가 된다.
사이(泗夷)는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불명인데 아마도 남이(藍夷) 계통에 속하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가 될 것이다. 산동지역의 청구(靑邱) 외 회대(淮岱)지역의 동이족(東夷族)이 곧 남이(藍夷) 계통이 된다. 즉 이 남이계통에 엄이(淹夷), 남이(藍夷), 서이(徐夷), 회이(淮夷), 사이(泗夷), 사이(沙夷) 등이 속하는 것이다. 회이(淮夷)와 같은 시기인 서기전1236년에 세워졌던 서국(徐國) 즉 서이(徐夷)는 서기전512년에 오(吳)나라에 이미 망하였으며, 회이는 이후에도 300년간 더 존속한 것이다.
한편, 서기전221년에 제(齊)나라가 망한 후 회사(淮泗) 즉 회이(淮夷) 또는 사이(泗夷) 출신이던 서복(徐福, 徐市)은 진(秦)나라를 배반하려 계획하고서 서기전217년 진시황에게 신선불로초(神仙不老草)를 찾는다고 핑계를 대고서 동남동녀, 기술농업 전문가 등 500여명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들어가 도망쳤으며 이에 지금의 일본 땅에 도착하였고 서기전208년에 죽으니 이세(伊勢) 땅에 서복의 무덤이 있다.
이세는 일본의 국조신(國祖神)이라 불리는 천조대신(天照大神) 요하유(大日靈:오~하이류)의 신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서복(徐福)의 88대 조상은 황제헌원(黃帝軒轅)이며 후대의 직계조상은 하(夏)나라에 벼슬을 하였고, 은(殷)나라 때는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으며 주(周)나라 때 초(楚)나라에 벼슬을 하였다가 윗대 조상이 동이지역인 회사(淮泗)지역에 살았던 것이 되고, 서복은 한(韓)나라의 백성이 되었던 것이 된다.
여기서 서복의 조상이 벼슬하였던 조선(朝鮮)은 회대지역의 단군조선 관할 제후국 땅을 가리키는 것이 되는데 은나라 시대인 서기전1766년부터 서기전1122년 사이에 회대지역에는 이미 남국(藍國)이 존속하고 있었고 서기전1236년에 엄국(淹國), 서국(徐國), 회국(淮國)이 봉해졌는 바 서복의 직계조상은 이미 존재하고 있던 남국(藍國)에 벼슬을 하였던 것이 된다.
다만, 은(殷)나라가 단군조선의 직접적인 후원으로 건국되어 제후국(諸侯國)인 천자국(天子國)으로 단군조선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실로 보면 서복이 자신의 조상이 은나라에 벼슬을 하였던 것을 조선(朝鮮)에 벼슬을 하였다라고 기록하였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 된다.
목차
- 1 역대 서국(徐國) 국왕
- 2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 3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 4 서귀포(西歸浦)
- 5 서불과차(徐不過此)
- 6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 7 함양군 한·중·일 서복국제학술심포지엄
- 8 한중일 서복연구협의회 창립
- 9 서복과 제주 한중일 불로초 장수문화 세미나
- 10 서복문화국제협의회
- 11 국제서복문화제(龍口 롱코우시)
- 12 서복국제동도문화절(舟山 저우산)
- 13 서복해양문화제 (连云港市 Liányúngǎng Shì 롄윈강시)
- 14 서리고적(徐吏古跡)
- 15 냉천마을
- 16 서복솔숲
- 17 단주(亶洲)
- 18 기이(紀伊)
- 19 이세(伊勢)
- 20 이주(夷洲)
- 21 알래스카
- 22 황룡(黃龍)
- 23 곡창(鹄蒼)
- 24 泰山(태산)=서산(徐山)
- 25 월병(月餠)
- 26 고려도경(高麗圖經)
- 27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 28 고군산군도
- 29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 30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 31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32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33 구암서원(龜巖書院)
- 34 숭현사(崇賢祠)
- 35 풍석문화재단(楓石文化財團)
- 36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 37 서련(徐憐) 판관 사적비(事跡碑) 건립
- 38 행림서원(杏林書院)
- 39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 40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 41 숭렬전(崇烈殿)
- 42 온조왕묘(溫祚王廟)
- 43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 44 삼충제(三忠祭)
- 45 육현사(六賢祀)
- 46 같이 보기
역대 서국(徐國) 국왕
- 약목(若木)
한국의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한중일 국제 서복문화제(徐福文化祭)
서귀포 예술인의 활동 지원 확대를 통해 관광여행시장, 중국·일본 등의 생태자원 활용사례, 불로장생 불로초 테마공원 조성 방안 등에 대한 의견도 나눈다.
다양한 연령층과 젊은이들의 서복(徐福)과 관련된 관심과 이해를 돕기 위해 서복(徐福) 노래자랑대회, 서복(徐福)청소년페스티벌 등 다양한 참여와 문화체험부스, 서복(徐福)기원제 등 서복의 의미를 담은 불로장생 관련 홍보 및 체험관도 마련된다.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濟州西歸浦正房瀑布)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동홍동에 있는 폭포. 높이는 23m , 너비 8m, 깊이 5m로,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물이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로 유명하다. 천제연(天帝淵)·천지연(天地淵) 폭포가 남성적인 힘의 폭포라고 한다면, 정방은 오색영롱한 무지개 속에 조심스레 파도 위로 떨어지는 우아한 여성미를 느끼게 한다. 1995년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가 2008년 명승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서귀포(西歸浦)
한국의 최남단에 위치한 서귀포시도 방위와 관계되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바라보면 최남단이므로 남쪽과 관련된 지명이 어울린다. 그러나 서귀포는 ‘진시황의 명령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러 왔던 서시 일행이 이곳에 머물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라산이 삼신산(三神山)의 하나이며, 중국이 제주도의 서쪽에 위치하므로 ‘서쪽으로 돌아간 곳’에서 유래된 지명은 논리적으로도 타당하다. 정방폭포의 절벽에는 ‘서시과처(徐市過處)’라는 글이 적혀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그 자취를 인정하여 서시과처의 서복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서불과차(徐不過此)
서불과지(徐市過之) :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소재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부두로 5번길 9
제주도 서귀포시 서귀동 962
서불과차는 제주도에 있는 정방 폭포 옆 암벽에 새겨져 있는 곳이고, 또한 한 곳은 남해 금산 아래 각석이 새겨져 있으며, 통영 소매물도 글씽이 굴에 각석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서복 기념관(徐福紀念館)(서복전시관(徐福展示館)
1999년 2월 27일 문화관광부 전국 7대 문화관광권 개발사업으로 지정되어 2003년 9월 26일 개관하였으며, 전시관에는 서복(徐福)상을 비롯한 진시황릉의 청동마차, 병마용(兵馬俑) 등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있다.
서복(徐福)과 서귀포 서복은 영주산(한라산)에서 불로초(영지버섯,시로미, 금광초, 옥지지 등)를 구한 후 서귀포 앞바다 정방폭포 암벽에 '서불과지(徐巿過之:서복이 이곳을 지나갔다)'라는 글자를 새겨놓아 서귀포(西歸浦)의 지명유래가 '서쪽으로 돌아간 포구'라고 전해진다. 조선 말 학자 김석익이 편찬한 파한록(破閑錄)에는 '1877(고종 14년) 제주 목사 백낙연(白樂淵)이 서불과지 전설을 듣고 정방폭포 절벽에 긴 밧줄을 내려 글자를 탁본하였다. 글자는 12자인데 글자 획이 올챙이처럼 머리는 굵고 끝이 가는 중국의 고대문자인 과두문자(蝌蚪文字)여서 해독할 수가 없었다.'는 기록이 있다.
서복(徐福)은 서불(徐巿)이라고도 불리며, BC255(제왕 10)년 진나라가 통일하기 전 제(齊)나라에서 태어났다. 서복(徐福)의 고향은 진나라 당시 제군(齊郡) 황현(黃縣) 서향(徐嚮)으로 오늘날 산동성 용구시(龍口市)이다. 한편 강소성 감유현 서부촌(徐阜村)도 서복(徐福)의 고향이라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제나라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연·제나라의 신선사상 영향을 받아 방사【方士:천문·의학·신선술·점복(占卜)·상술(相術) 등을 연구하는 사람】가 되었다. 서복(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장생약을 찾아 3,000여 명의 대선단을 거느리고 동도(東渡)하였으나, 평원광택(平原廣澤 : 평탄한 들과 넓은 진펄)을 얻게 되자 나라를 세우고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한다. 최종 정착지로 알려진 일본에서 서복(徐福)은 농·어업· 의약·주거문화·토기 등 야요이문화를 창달시켜 일본 경제 사회의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전해진다. 서복(徐福)은 선진문명을 전파한 문화의 사자(使者)로서, 한국·중국·일본에서는 매년 서복(徐福)을 기리는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함양군 한·중·일 서복국제학술심포지엄
함양군은 산삼축제 기간동안 문화예술회관 소공연장에서 ‘2018년 한·중·일 서복 국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한중일 서복연구협의회 창립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 창립을 위한 준비위원회 2차 회의가 2015년 10월 16일 중국 강소성 연운항시에서 열렸다.
서복과 제주 한중일 불로초 장수문화 세미나
(사)제주서복문화국제교류협회(이사장 김형수)가 주관하고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와 공동주최하는 '제16회 한중일 제주서복문화 학술세미나'가 2017년 12월 12일 오후 1시부터 서귀포예술의전당 소극장에서 열렸다.
서복문화국제협의회
한·중·일 서복문화 세계문화유산 등재 공동노력 합의 가칭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가 제주에서 태동을 준비하고 있어 주목된다. 한·중·일 대표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2015년 9월 28일 서귀포시 소재 하얏트 리젠시 제주호텔에서는 한·중·일 대표, 서복 연구가 등 50여명이 한 자리에 모여 가칭 서복문화국제연구협의회(徐福文化國際硏究協議會)가 창립을 위한 준비위원회 1차 회의를 개최했다.
국제서복문화제(龍口 롱코우시)
서복국제동도문화절(舟山 저우산)
서복해양문화제 (连云港市 Liányúngǎng Shì 롄윈강시)
서리고적(徐吏古跡)
냉천마을
서복솔숲
단주(亶洲)
기이(紀伊)
이세(伊勢)
이주(夷洲)
알래스카
황룡(黃龍)
황룡(黃龍)
서언왕의 신화를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데,화하계신화와 더불어 용산문화계 신화가 같이 보입니다. 서언왕 탄생에는 알, 신비한 개,황룡의 수호를 받는 내용이 나옵니다. 빛의 정기로 태어난 알에서 영웅의 출생은 페르시아를 비롯한 서역과 북방초원에 유행한 신화였고,개토템도 페르시아와 주족[周]속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황룡도 범 화하계토템이였습니다. 서언왕은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었다.그래서 언[偃]이라고 이름했다. 그리고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을 얻고 하늘이 뜻을 보여주었다고 생각하고 이름을 궁[弓]으로 고쳤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몸에 뼈가 없고 한쪽으로 기울은 모습은 대문구 용산문화의 신이였던 기[夔]의 상형이기도 하며,고고학적으로는 대문구 용산문화의 관습으로 두개골 변형 ,편두의 풍습이 있었는데 그 후유증은 몸이 굽고 기울게 되는 것이였습니다. 신성한 붉은 활과 화살,그리고 궁[弓]이라는 글자는 용산문화에서 전쟁의 여신을 뜻하는 상징이였습니다. 서언왕의 탄생을 수호했던 개는 죽을때 정체가 들어 되는데 뿔이 있었고 아홉꼬리가 있었어 황룡으로 보았다는 구절도 개와 용,그리고 아홉꼬리를 가진 여우로 해석할수 있습니다. 개와 용은 화하계 상징이고 여우는 용산문화 최고의 여신,상징물중에 하나였습니다.
곡창(鹄蒼)
곡창(鹄蒼)
세계 최초 개이름. 서군의 궁녀가 낳고, 부정하다 여겨져 왕이 내다 버린 알,어느 노파가 기르던 개(이름 '곡창')가 물어왔다는 기록이다. 노파가 따뜻하게 해 주어 알에서 나왔다는 서국의 서언왕, 대부분의 중국 역사학자들은 서국이 동이족 국가라는 것과 서언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
泰山(태산)=서산(徐山)
주왕이 이를 듣고 사신을 보냈으니 역참을 따라 1일만에 초나라에 이르러 정벌하도록 하였다. 서언왕이 인자로워 그 백성이 싸워서 해를 입는 것을 보지 못하고 초나라에게 패배하고 팽성(彭城) 무원현(武原縣) 동산(東山) 아래로 도망갔다. 백성들이 따라서 가는 자가 1만 명에 달했으니 이 뒤에 그 산의 이름을 서산(徐山)이라고 한다. 산 위에 돌방이 있는데 신령이 있어 백성이 장수를 빈다. 지금도 모두 볼 수 있다.
중국 산둥성(山東省) 중부 타이산 산맥의 주봉(主峰)으로 높이 1,532m, 총면적 426㎢이다. 중국의 5대 명산(名山)의 하나인 동악(東岳)으로 신성하게 여겨졌다. 1987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소재지: Spanning the cities of Tai’an and Jinan in central Shandong Province 좌표N36 16 E117 06
중국의 오악(五岳) 중에서도 으뜸으로 꼽히는 산으로, 높이 1,532m이다. 타이산(태산)은 예로부터 중국인들이 가장 성스럽게 여겼던 산이다. 중국의 역대 황제들은 이곳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봉선의식을 거행했다. 기원전 219년 진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시작으로 한나라 무제(武帝)를 포함 많은 황제들이 이곳에서 봉선의식을 치렀다. 특히 한나라 무제는 5번, 청나라 건륭제는 11번이나 봉선의식을 행했다고 한다.
타이산에는 도교와 불교 사원과 특정인을 숭배하는 사당, 권세가들의 누각들이 들어섰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이 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다이먀오(岱庙)다. 다이먀오는 동악묘(東岳廟)라고도 불리는데 이곳은 타이산의 신(神)인 태산부군을 모신 사당이다. 황제들이 봉선의식을 올렸던 곳으로, 특히 경내의 티엔황디엔(天皇殿)은 북경 자금성(紫禁城, 쯔진청)의 타이허디엔(太和殿), 취푸(曲阜)에 있는 공자묘 안의 다청디엔(大成殿)과 함께 중국 3대 전각으로 꼽히는 곳이다. 1009년 송나라 때 처음 건축되었으며 높이 22m, 너비 49m의 크고 화려한 전각이다. 현재의 건물은 17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송나라 때의 거대한 벽화는 그대로 남아 있다.
산 중턱에는 우숭팅(五松亭)이 있다. 진시황(시황제)이 타이산을 오르다가 폭풍우를 만나자 그 아래서 비를 피했다는 소나무가 있었던 곳이다. 당시 시황제가 고마움의 표시로 소나무에게 오대부(五大夫) 직위를 주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한다. 현재는 청나라 옹정제(雍正帝) 때 심은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산 정상에는 비샤시(碧霞祀)라는 사당이 있다. 비샤위안쥔(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모신 곳으로 11세기에 창건되었다. 이외에도 타이산에는 이티엔먼(一天門), 중티엔먼(中天門), 난티엔먼(南天門), 다이쭝팡(岱宗坊), 훙먼궁(紅門宮), 완셴러우(萬仙樓) 등의 많은 명소가 있다. 산 곳곳의 암벽과 수백 개의 비석에 새겨진 글자와 경문이나 시문도 타이산의 명물이다.
타이산(태산)을 신성시하기는 일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다. 타이산에 한번 오를 때마다 10년씩 젊어진다고 하여 누구나 타이산 등정을 평생의 숙원으로 삼을 정도였다. 때문에 이곳을 오르려는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으며, 산 정상까지 7,412개의 돌계단이 만들어져 있다.
월병(月餠)
중국의 명과(銘菓)로서, 음력 8월 15일 추석날밤 웨빙을 빚어 먼저 달에 바친 다음, 친척·친지들에게 추석찬품으로 선물한다. 위에삥(月饼)은 밀가루와 라드, 설탕, 달걀 등을 섞어 만든 피에 견과류 등의 소를 넣은 후 나무틀에 넣어 모양을 잡아서 구워낸 중국의 삥(饼, 떡)이다. 주원장은 반원세력과 연합하여 봉기를 할려고 하였다.당시 조정의 관리는 엄청 엄격하여 서로 정보를 주고받기가 무척 힘들었다. 주원장의 군사 유백온(刘伯温)은 한가지 계책을 생각했다.8월15일 밤 봉기라는 쪽지를 적어 당시 먹던 떡속에 숨기라고 명령하였다.각지로 보내 봉기할 군사들에게 전해졌고 8월15일밤 봉기에 호응하라는 정보가 전달되었다. 대장군 서달(徐達)은 원나라 수도를 공격하여 함락시켰습니다.이 소식에 주원장은 기뻐하며 곧 있을 중추절에 군사들과 백성들이 즐거움을 만끽하라고 명령합니다.봉기때 비밀 서신을 전달한 떡을 월병(月餠)이라고 명명하였다.그리고 명절맞이 떡으로 월병(月餠)을 하사하였습니다.그 이후 지금까지 중추절에 먹는 명절 음식이 되었고 여러 종류의 월병(月餠)이 전해지고 있다.
언젠가 주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일찍이 한나라에 소하, 한신,장자방, 3걸(三杰)이 있었다... 지금나에게도 그런 자들이 있는데, 이선장(李善長)은 나의 소하이고, 서달(徐達)은 나의 한신이며, 유기는 나의 장지방이다." 서달(徐達)은 1332년 안휘성 봉향에서 태어났다. 농민 출신이었지만 병서를 좋아하여 「육도삼략」에 심취하였고, 또 스스로 무예를 익혀 무술에 뛰어났다. 같은 고향 출신인 주원장 보다 네살 적은 그는 어릴 적부터 장성할 때까지 주원장의 친구이자 부하로 살았다.
그는 출정할 때마다 유생을 초청하여 병법에 대하여 논하였다. 서달은 말수가 적고 생각이 깊었다. 한 번 군령을 내리면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부하들은 서달의 명을 매우 두려워 하였다. 하지만 주원장 앞에서는 항상 공손하고 신중하여 말 한마디도 매우 조심하였다. 부하병사들을 잘 다독이면서 함께 동고동락했으므로 병사들은 모두 목숨을 다해 그의 명을 따르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가 지휘하는 군대는 남경과 북경의 도읍을 비롯하여 무려 100여 성을 공격하여 점령했던 상승군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절대 해를 끼치지 않고 항상 전란에 지친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이렇듯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대장군으로 진우량을 격파하고 장사성을 제압함으로써 주원장을 옹립하였으며, 이후 북경을 함락시켜 원나라를 멸하였고 이어서 북상하여 몽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여 명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공신 중의 공신이었다. 전국을 누비며 연전연승을 거둔 그에게 주원장은 '만리장성'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붙여주었다. 그는 우승상의 직위에 올랐으며 위국공(魏國公)에 봉해졌다.
그는 1385년 향년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중산왕(中山王)으로 추존되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후 주원장은 자기를 도운 공신들을 대단히 경계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주원장은 서달 장군을 불러 바둑을 두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바둑은 점심 무렵이 될때까지 팽팽하게 진행되어 승부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주원장이 서달의 돌을 잇달아 따내면서 승기를 잡았다고 득의만만해 있는데, 서달은 웬일인지 다음 착수를 하지 않고 있었다.
주원장이 "왜 그대는 다음 수를 두지 않고 있는가?" 라고 묻자, 서달은 곧바로 바닥에 엎드리면서 "폐하, 전체 판을 살펴보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자세히 바둑판을 살펴보고 나서야 주원장은 바둑돌들이 '만세'라는 두글자의 형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주원장은 대단히 기뻐하며 아예 바둑을 두던 누각을 막수호정원과 함께 서달에게 상으로 하사하였다. 후세 사람들은 이누각을 '승기루(勝棋樓)'라 불렀다.
서달의 공적은 주원장을 뛰어넘어 주원장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서달은 원래 종기가 있어 거위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주원장은 일부러 찐 거위를 서달에게 하사하였다. 당시 규정에 의하면, 황제가 하사한 음식은 반드시 곧바로 전부를 먹어야 했다. 서달은 주원장의 뜻을 알아차리고 눈물을 흘리며 거위고기를 모두 먹어치웠다. 얼마 뒤 그는 독이 올라 세상을 떠났다.
물론 이 고사는 민간에 퍼진 이양기일 뿐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후대에 소설의 소재로 애용되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 사절의 한 사람으로 고려에 왔던 서긍(徐兢)이 지은 책.
고려도경 국제학술대회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의 고려 여행기 「고려도경」 속 그림 연구를 위해 국내외 전문가들이 한자리에 모입니다.
고군산군도
고군산군도는 900년 전인 1123년 고려의 외교무대이자 중국 사신이 수도 개경 다음으로 가장 오래 머물렀다고 알려졌다. 중국 사신 서긍(徐兢)은 무리 지어 있는 섬을 보며 바다 위의 성 같다고 표현했다.
새만금 서긍항로 개척
새만금 서긍항로를 개척해 한·중 양국이 상생하는 해상 고속도로로 건설해 나갈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와 비상한 관심을 끈다.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
2023년은 1123년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지 900주년이 되는 해였다. 이를 기념해 고려사 전공자이자 서긍의 고려 방문에 관한 논문을 수 편 발표한 문경호 공주대 역사교육과 교수가 <1123년 코리아 리포트, 서긍의 고려도경>을 지난 12월 출간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구암서원(龜巖書院)
구암서원(龜巖書院)은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산격동)에 있는 서원이다. 1975년 2월 5일에 '건조물 경북 제2호'로 지정, 1982년 3월 4일에 대구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되었다.
구계 서침(徐沈)의 덕을 기리기 위해 위패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서원이다. 서침(徐沈)은 고려말∼조선초의 변혁기에 향촌에 은거하며 학문 연구에 노력하였다.
숭현사(崇賢祠)
先賢(선현)을 높이 받들어 제향하는 사당으로써 1665년(현종 6년)에 연구산(連龜山)에 세워졌는데, 1718년(숙종 44년)에 대구광역시 중구 동산동 229번지로 이건하였다.
현재는 대구광역시 북구 연암공원로17길 20 (산격동)의 구암서원 내에 있다.
숭현사의 중앙에는 서침(徐沈)과 서거정(徐居正)의 위패가, 오른쪽에는 서해(徐嶰), 왼쪽에는 서성(徐渻)의 위패가 각각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다. 매년 9월 1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경비는 자손들에 의해 충당되고 있다.
풍석문화재단(楓石文化財團)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선생(1764~1845)은 영조와 정조 시절에서 순조, 헌종 대에 이르기까지 농업개혁을 통한 생산력 증대와 혁신적인 제도를 도입해 민생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며 다산 정약용 선생과 함께 조선 후기실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송재문화제(松齋文化祭)
보성군은 독립신문 창간과 독립협회 창립 등 활동으로 조국의 자주독립에 평생을 바친 송재 서재필 선생을 기리는 ‘송재 문화제'를 개최했다.
서련(徐憐) 판관 사적비(事跡碑) 건립
제주목판관(濟州牧判官) 서련(徐憐)은 중종 8년(1513) 약관(弱冠)의 나이로 제주판관(濟州判官)에 부임한 후 김녕사굴(金寧蛇窟)의 뱀에게 해마다 어린 처녀를 제물로 바쳐 오던 미신과 폐습을 퇴치한 선정관(善政官)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행림서원(杏林書院)
충청남도 논산시 가야곡면에 있는 조선전기 서익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1570년(선조 3)경 지방유림이 서익(徐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창건하고 위패를 모셨다. 그 뒤 이소(李韶)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광복이 되자 유림이 복원을 결의하고 복원사업을 계속 추진하여 1966년에 서원이 복원되었다.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육현사(六賢祀)
천안시 풍세면 풍서 5리에 있는 육현사(六賢祀)에서는 조선 시대의 선비 유언겸(兪彦謙)·이승벽(李承璧)·현덕승(玄德升)·서정연(徐挺然)·이중명(李重明)·서한주(徐漢柱)를 모시는데, 지역 유림과 후손들이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제향을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