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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혁명가 서언(徐彦) | 고려 혁명가 서언(徐彦)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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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언(徐彦) 금나라 사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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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무신정권 기간(1170~1270) 중 일어난 민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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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위총의 난 (趙位寵의亂)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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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1174년(명종 4)에서 1176년(명종 6)까지 약 3년 동안에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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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시 서경유수(西京留守)였던 조위총은 국왕을 폐립하고 문신을 학살해 전횡을 일삼던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을 타도하고, 자신과 서경(西京)주 01)인의 세력을 펴기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윤임첨과 두경승 등이 이끄는 관군의 활약으로 끝내 실패하고 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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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경유수 조위총은 1174년에 정중부 등의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동계(東界)주 02)와 북계(北界)주 03)에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라.”고 격문을 돌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 ||
| + | 이로 인해 현담윤(玄覃胤)을 도령(都令)으로 하는 연주성(延州城, 영월 부근)을 제외한 절령(岊嶺, 자비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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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대해 개경의 조정에서는 평장사(平章事)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내시예부낭중(內侍禮部郎中) 최균(崔均)을 동북로 지휘사(東北路指揮使)로 삼아 여러 성에 가서 타이르게 하였다. | ||
| + | 그러나 절령역에서 윤인첨이 이끄는 정부군은 때마침 부는 폭풍과 폭설 때문에 서경병에게 대패하여 서경병이 개경에 육박할 정도였다. 적에게 포위된 윤인첨은 적과 싸워 죽고자 했으나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정균(鄭筠)의 만류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돌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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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한편 동계(東界)주 02)에서는 조위총의 장수 김박승(金朴昇)과 조관(趙冠) 등이 화주영(和州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낭장 이거(李網)가 문을 열어주어 병마사 대장군 이의(李儀)와 병마부사(兵馬副使) 최균이 죽었다. 또한 두경승(杜景升)이 동로에서 서로로 길을 돌려 북계의 몇 개 성을 점령했으나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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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절령에서 승리한 서경병이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의방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서경병을 격파하였다. 당시 그는 서경인 상서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목을 베어 저자에 내걸었다. 최숙(崔淑) 등은 적진을 기습해 서경병을 크게 무찔렀다. 이처럼 승세를 타서 대동강까지 쫓아 서경의 성밖에서 진을 쳤으나 이의방이 이끈 군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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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같은 해 11월 조정에서는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두경승을 후군총관사(後軍摠管使)로 삼아 서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관군이 출정 준비를 하던 혼란 중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의 명을 받은 승려 종감이 이의방을 죽인 일이 발생했다. 명종이 전중감(殿中監) 유응규(庾應圭)와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를 조위총에게 보내 이의방의 일파가 제거되었음을 내세우며 반란군의 명분이 약해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조위총군의 기세는 여전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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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러자 윤인첨은 조위총의 심복들이 있는 연주(漣州, 평남 개천)를 공격하면 서경이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연주로 향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별로 순조롭지 못하자, 명종은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중 사정유를 서경에 보내어 조서를 내려 타일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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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위총이 항복하기를 청했다가 다시 반발하자, 후군총관사 두경승이 연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다음해 6월에 이르러 윤인첨은 드디어 군사를 서경으로 돌려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을 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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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주변의 성과 연락이 두절된 조위총은 김존심(金存心)·조규(趙規)를 금나라에 보냈으나 김존심이 중도에서 조규를 죽이고 조정에 항복하였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徐彦)을 금나라에 보내 정중부·이의방의 의종 시해 사건을 알리고,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도리어 서언을 잡아 고려로 보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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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그 뒤 서경에서 공방전을 1년 동안 되풀이하다가 1176년(명종 6) 6월에 이르러서 윤인첨은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두경승은 대동문(大東門)을 공격해 서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목을 베고 그의 무리 10여 명을 가둠으로써 조위총의 반기는 22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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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위총이 죽은 뒤에도 서북민의 항거운동은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서경이 함락될 때 도망한 장정(壯丁)들을 중심으로 1177년(명종 7)에 재봉기했다가 1년 6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며, 1179년(명종 9)에도 서북면지병마사 이부(李富)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봉기했다가 곧 진압되는 등 서북민들은 조위총의 거병을 시작으로 끈질긴 항쟁을 계속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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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위총의 난은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거병이었으나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주체적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위총의 거병은 무신 집권 기간에 각처에서 일어난 민란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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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趙位寵, 史失世系. 毅宗末, 以兵部尙書, 爲西京留守. 鄭仲夫·李義方等, 弑毅宗, 立明宗, 明宗四年, 位寵起兵, 謀討仲夫等. 遂檄召東北兩界諸城兵曰, “側聞上京重房議, ‘以北界諸城, 率多桀驁, 欲討之.’ 兵已大擧, 豈可安坐, 自就誅戮? 宜各糾合士馬, 速赴西京.” 於是, 岊嶺以北四十餘城, 皆應之, 獨延州閉城固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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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위총(趙位寵)은 그 가계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의종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다가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나갔다.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이 의종을 죽이고 명종을 왕으로 세우자, 명종 4년(1174) 조위총이 병사를 일으켜 정중부 등을 토벌할 것을 모의한 후 동계·북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돌려 군사를 불러 모았다. “소문에 따르면 개경의 중방에서 ‘북계의 여러 성이 사납고 교만한 무리들[桀驁]을 많이 거느리고 있으므로 토벌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미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고 하니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아서 그냥 죽을 수 있겠는가? 각자 군사와 말을 소집해 빨리 서경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 격문을 보고 절령(岊嶺 : 황해도 자비령) 이북의 마흔 여 개 성들이 모두 호응했으며, 연주성(延州城 :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만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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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王遣平章事尹鱗瞻, 率三軍, 擊位寵, 又遣內侍禮部郞中崔均, 爲東北路都指揮使, 諭諸城. 鱗瞻至岊嶺驛, 位寵遣兵急擊, 大破之. 位寵先鋒至京西, 義方擊敗之, 奔還至大同江, 收散卒, 復嬰城固守. 義方久屯城外, 位寵擊却之. 義方兵獲位寵子卿及將軍禹爲善斬之, 傳首于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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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왕이 평장사(平章事) 윤인첨(尹鱗瞻)을 보내 삼군을 이끌고 조위총을 치게 하는 한편, 내시(內侍)·예부낭중(禮部郞中) 최균(崔均)을 동북로 도지휘사(東北路都指揮使)로 삼아 여러 성을 설득하게 하였다. 윤인첨이 절령역(岊嶺驛)에 당도하자 조위총이 군사를 보내어 급습해 크게 격파하였다. 조위총의 선봉이 개경의 서쪽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이의방이 공격해 패퇴시키니 대동강(大洞江)까지 되돌아가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다시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이의방이 성 밖에서 오랫동안 진을 치고 있자, 조위총이 공격해 퇴각시켰다. 그러나 이의방의 부대도 조위총의 아들 조경(趙卿)과 장군 우위선(禹爲善)을 사로잡아서 목을 벤 후 머리를 개경으로 보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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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明年, 位寵遣兵擊耀德縣. 時義方已伏誅, 王遣殿中監庾應圭·給事中史正儒, 詔位寵曰, “朕因臣民推戴, 奄登大寶, 于今六年. 賴文武臣隣協輔, 獲守丕基, 頃有賊臣, 專擅國政, 多行不義, 害及中外. 民怨兵起, 至於無知小民, 殺傷尤多, 朕甚哀痛. 其賊臣, 已從卿等表奏, 擧義掃蕩. 卿等又請降使宣諭, 嘉乃忠誠. 遣使宣諭, 體朕至意, 更勵忠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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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듬해 조위총이 군대를 보내 요덕현(耀德縣 : 함경남도 요덕)을 공격하였다. 이때 이의방은 이미 사형을 당했으므로 왕은 전중감(殿中監) 유응규(庾應圭)와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 편에 조위총에게 이런 조서를 내렸다. “짐이 신하와 백성의 추대를 받아 갑자기 왕위에 오른 지 여섯 해가 되었다. 문무 신료들이 가까이서 보좌해 준 덕분에 나라를 지켜 왔으나, 최근에 악한 신하가 국정을 농단하고 불의를 많이 행해 그 피해가 내외에 두루 미쳤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반란이 일어나 무지한 백성들이 살상을 많이 당하는 사태가 벌어져 짐이 매우 애통했다. 이제 경들이 표를 올려 건의한 바를 좇아 의병을 일으켜 그 악한 신하를 소탕하였다. 경들이 사자를 보내어 백성들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해 왔으니 그 충성을 가상히 여긴다. 이제 백성들을 타이르는 사자를 보내니 짐의 지극한 뜻을 깨달아 다시 충성을 다하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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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位寵上表請降, 應圭還, 位寵悔之, 遣精騎, 追至洞仙驛不及. 不勝其憤, 斬其舘吏而還. 尋遣左營郞將徐俊明, 上表賀誅義方, 王留俊明於法靈寺, 唯放校尉徐惟挺還. 上京兵, 圍漣州數月, 漣州請救於位寵. 位寵遣將救之, 上京兵, 從閒道擊之, 斬千五百餘級, 虜二百五十餘人. 又掩擊于莽園, 斬七百餘級, 虜六十餘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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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에 조위총이 투항하겠다는 표를 올렸으나 유응규가 돌아가자 표를 올린 것을 후회하고 정예 기병을 보내 동선역(洞仙驛 :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까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기병들은 화가 치민 나머지, 역의 관리(舘吏)들을 마구 죽이고 돌아가 버렸다. 그 얼마 후 조위총이 좌영낭장(左營郞將) 서준명(徐俊明)을 보내어 이의방을 처형한 것을 축하하는 표를 올리자, 왕은 서준명을 법령사(法靈寺)에 억류하고 교위(校尉) 서유정(徐惟挻)만 돌려보냈다. 개경 군사들이 연주(漣州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시)를 여러 달 포위하니, 연주가 조위총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조위총이 구원군을 보내오자 개경 군사들이 지름길을 통해 기습하여 1천 5백여 명을 죽이고, 2백 50여 명을 사로잡았다. 망원(莽園)에서도 기습을 벌여 7백여 명을 죽이고 60여 명을 사로잡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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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時毅宗猶未葬, 以位寵聲言義方弑君不葬之罪, 乃發喪, 葬禧陵. 將軍朴存威, 奉使在雲中道, 每誇納釜之事, 雲中人應位寵, 遂斬存威. 鱗瞻攻西京, 位寵食盡, 至啗人屍, 時出挑戰. 鱗瞻堅壁不出, 位寵遣金存心·趙規如金, 奏義方放弑之罪. 存心中道殺規, 來泊禮安江. 王遣中使迎勞, 拜存心內侍閤門祗候, 其軍將六十人, 職賞有差. 位寵聞之, 殺存心妻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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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당시 의종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의방이 임금을 시해하고 장례도 지내지 않은 죄를 조위총이 공개적으로 규탄하자, 비로소 초상을 선포하고 희릉(禧陵 : 의종의 능호)에 장사지냈다. 장군 박존위(朴存威)가 왕의 사자로 운중도(雲中道)에 있으면서 매번 의종의 시신을 넣을 가마솥을 바친 일3)을 떠벌리므로 운중도 사람들이 조위총의 말에 따라 박존위의 목을 베어 버렸다. 윤인첨이 서경을 공격하자 조위총의 군사들은 양식이 떨어져 사람의 시체까지 먹으면서도 때때로 성을 나와 싸움을 걸어왔다. 윤인첨이 군영을 굳게 방어하면서 응전하지 않자, 조위총은 김존심(金存心)과 조규(趙規)를 금나라에 보내어 이의방이 의종을 내쫓고 죽인 죄를 알리게 하였다. 김존심이 도중에 조규를 죽이고 예안강(禮安江)으로 와서 정박하자. 왕은 중사(中使)를 보내어 환영한 후 그를 내시합문지후(內侍閤門祗候)에 임명하고 군사와 장수 60명에게 관직과 상을 차등 있게 주었다. 조위총이 그 소문을 듣고는 김존심의 처와 자식을 죽여 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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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位寵復遣徐彦等, 如金上表曰, “前王本非避讓, 大將軍鄭仲夫, 郞將李義方弑之. 臣位寵請以岊嶺以西至鴨綠江四十餘城內屬, 請兵助援.” 金主執送彦等東京路都摠管府, 牒寧德城云, “西京留守趙位寵, 三次遣使九十六人, 齎告奏表文等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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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위총이 다시 서언(徐彦) 등을 금나라에 보내어 이런 표를 올렸다. “전 왕은 애당초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장군 정중부, 낭장 이의방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신 조위총은 절령(岊嶺)의 서쪽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는 마흔 여 곳의 성을 들어 귀부하겠으니 원병을 보내 도와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금나라 임금은 서언 등을 잡아서 동경로도총관부(東京路都惣管府)로 압송하고, 영덕성(寧德城 : 평안북도 의주군 부근)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게 했다. “서경유수 조위총이 세 차례에 걸쳐 사신 아흔여섯 명을 보내어 사정을 보고하는 표문을 올린 바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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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今勘得所遣人徐彦等狀稱, ‘大定十年八月, 前王遊普賢寺, 大將軍鄭仲夫, 郞將李義方等, 執前王及子孫, 送海島, 立前王弟翼陽公爲王, 飾以因病讓位, 上表大朝. 大定十三年, 仲夫等遣人殺前王及子孫官僚等. 大定十四年, 位寵上表請王誅仲夫等, 今年正月, 王下詔諭賊臣等已誅. 復有仲夫子筠, 殺義方等, 不告國王, 領兵三萬餘人, 攻西京相戰, 至今未決勝否. 今年六月, 位寵與北界四十餘城, 欲屬大朝, 遣義州都領崔敬若等, 齎牒婆速路摠管府公文. 至義州關門, 爲鄭白臣等所殺, 又筠等軍馬遮路. 以此, 遣大使金存心·趙規等, 各三十餘人, 泛海來奏, 不知消息節次. 再遣彦等, 其欲屬大朝及請兵問罪等事.’ 委是端的欽奉帝命, 位寵陳乞事, 則非大國所容. 將彦等付彼國施行. 其彦等衣甲諸物, 差官交割.”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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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지금 그가 보낸 서언 등이 휴대한 문서를 살펴보면, 그 내용은 이러하다. ‘대정(大定 : 금나라 세종의 연호) 10년(1170) 8월 전 왕이 보현사(普賢寺)에 놀러 가자 대장군 정중부와 낭장 이의방 등이 전 왕 및 그 자손을 붙잡아 바닷섬으로 보낸 다음, 전 왕의 동생 익양공(翼陽公 : 명종)을 세워 왕으로 삼고는, 병으로 양위한 것처럼 꾸며 금나라에 표를 올렸습니다. 대정 13년에는 정중부 등이 사람을 보내어 전 왕과 그 자손 및 관료들을 죽였습니다. 대정 14년에는 저 조위총이 국왕에게 표를 올려 정중부 등을 처형할 것을 청하자, 금년 정월에 왕이 악한 신하를 이미 사형에 처했다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이의방 등을 죽인 후 국왕에게 보고도 않고 군사 3만여 명을 동원해 서경을 공격해 옴으로써 전투가 벌어졌으나 지금까지 승부를 내지 못했습니다. 금년 6월 저 조위총은 북계(北界) 마흔 여 개의 성들과 함께 상국에 복속하고자, 의주도령(義州都領) 최경약(崔敬若) 편에 파속로총관부(婆速路惣管府)에 공문을 보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의주(義州)의 관문에 이르러 정백신(鄭白臣) 등에게 살해되었으며, 또한 정균 등의 군대가 금나라로 가는 길을 차단했습니다. 이 때문에 대사(大使) 김존심과 조규 등 각 서른 여명을 바닷길로 금나라에 보내 사정을 아뢰게 했는데, 아직 회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다시 서언 등을 보내어 금나라에 복속하고자 하는 것과 고려의 죄를 따지는 군대의 파견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결국 금나라 황제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말이나, 조위총이 요청해 온 일은 우리 금나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서언 등을 고려로 보내고 그들의 의복과 무기 등은 관리를 보내어 인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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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六年, 位寵使人, 詐爲居士服, 請兵於西北州鎭, 至靜州被執. 位寵與上京兵戰, 佯敗走, 上京兵逐至龍興德部, 位寵回兵擊之, 上京兵, 死者甚多. 麟州人康夫·祿升·鄭臣等, 殺防守將軍蔡允和, 王遣內侍祗候崔存往諭之. 未幾, 夫等又殺義州分道將軍尹光輔, 防禦判官李彦升, 以應位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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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명종 6년(1176) 조위총이 부하에게 거사(居士)의 옷을 입혀 변장시킨 다음 서북지방의 주와 진으로 보내 군사를 요청하게 하다가 정주(靜州 :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에서 붙잡혔다. 조위총이 개경 군사들과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주하자, 개경 군사들이 용흥(龍興 : 지금의 황배북도 황주군)의 덕부(德部)까지 추격했으나 조위총이 군사를 돌려 격파하니 개경 군사들의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인주(麟州 : 의주군) 사람 강부(康夫)·녹승(祿升)·정신(鄭臣) 등이 방수장군(防守將軍) 채윤화(蔡允和)를 살해하자, 왕이 내시지후(內侍祗候) 최존(崔存)을 보내어 그들을 회유했다. 그러나 얼마 후 강부 등은 다시 의주분도장군(義州分道將軍) 윤광보(尹光輔)와 방어판관(防禦判官) 이언승(李彦升)을 살해하고 조위총에게 내응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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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位寵遣人, 署諸城酋豪官. 麟州都領中郞將洪德, 謀執位寵所遣人以拒, 夫等袖刃至德家, 欲害之, 德伏兵於門, 斬之. 鱗瞻攻西京通陽門, 後軍摠管杜景升攻大同門破之, 城中大潰. 遂殺位寵, 函其首來獻, 梟于市, 又執送位寵妻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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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위총이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의 추장(酋長)과 토호들에게 관직을 부여했다. 인주도령·중랑장(麟州都令中郞將) 홍덕(洪德)이 조위총의 사자를 체포한 후 저항을 시도하자, 강부 등이 소매 속에 칼을 숨기고 그의 집에 가 살해하려고 했으나, 홍덕이 문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을 죽였다. 이어 윤인첨이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공격하고 후군총관(後軍惣管) 두경승(杜景升)이 대동문(大同門)을 공격해 격파하니 성안이 큰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조위총을 죽이고 그 머리를 함에 넣어 왕에게 바치고 조위총의 처자도 잡아 압송하자, 조정에서는 조위총의 머리를 큰 거리에 전시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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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房瑞鸞, 宣州鄕貢進士. 趙位寵起兵, 西北諸城皆附. 瑞鸞謂其兄孝珍·得齡曰, “位寵脅誘諸城土豪, 僞署官職, 令收兵赴西京, 吾曹亦與其中. 吾婦翁尹仲瞻, 以兵馬判官, 在從兄鱗瞻麾下, 壻攻婦翁, 情所不忍. 况位寵所謀不軌, 終必自敗, 兄宜熟計.” 孝珍等然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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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방서란(房瑞鸞)은 선주(宣州 : 선천군)의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고 서북지방의 여러 성이 다 그의 편에 붙어버리자, 방서란은 형 방효진(房孝珍)·방득령(房得齡)더러 이렇게 말했다. “조위총이 여러 성의 토호들을 협박하고 회유해 거짓 관직을 준 다음 군사들을 수습해 서경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하기에, 우리도 그중에 끼어버렸습니다. 제 장인 윤중첨(尹仲瞻)이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사촌 형인 윤인첨(尹鱗瞻)의 휘하에 있는데, 사위인 제가 장인을 공격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또한 조위총이 도모한 반란은 반드시 끝내 자멸하고 말 것이니 형들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방효진 등이 옳은 말이라 여기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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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夜密誘州人曰, “位寵始以誅賊臣爲名, 故諸城響應, 稱兵向闕. 及至郊幾, 交鋒輒敗, 官軍追擊, 僵屍相枕. 欲收餘燼, 復謀旅拒, 氣勢已沮, 不可復振. 所恃者, 惟險固耳, 若王師一朝拔西京, 移軍臨之, 闔城必爲虀粉. 且位寵之志, 不止討賊, 若不改圖, 恐爲同惡, 流醜後世. 今欲率先倡義, 去逆効順, 於諸君意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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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밤에 몰래 선주 사람들을 설득했다. “조위총이 애초에 반역한 신하들을 죽인다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여러 성이 호응하고 군사를 동원해 대궐로 향했다. 그러나 개경 근교에서 교전하는 족족 패배를 당했으며, 관군의 추격에 시체가 길을 메웠다. 패잔병들을 수습해 다시 대항하려고 한들 이미 사기가 꺾여 버렸으니 다시 군세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는 것은 오직 험한 지세와 견고한 성뿐이나, 만약 관군이 하루아침에 서경을 함락시킨 후 이동하여 이곳으로 온다면 온 성이 산산조각이 날 것이 뻔하다. 또 조위총의 뜻이 적도들을 토벌하는 데 그치지 않으니, 만약 우리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면 같은 악당이 되어 추한 이름을 후세에 남길까 두렵다. 이제 솔선 의거해 역심을 버리고 귀순하려 하니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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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州人皆諾. 有都領郞將義儒, 受位寵署爲將軍, 獨不可. 孝珍狙射斃之, 卽遣人告義州. 義州人亦殺位寵所置將景綽等以應, 遣人齎首, 從閒道飛報行營, 諸城聞之, 皆罷兵. 事聞, 王嘉之, 賜孝珍爵散員, 瑞鸞以同正, 屬內侍, 得齡留本州爲戶長. 未幾, 州人嫉孝珍獨受爵, 遂殺得齡及其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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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 말을 들은 선주 사람들은 따르기로 했다. 도령낭장(都領郎將) 의유(義儒)란 자는 조위총의 임명을 받아 장군이 되었으므로 홀로 반대하자, 방효진이 기회를 틈타 활로 쏘아 죽인 다음 즉시 사람을 보내어 의주(義州)에 알렸다. 의주 사람들도 조위총이 임명한 장군 경작(景綽) 등을 죽이고서 호응하는 한편, 사람 편에 머리를 들려 지름길로 관군의 행영(行營)에 급히 알려 왔으며,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성들도 모두 무장을 해제했다. 이 일을 들은 왕이 기뻐하며 방효진에게 산원(散員)의 벼슬을 주고, 방서란은 동정(同正)으로 내시(內侍)에 배속시켰으며, 방득령은 본 고을에 머물러 호장(戶長)을 하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주 사람들이 방효진 혼자 벼슬을 받은 것을 시기해 방득령과 그 모친을 죽여 버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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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朴齊儉, 明宗時, 以大將軍, 爲西北面兵馬使. 趙位寵旣敗, 餘衆復聚, 分軍爲三, 有思進·軾端·進國者, 爲中軍行首, 戒訓爲指諭, 金甫爲前軍行首. 光秀爲後軍行首. 散居嘉·渭·泰·漣·順等州山谷首尾行劫, 大爲民患. 焚慈·肅二州, 屠妙德·香山諸寺, 王遣兵討之, 屢戰失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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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제검(朴齊儉)은 명종 때 대장군으로 있으면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조위총(趙位寵)이 패망한 후 그 잔당들이 다시 모여서 전군을 삼군으로 재편성했는데, 사진(思進)·식단(軾端)·진국(進國)이란 자는 중군 행수(中軍行首), 계훈(戒訓)은 중군지유(中軍指諭), 김보(金甫)는 전군 행수, 광수(光秀)는 후군 행수가 되었다. 이들은 가주(嘉州 : 가산)·위주(渭州 : 영변군)·태주(泰州 : 태천)·연주(漣州 : 개천시)·순주(順州 : 순천) 등 각 주의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일사불란하게 약탈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적도들이 자주(慈州 : 순천시)·숙주(肅州 : 숙천)를 불지르고 묘덕사(妙德寺)·향산사(香山寺) 등의 사원을 도륙하는 지경에 이르자 왕이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게 했지만, 누차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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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齊儉始至營, 與錄事金重甲謀, 部分諸校, 發興化·雲中道兵, 爲掩襲計. 賊依阻山林, 無定居, 諸郡人又多爲賊耳目, 軍中動靜, 輒先知之, 戰始交, 輒敗北, 士卒氣沮, 逗留不進, 裁留五百人爲聲援, 引還. 賊乘勝攻寧州靈化寺, 驅僧爲兵, 進攻漣州, 賊勢轉盛.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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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제검이 처음 병영에 부임하자 녹사(錄事) 김중갑(金重甲)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장교들을 부대별로 나누어 흥화도(興化道)·운중도(雲中道)로 진격해 적도를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적도들은 일전한 거처가 없이 숲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고 고을 백성들이 또한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해 적도들이 관군의 동정을 먼저 파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싸우기만 하면 패배를 거듭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제자리에서 조금도 진군하지 못했으므로 응원군 5백 명만 남겨두고 귀환해버렸다. 적이 승세를 타고 영주(寧州 : 안주시)의 영화사(靈化寺)를 공격해 승려들을 내몰아 군사로 삼고서 연주지역으로 진공하니 적도들의 세력은 더욱 왕성해졌다. | ||
| + | |||
| + | 然其遊寇日久, 閭閻無塢壁者, 劫掠旣盡, 大城皆堅守, 未易猝拔. 由是, 漸就飢窘, 謀欲降. 齊儉聞之, 遣人招誘, 諸屯賊相率來降. 齊儉每見降者, 輒拊循之曰, “汝等亦皆吾赤子.” 開倉賑之, 前後凡六百餘斛. 乃聽其所欲, 分處龜·漣等州, 使之安業. 給光秀等傳騎送京, 王以光秀爲校尉, 金甫攝校尉, 思進·軾端·戒訓爲隊正. 獨進國不降, 率其黨百五十餘人, 欲投女眞, 齊儉遣兵盡擒斬之. 龜州別將東方甫等十七人, 與賊交關往來, 皆誅之. | ||
| + | |||
| + | 그러나 떠돌아다니며 약탈하는 행태가 오래 지속되자, 방어시설이 없는 민가는 거의 다 털려버렸으며, 큰 성은 모두 관군이 굳게 수비하므로 쉽사리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점점 수세에 몰리고 굶주리게 된 적도들은 항복할 계획을 꾸미게 되었다. 박제검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회유하자 여러 곳에 진을 쳤던 적도들이 서로 이끌고 투항해 왔다. 박제검이 투항해 온 자들을 볼 때마다, “너희들 또한 모두 임금의 적자(赤子)들이다.”라고 위무하며, 창고를 열어서 전후 모두 6백여 섬의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또 그들의 소원대로, 귀주(龜州 : 구성시)·연주 등지에 분산 거주시켜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조치했다. 광수(光秀) 등에게는 역마를 제공해 개경에 보내니, 왕이 광수를 교위(校尉)로, 김보를 섭교위(攝校尉)로 삼았으며, 사진·식단·계훈에게는 대정(隊正) 벼슬을 주었다. 진국만이 항복하지 않은 채 일당 1백 5십여 명을 이끌고 여진(女眞)에게 투항하고자 하므로 박제검이 군사를 보내어 모두 사로잡은 다음 처형시켰다. 또 귀주별장(龜州別將) 동방보(東方甫) 등 17명이 적도들과 결탁해 왕래했으므로 모두 잡아 처형했다. | ||
| + | |||
| + | 齊儉後知御史臺事, 其子葆光, 年少輕薄, 初補權務氣驕. 道遇李紹膺妻, 見從婢有持薑者, 求之不與, 葆光歐辱之. 紹膺妻大怒, 率僮僕, 持刀杖, 至齊儉家呼噪, 欲殺葆光, 葆光及家人皆逃匿. 紹膺女壻, 慶大升弟也, 紹膺妻憑慶勢, 訴重房, 重房奏, “葆光道辱宰相妻, 大無禮. 宜置於法.” 事下重房治之, 葆光竟不出, 齊儉坐免. 歷抵諸將家乞憐, 諸將哀之, 請復其官, 王許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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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제검은 뒤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는데, 그 아들 박보광(朴葆光)은 나이가 적고 경박한 자로, 처음 권무(權務)에 임명되자 방자하게 행동했다. 길에서 이소응(李紹膺)의 처와 마주쳤는데, 그 여종이 가진 생강을 보고 탐을 내었으나 주지 않자 박보광이 구타하고 욕질을 했다. 이소응의 아내가 대로해 하인들을 칼과 몽둥이로 무장시킨 다음 박제검의 집으로 가 마구 고함을 지르며 박보광을 죽이려고 하니, 박보광과 집안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숨었다. 이소응의 사위는 경대승(慶大升)의 동생으로, 이소응의 처가 경대승의 권세에 기대어 중방(重房)에 호소하니 중방에서는, “박보광이 길에서 재상의 처에게 치욕을 가한 것은 크게 무례한 행위이니 마땅히 법으로 처치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건을 중방에 회부해 죄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박보광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며, 박제검은 면직되었다. 그 후 장군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애걸하자 장군들이 불쌍히 여겨 복직을 건의했으며,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 ||
| + | |||
| + | 奇卓誠, 幸州人. 美容儀, 善射御. 初補校尉, 毅宗好馳馬擊毬, 擢爲牽龍, 常在王側. 善事權貴, 驟遷衛將軍, 明宗初, 累轉叅知政事. 趙位寵起兵, 卓誠爲副元帥禦之, 及還, 判兵部事, 進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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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기탁성(奇卓誠)은 행주(幸州) 사람이다. 용모와 행동이 단아했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다. 처음 교위(校尉)에 임명되었는데, 의종이 승마와 격구(擊毬)를 좋아했으므로 그를 견룡군(牽龍軍)으로 발탁해 늘 측근에서 모시게 했다. 또 권세가들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재빨리 위장군(衛將軍)으로 승진했으며, 명종 초에는 여러 번 승진해 참지정사(叅知政事)가 되었다.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탁성은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이를 방어했으며, 귀환해서는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있다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승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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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有金平者, 少有文名, 金甫當之亂, 妻父韓彦國被戮, 平携妻子, 隱於昇平郡. 及卓誠秉政, 以平有才, 擢爲直史舘. 卓誠貪財賣官, 由是, 賢者屛跡, 讒佞競進. 家臣高忠全·李仁齡, 皆姦黠貪鄙, 惡聲遠播. 九年卒. 廣平宮久廢無主, 卓誠欲請王居之. 其妻諫止之, 不聽居數月而死. 後王論討位寵功, 贈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守太師門下侍中, 圖形閣上.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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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평(金平)이란 자는 젊은 시절부터 문명이 높았는데, 김보당의 병란에 장인 한언국(韓彦國)이 피살되자 처자를 데리고 승평군(昇平郡 : 전라남도 순천시)에 숨어 살았다. 기탁성은 정권을 잡자 김평의 재능을 높이 사 직사관(直史館)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기탁성은 재물 욕심이 많아 벼슬을 팔곤 했으므로, 어진 이들이 자취를 감추고 남을 모함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다투어 관직에 진출했다. 그중 가신(家臣) 고충전(高忠全)과 이인령(李仁齡)은 모두 간교하고 탐욕스러워 그 악명이 널리 퍼졌다. 기탁성은 명종 9년(1179)에 죽었다. 광평궁(廣平宮)의 주인이 없어 오래 폐가로 버려지자 그가 왕에게 부탁해 그곳에 살려고 했다. 그의 처가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말했으나, 듣지 않고 수개월 동안 광평궁에서 살다가 죽었다. 뒤에 왕이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한 공을 기려 추충협모좌리동덕공신(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을 추증하고 공신각에 초상을 그려 안치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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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洪仲方, 起自行伍, 鄭仲夫廢毅宗立明宗, 仲方與有力驟拜大將軍. 性謇直不阿, 每面折人過, 王器之, 人亦倚重. 時武散官·檢校將軍以下散員同正以上聚議, 欲奪處東班權務官. 重房·臺省畏衆口, 莫敢誰何, 仲方獨曰, “國家設官分職, 唯卿監外, 武臣不兼文官. 自庚寅以後, 吾儕得處臺省, 布列朝班. 校尉·隊正許著幞頭, 西班散職, 差任外官, 固非先王之制. 若又遽奪權務官, 其如東·西定制何? 吾寧死不從.”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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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홍중방(洪仲方)은 군졸[行伍] 출신으로 정중부(鄭仲夫)가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할 당시 조력했던 덕분에 갑자기 대장군으로 뛰어올랐다. 성품이 강직하여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매양 면전에서 남의 잘못을 책망하므로 왕이 그를 인재로 여기게 되었고 사람들로부터도 신뢰를 받았다. 당시 산관(散官)인 검교장군(檢校將軍) 이하 산원(散員)·동정(同正) 이상의 무반들이 모여 문반들이 맡고 있던 권무관(權務官) 직을 빼앗고자 의논했다. 중방(重房)과 대성(臺省)은 무반들이 떠들어대자 겁을 내어 감히 제지하지 못했지만 홍중방만 홀로 반대했다. “나라에서 관직을 제정할 때 경(卿)과 감(監) 외에는 무반들이 문반을 겸직하지 못하게 했는데 경인(의종 24, 1170)년 이후 우리 무반들이 대성에 들어가게 되어 조정의 반열에 포진하게 되었다. 또 교위(校尉)와 대정(隊正)도 복두(幞頭)를 쓰는 것이 허용되고, 무반의 산직(散職)이 지방 관직으로 나가게 된 것은 도저히 선왕의 제도라 할 수 없다. 만약 또 권무관까지 빼앗는다면 문반과 무반을 구분한 제도에 비추어볼 때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나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따르지 못하겠다.” | ||
| + | |||
| + | 議遂寢. 於是, 西班散職, 群聚於路, 每見達官, 控訴不已. 一日, 遇仲方, 遮道慢罵, 仲方攘臂跋馬排突. 至重房曰, “吾今日幾死矣. 下之陵上, 至如是耶?” 乃密謀, 捕首謀者四五人配島. 又流其黨十餘人, 時議尤重之. 累官至守司空尙書左僕射, 掌外官·長吏之職, 進退予奪, 惟意所恣. 又蓄嬖妾, 嗜利者附之, 爭納賄賂. 九年卒. | ||
| + | |||
| + | 이에 그 주장이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되자 무반의 산직(散職)들이 길에서 무리를 지어 고관들을 볼 때마다 길을 막고 호소하기를 마지않았다. 하루는 그자들이 홍중방과 마주치자 길을 막고 욕설을 퍼부으니, 홍중방이 팔을 떨치고 말을 채찍질하여 그들을 밀치고 마구 내달았다. 중방에 도착하자, “내가 오늘 거의 죽을 뻔하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욕하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 하며 탄식했다. 그리고 은밀히 계획을 꾸며 주모자 네댓 명을 체포해 섬으로 유배시켰다. 또 일당 십여 명을 유배하니, 당시 여론이 그를 더욱 추앙했다. 거듭 승진해 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자 외관(外官)·장리(長吏)들을 관장하면서 임면과 상벌을 오직 자기 뜻대로 자행했다. 또 애첩을 두었는데, 사리를 탐하는 자들이 다투어 뇌물을 바치며 아부했다. 명종 9년(1179)에 죽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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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
| +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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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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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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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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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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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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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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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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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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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 ||
| +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 ||
| +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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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섭대천]](利涉大川) == | ||
| +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
| + | |||
| +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 ||
| + | |||
| +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 ||
| + | |||
|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
| +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
| + | |||
| + | == 같이 보기 == | ||
| + | * [[이천 서씨]] | ||
| + | * [[대구 서씨]] | ||
| + | * [[달성 서씨]] | ||
| + | * [[부여 서씨]] | ||
| + | * [[연산 서씨]] | ||
| + | * [[남양 서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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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7월 12일 (토) 18:06 기준 최신판
고려 혁명가 서언(徐彦)
서언(徐彦) 금나라 사신.
[ 무신정권 기간(1170~1270) 중 일어난 민란 ]
조위총의 난 (趙位寵의亂)
1174년(명종 4)에서 1176년(명종 6)까지 약 3년 동안에 조위총이 무신정권에 대항해 일으킨 반란이다.
당시 서경유수(西京留守)였던 조위총은 국왕을 폐립하고 문신을 학살해 전횡을 일삼던 정중부(鄭仲夫), 이의방(李義方) 등을 타도하고, 자신과 서경(西京)주 01)인의 세력을 펴기 위해 난을 일으켰으나, 윤임첨과 두경승 등이 이끄는 관군의 활약으로 끝내 실패하고 만다.
서경유수 조위총은 1174년에 정중부 등의 무신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서경에서 군사를 일으킨 후 동계(東界)주 02)와 북계(北界)주 03)에 “개경의 중방(重房)에서 북계의 여러 성을 토벌하려고 군사를 발했으니 각각 병마(兵馬)를 규합해 서경으로 모여라.”고 격문을 돌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이로 인해 현담윤(玄覃胤)을 도령(都令)으로 하는 연주성(延州城, 영월 부근)을 제외한 절령(岊嶺, 자비령) 이북의 40여 성이 모두 호응해 무신정권에 반기를 들었다.
서경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란에 대해 개경의 조정에서는 평장사(平章事) 윤인첨(尹鱗瞻)을 원수로 삼아 3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내시예부낭중(內侍禮部郎中) 최균(崔均)을 동북로 지휘사(東北路指揮使)로 삼아 여러 성에 가서 타이르게 하였다. 그러나 절령역에서 윤인첨이 이끄는 정부군은 때마침 부는 폭풍과 폭설 때문에 서경병에게 대패하여 서경병이 개경에 육박할 정도였다. 적에게 포위된 윤인첨은 적과 싸워 죽고자 했으나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 정균(鄭筠)의 만류로 겨우 포위망을 뚫고 돌아왔다.
한편 동계(東界)주 02)에서는 조위총의 장수 김박승(金朴昇)과 조관(趙冠) 등이 화주영(和州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낭장 이거(李網)가 문을 열어주어 병마사 대장군 이의(李儀)와 병마부사(兵馬副使) 최균이 죽었다. 또한 두경승(杜景升)이 동로에서 서로로 길을 돌려 북계의 몇 개 성을 점령했으나 별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왔다.
절령에서 승리한 서경병이 개경으로 쳐들어오자, 이의방은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서경병을 격파하였다. 당시 그는 서경인 상서 윤인미(尹仁美), 대장군 김덕신(金德臣), 장군 김석재(金錫才) 등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목을 베어 저자에 내걸었다. 최숙(崔淑) 등은 적진을 기습해 서경병을 크게 무찔렀다. 이처럼 승세를 타서 대동강까지 쫓아 서경의 성밖에서 진을 쳤으나 이의방이 이끈 군사들은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같은 해 11월 조정에서는 다시 윤인첨을 원수로, 두경승을 후군총관사(後軍摠管使)로 삼아 서경을 공격하게 하였다. 관군이 출정 준비를 하던 혼란 중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의 명을 받은 승려 종감이 이의방을 죽인 일이 발생했다. 명종이 전중감(殿中監) 유응규(庾應圭)와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를 조위총에게 보내 이의방의 일파가 제거되었음을 내세우며 반란군의 명분이 약해지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조위총군의 기세는 여전했다.
그러자 윤인첨은 조위총의 심복들이 있는 연주(漣州, 평남 개천)를 공격하면 서경이 힘을 쓰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연주로 향하였다. 그러나 전황이 별로 순조롭지 못하자, 명종은 전중감 유응규와 급사중 사정유를 서경에 보내어 조서를 내려 타일렀다.
조위총이 항복하기를 청했다가 다시 반발하자, 후군총관사 두경승이 연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다음해 6월에 이르러 윤인첨은 드디어 군사를 서경으로 돌려 성을 포위하고 지구전을 폈다.
주변의 성과 연락이 두절된 조위총은 김존심(金存心)·조규(趙規)를 금나라에 보냈으나 김존심이 중도에서 조규를 죽이고 조정에 항복하였다. 조위총은 다시 서언(徐彦)을 금나라에 보내 정중부·이의방의 의종 시해 사건을 알리고, 절령 이북의 40여 성을 바친다는 조건으로 원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금나라에서는 조건을 수락하지 않고 도리어 서언을 잡아 고려로 보냈다.
그 뒤 서경에서 공방전을 1년 동안 되풀이하다가 1176년(명종 6) 6월에 이르러서 윤인첨은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두경승은 대동문(大東門)을 공격해 서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조위총을 사로잡아 목을 베고 그의 무리 10여 명을 가둠으로써 조위총의 반기는 22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조위총이 죽은 뒤에도 서북민의 항거운동은 완전히 진정되지 않았다. 서경이 함락될 때 도망한 장정(壯丁)들을 중심으로 1177년(명종 7)에 재봉기했다가 1년 6개월 만에 진압되었으며, 1179년(명종 9)에도 서북면지병마사 이부(李富)에 대한 불만으로 다시 봉기했다가 곧 진압되는 등 서북민들은 조위총의 거병을 시작으로 끈질긴 항쟁을 계속했다.
조위총의 난은 정중부와 이의방을 토벌한다는 대의명분이 뚜렷한 거병이었으나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주체적이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위총의 거병은 무신 집권 기간에 각처에서 일어난 민란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趙位寵, 史失世系. 毅宗末, 以兵部尙書, 爲西京留守. 鄭仲夫·李義方等, 弑毅宗, 立明宗, 明宗四年, 位寵起兵, 謀討仲夫等. 遂檄召東北兩界諸城兵曰, “側聞上京重房議, ‘以北界諸城, 率多桀驁, 欲討之.’ 兵已大擧, 豈可安坐, 自就誅戮? 宜各糾合士馬, 速赴西京.” 於是, 岊嶺以北四十餘城, 皆應之, 獨延州閉城固守.
조위총(趙位寵)은 그 가계가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의종 말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다가 서경유수(西京留守)로 나갔다.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이 의종을 죽이고 명종을 왕으로 세우자, 명종 4년(1174) 조위총이 병사를 일으켜 정중부 등을 토벌할 것을 모의한 후 동계·북계의 여러 성에 격문을 돌려 군사를 불러 모았다. “소문에 따르면 개경의 중방에서 ‘북계의 여러 성이 사납고 교만한 무리들[桀驁]을 많이 거느리고 있으므로 토벌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이미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고 하니 우리가 어찌 가만히 앉아서 그냥 죽을 수 있겠는가? 각자 군사와 말을 소집해 빨리 서경으로 달려가야 한다.” 이 격문을 보고 절령(岊嶺 : 황해도 자비령) 이북의 마흔 여 개 성들이 모두 호응했으며, 연주성(延州城 : 지금의 평안북도 영변)만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王遣平章事尹鱗瞻, 率三軍, 擊位寵, 又遣內侍禮部郞中崔均, 爲東北路都指揮使, 諭諸城. 鱗瞻至岊嶺驛, 位寵遣兵急擊, 大破之. 位寵先鋒至京西, 義方擊敗之, 奔還至大同江, 收散卒, 復嬰城固守. 義方久屯城外, 位寵擊却之. 義方兵獲位寵子卿及將軍禹爲善斬之, 傳首于京.
왕이 평장사(平章事) 윤인첨(尹鱗瞻)을 보내 삼군을 이끌고 조위총을 치게 하는 한편, 내시(內侍)·예부낭중(禮部郞中) 최균(崔均)을 동북로 도지휘사(東北路都指揮使)로 삼아 여러 성을 설득하게 하였다. 윤인첨이 절령역(岊嶺驛)에 당도하자 조위총이 군사를 보내어 급습해 크게 격파하였다. 조위총의 선봉이 개경의 서쪽에 도착하자 이번에는 이의방이 공격해 패퇴시키니 대동강(大洞江)까지 되돌아가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다시 성문을 굳게 닫고 지켰다. 이의방이 성 밖에서 오랫동안 진을 치고 있자, 조위총이 공격해 퇴각시켰다. 그러나 이의방의 부대도 조위총의 아들 조경(趙卿)과 장군 우위선(禹爲善)을 사로잡아서 목을 벤 후 머리를 개경으로 보내었다.
明年, 位寵遣兵擊耀德縣. 時義方已伏誅, 王遣殿中監庾應圭·給事中史正儒, 詔位寵曰, “朕因臣民推戴, 奄登大寶, 于今六年. 賴文武臣隣協輔, 獲守丕基, 頃有賊臣, 專擅國政, 多行不義, 害及中外. 民怨兵起, 至於無知小民, 殺傷尤多, 朕甚哀痛. 其賊臣, 已從卿等表奏, 擧義掃蕩. 卿等又請降使宣諭, 嘉乃忠誠. 遣使宣諭, 體朕至意, 更勵忠誠.”
이듬해 조위총이 군대를 보내 요덕현(耀德縣 : 함경남도 요덕)을 공격하였다. 이때 이의방은 이미 사형을 당했으므로 왕은 전중감(殿中監) 유응규(庾應圭)와 급사중(給事中) 사정유(史正儒) 편에 조위총에게 이런 조서를 내렸다. “짐이 신하와 백성의 추대를 받아 갑자기 왕위에 오른 지 여섯 해가 되었다. 문무 신료들이 가까이서 보좌해 준 덕분에 나라를 지켜 왔으나, 최근에 악한 신하가 국정을 농단하고 불의를 많이 행해 그 피해가 내외에 두루 미쳤다. 백성들이 원망하고 반란이 일어나 무지한 백성들이 살상을 많이 당하는 사태가 벌어져 짐이 매우 애통했다. 이제 경들이 표를 올려 건의한 바를 좇아 의병을 일으켜 그 악한 신하를 소탕하였다. 경들이 사자를 보내어 백성들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해 왔으니 그 충성을 가상히 여긴다. 이제 백성들을 타이르는 사자를 보내니 짐의 지극한 뜻을 깨달아 다시 충성을 다하라.”
位寵上表請降, 應圭還, 位寵悔之, 遣精騎, 追至洞仙驛不及. 不勝其憤, 斬其舘吏而還. 尋遣左營郞將徐俊明, 上表賀誅義方, 王留俊明於法靈寺, 唯放校尉徐惟挺還. 上京兵, 圍漣州數月, 漣州請救於位寵. 位寵遣將救之, 上京兵, 從閒道擊之, 斬千五百餘級, 虜二百五十餘人. 又掩擊于莽園, 斬七百餘級, 虜六十餘人.
이에 조위총이 투항하겠다는 표를 올렸으나 유응규가 돌아가자 표를 올린 것을 후회하고 정예 기병을 보내 동선역(洞仙驛 : 황해도 봉산군 동선면)까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기병들은 화가 치민 나머지, 역의 관리(舘吏)들을 마구 죽이고 돌아가 버렸다. 그 얼마 후 조위총이 좌영낭장(左營郞將) 서준명(徐俊明)을 보내어 이의방을 처형한 것을 축하하는 표를 올리자, 왕은 서준명을 법령사(法靈寺)에 억류하고 교위(校尉) 서유정(徐惟挻)만 돌려보냈다. 개경 군사들이 연주(漣州 : 지금의 평안남도 개천시)를 여러 달 포위하니, 연주가 조위총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조위총이 구원군을 보내오자 개경 군사들이 지름길을 통해 기습하여 1천 5백여 명을 죽이고, 2백 50여 명을 사로잡았다. 망원(莽園)에서도 기습을 벌여 7백여 명을 죽이고 60여 명을 사로잡았다.
時毅宗猶未葬, 以位寵聲言義方弑君不葬之罪, 乃發喪, 葬禧陵. 將軍朴存威, 奉使在雲中道, 每誇納釜之事, 雲中人應位寵, 遂斬存威. 鱗瞻攻西京, 位寵食盡, 至啗人屍, 時出挑戰. 鱗瞻堅壁不出, 位寵遣金存心·趙規如金, 奏義方放弑之罪. 存心中道殺規, 來泊禮安江. 王遣中使迎勞, 拜存心內侍閤門祗候, 其軍將六十人, 職賞有差. 位寵聞之, 殺存心妻子.
당시 의종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의방이 임금을 시해하고 장례도 지내지 않은 죄를 조위총이 공개적으로 규탄하자, 비로소 초상을 선포하고 희릉(禧陵 : 의종의 능호)에 장사지냈다. 장군 박존위(朴存威)가 왕의 사자로 운중도(雲中道)에 있으면서 매번 의종의 시신을 넣을 가마솥을 바친 일3)을 떠벌리므로 운중도 사람들이 조위총의 말에 따라 박존위의 목을 베어 버렸다. 윤인첨이 서경을 공격하자 조위총의 군사들은 양식이 떨어져 사람의 시체까지 먹으면서도 때때로 성을 나와 싸움을 걸어왔다. 윤인첨이 군영을 굳게 방어하면서 응전하지 않자, 조위총은 김존심(金存心)과 조규(趙規)를 금나라에 보내어 이의방이 의종을 내쫓고 죽인 죄를 알리게 하였다. 김존심이 도중에 조규를 죽이고 예안강(禮安江)으로 와서 정박하자. 왕은 중사(中使)를 보내어 환영한 후 그를 내시합문지후(內侍閤門祗候)에 임명하고 군사와 장수 60명에게 관직과 상을 차등 있게 주었다. 조위총이 그 소문을 듣고는 김존심의 처와 자식을 죽여 버렸다.
位寵復遣徐彦等, 如金上表曰, “前王本非避讓, 大將軍鄭仲夫, 郞將李義方弑之. 臣位寵請以岊嶺以西至鴨綠江四十餘城內屬, 請兵助援.” 金主執送彦等東京路都摠管府, 牒寧德城云, “西京留守趙位寵, 三次遣使九十六人, 齎告奏表文等事.
조위총이 다시 서언(徐彦) 등을 금나라에 보내어 이런 표를 올렸다. “전 왕은 애당초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대장군 정중부, 낭장 이의방에 의해 살해당했습니다. 신 조위총은 절령(岊嶺)의 서쪽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는 마흔 여 곳의 성을 들어 귀부하겠으니 원병을 보내 도와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금나라 임금은 서언 등을 잡아서 동경로도총관부(東京路都惣管府)로 압송하고, 영덕성(寧德城 : 평안북도 의주군 부근)에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내게 했다. “서경유수 조위총이 세 차례에 걸쳐 사신 아흔여섯 명을 보내어 사정을 보고하는 표문을 올린 바 있다.
今勘得所遣人徐彦等狀稱, ‘大定十年八月, 前王遊普賢寺, 大將軍鄭仲夫, 郞將李義方等, 執前王及子孫, 送海島, 立前王弟翼陽公爲王, 飾以因病讓位, 上表大朝. 大定十三年, 仲夫等遣人殺前王及子孫官僚等. 大定十四年, 位寵上表請王誅仲夫等, 今年正月, 王下詔諭賊臣等已誅. 復有仲夫子筠, 殺義方等, 不告國王, 領兵三萬餘人, 攻西京相戰, 至今未決勝否. 今年六月, 位寵與北界四十餘城, 欲屬大朝, 遣義州都領崔敬若等, 齎牒婆速路摠管府公文. 至義州關門, 爲鄭白臣等所殺, 又筠等軍馬遮路. 以此, 遣大使金存心·趙規等, 各三十餘人, 泛海來奏, 不知消息節次. 再遣彦等, 其欲屬大朝及請兵問罪等事.’ 委是端的欽奉帝命, 位寵陳乞事, 則非大國所容. 將彦等付彼國施行. 其彦等衣甲諸物, 差官交割.”총
지금 그가 보낸 서언 등이 휴대한 문서를 살펴보면, 그 내용은 이러하다. ‘대정(大定 : 금나라 세종의 연호) 10년(1170) 8월 전 왕이 보현사(普賢寺)에 놀러 가자 대장군 정중부와 낭장 이의방 등이 전 왕 및 그 자손을 붙잡아 바닷섬으로 보낸 다음, 전 왕의 동생 익양공(翼陽公 : 명종)을 세워 왕으로 삼고는, 병으로 양위한 것처럼 꾸며 금나라에 표를 올렸습니다. 대정 13년에는 정중부 등이 사람을 보내어 전 왕과 그 자손 및 관료들을 죽였습니다. 대정 14년에는 저 조위총이 국왕에게 표를 올려 정중부 등을 처형할 것을 청하자, 금년 정월에 왕이 악한 신하를 이미 사형에 처했다는 조서를 내렸습니다. 또 정중부의 아들 정균(鄭筠)이 이의방 등을 죽인 후 국왕에게 보고도 않고 군사 3만여 명을 동원해 서경을 공격해 옴으로써 전투가 벌어졌으나 지금까지 승부를 내지 못했습니다. 금년 6월 저 조위총은 북계(北界) 마흔 여 개의 성들과 함께 상국에 복속하고자, 의주도령(義州都領) 최경약(崔敬若) 편에 파속로총관부(婆速路惣管府)에 공문을 보낸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의주(義州)의 관문에 이르러 정백신(鄭白臣) 등에게 살해되었으며, 또한 정균 등의 군대가 금나라로 가는 길을 차단했습니다. 이 때문에 대사(大使) 김존심과 조규 등 각 서른 여명을 바닷길로 금나라에 보내 사정을 아뢰게 했는데, 아직 회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다시 서언 등을 보내어 금나라에 복속하고자 하는 것과 고려의 죄를 따지는 군대의 파견을 요청합니다.’ 이것은 결국 금나라 황제의 명령을 따르겠다는 말이나, 조위총이 요청해 온 일은 우리 금나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 서언 등을 고려로 보내고 그들의 의복과 무기 등은 관리를 보내어 인도한다.”
六年, 位寵使人, 詐爲居士服, 請兵於西北州鎭, 至靜州被執. 位寵與上京兵戰, 佯敗走, 上京兵逐至龍興德部, 位寵回兵擊之, 上京兵, 死者甚多. 麟州人康夫·祿升·鄭臣等, 殺防守將軍蔡允和, 王遣內侍祗候崔存往諭之. 未幾, 夫等又殺義州分道將軍尹光輔, 防禦判官李彦升, 以應位寵.
명종 6년(1176) 조위총이 부하에게 거사(居士)의 옷을 입혀 변장시킨 다음 서북지방의 주와 진으로 보내 군사를 요청하게 하다가 정주(靜州 : 평안북도 의주군 고성)에서 붙잡혔다. 조위총이 개경 군사들과 싸우다가 거짓으로 패주하자, 개경 군사들이 용흥(龍興 : 지금의 황배북도 황주군)의 덕부(德部)까지 추격했으나 조위총이 군사를 돌려 격파하니 개경 군사들의 전사자가 매우 많았다. 인주(麟州 : 의주군) 사람 강부(康夫)·녹승(祿升)·정신(鄭臣) 등이 방수장군(防守將軍) 채윤화(蔡允和)를 살해하자, 왕이 내시지후(內侍祗候) 최존(崔存)을 보내어 그들을 회유했다. 그러나 얼마 후 강부 등은 다시 의주분도장군(義州分道將軍) 윤광보(尹光輔)와 방어판관(防禦判官) 이언승(李彦升)을 살해하고 조위총에게 내응하였다.
位寵遣人, 署諸城酋豪官. 麟州都領中郞將洪德, 謀執位寵所遣人以拒, 夫等袖刃至德家, 欲害之, 德伏兵於門, 斬之. 鱗瞻攻西京通陽門, 後軍摠管杜景升攻大同門破之, 城中大潰. 遂殺位寵, 函其首來獻, 梟于市, 又執送位寵妻孥.
조위총이 사람을 보내어 여러 성의 추장(酋長)과 토호들에게 관직을 부여했다. 인주도령·중랑장(麟州都令中郞將) 홍덕(洪德)이 조위총의 사자를 체포한 후 저항을 시도하자, 강부 등이 소매 속에 칼을 숨기고 그의 집에 가 살해하려고 했으나, 홍덕이 문에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그들을 죽였다. 이어 윤인첨이 서경의 통양문(通陽門)을 공격하고 후군총관(後軍惣管) 두경승(杜景升)이 대동문(大同門)을 공격해 격파하니 성안이 큰 혼란에 빠졌다. 마침내 조위총을 죽이고 그 머리를 함에 넣어 왕에게 바치고 조위총의 처자도 잡아 압송하자, 조정에서는 조위총의 머리를 큰 거리에 전시했다.
房瑞鸞, 宣州鄕貢進士. 趙位寵起兵, 西北諸城皆附. 瑞鸞謂其兄孝珍·得齡曰, “位寵脅誘諸城土豪, 僞署官職, 令收兵赴西京, 吾曹亦與其中. 吾婦翁尹仲瞻, 以兵馬判官, 在從兄鱗瞻麾下, 壻攻婦翁, 情所不忍. 况位寵所謀不軌, 終必自敗, 兄宜熟計.” 孝珍等然之,
방서란(房瑞鸞)은 선주(宣州 : 선천군)의 향공진사(鄕貢進士)였다.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고 서북지방의 여러 성이 다 그의 편에 붙어버리자, 방서란은 형 방효진(房孝珍)·방득령(房得齡)더러 이렇게 말했다. “조위총이 여러 성의 토호들을 협박하고 회유해 거짓 관직을 준 다음 군사들을 수습해 서경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하기에, 우리도 그중에 끼어버렸습니다. 제 장인 윤중첨(尹仲瞻)이 병마판관(兵馬判官)으로 사촌 형인 윤인첨(尹鱗瞻)의 휘하에 있는데, 사위인 제가 장인을 공격하는 것은 인정상 차마 하지 못할 일입니다. 또한 조위총이 도모한 반란은 반드시 끝내 자멸하고 말 것이니 형들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방효진 등이 옳은 말이라 여기고,
夜密誘州人曰, “位寵始以誅賊臣爲名, 故諸城響應, 稱兵向闕. 及至郊幾, 交鋒輒敗, 官軍追擊, 僵屍相枕. 欲收餘燼, 復謀旅拒, 氣勢已沮, 不可復振. 所恃者, 惟險固耳, 若王師一朝拔西京, 移軍臨之, 闔城必爲虀粉. 且位寵之志, 不止討賊, 若不改圖, 恐爲同惡, 流醜後世. 今欲率先倡義, 去逆効順, 於諸君意何?”
밤에 몰래 선주 사람들을 설득했다. “조위총이 애초에 반역한 신하들을 죽인다는 명분을 내세웠기 때문에 여러 성이 호응하고 군사를 동원해 대궐로 향했다. 그러나 개경 근교에서 교전하는 족족 패배를 당했으며, 관군의 추격에 시체가 길을 메웠다. 패잔병들을 수습해 다시 대항하려고 한들 이미 사기가 꺾여 버렸으니 다시 군세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믿는 것은 오직 험한 지세와 견고한 성뿐이나, 만약 관군이 하루아침에 서경을 함락시킨 후 이동하여 이곳으로 온다면 온 성이 산산조각이 날 것이 뻔하다. 또 조위총의 뜻이 적도들을 토벌하는 데 그치지 않으니, 만약 우리가 마음을 고쳐먹지 않는다면 같은 악당이 되어 추한 이름을 후세에 남길까 두렵다. 이제 솔선 의거해 역심을 버리고 귀순하려 하니 그대들의 뜻은 어떠한가?”
州人皆諾. 有都領郞將義儒, 受位寵署爲將軍, 獨不可. 孝珍狙射斃之, 卽遣人告義州. 義州人亦殺位寵所置將景綽等以應, 遣人齎首, 從閒道飛報行營, 諸城聞之, 皆罷兵. 事聞, 王嘉之, 賜孝珍爵散員, 瑞鸞以同正, 屬內侍, 得齡留本州爲戶長. 未幾, 州人嫉孝珍獨受爵, 遂殺得齡及其母.
이 말을 들은 선주 사람들은 따르기로 했다. 도령낭장(都領郎將) 의유(義儒)란 자는 조위총의 임명을 받아 장군이 되었으므로 홀로 반대하자, 방효진이 기회를 틈타 활로 쏘아 죽인 다음 즉시 사람을 보내어 의주(義州)에 알렸다. 의주 사람들도 조위총이 임명한 장군 경작(景綽) 등을 죽이고서 호응하는 한편, 사람 편에 머리를 들려 지름길로 관군의 행영(行營)에 급히 알려 왔으며, 이 소식을 들은 다른 성들도 모두 무장을 해제했다. 이 일을 들은 왕이 기뻐하며 방효진에게 산원(散員)의 벼슬을 주고, 방서란은 동정(同正)으로 내시(內侍)에 배속시켰으며, 방득령은 본 고을에 머물러 호장(戶長)을 하게 했다. 그러나 얼마 후 선주 사람들이 방효진 혼자 벼슬을 받은 것을 시기해 방득령과 그 모친을 죽여 버렸다.
朴齊儉, 明宗時, 以大將軍, 爲西北面兵馬使. 趙位寵旣敗, 餘衆復聚, 分軍爲三, 有思進·軾端·進國者, 爲中軍行首, 戒訓爲指諭, 金甫爲前軍行首. 光秀爲後軍行首. 散居嘉·渭·泰·漣·順等州山谷首尾行劫, 大爲民患. 焚慈·肅二州, 屠妙德·香山諸寺, 王遣兵討之, 屢戰失利.
박제검(朴齊儉)은 명종 때 대장군으로 있으면서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조위총(趙位寵)이 패망한 후 그 잔당들이 다시 모여서 전군을 삼군으로 재편성했는데, 사진(思進)·식단(軾端)·진국(進國)이란 자는 중군 행수(中軍行首), 계훈(戒訓)은 중군지유(中軍指諭), 김보(金甫)는 전군 행수, 광수(光秀)는 후군 행수가 되었다. 이들은 가주(嘉州 : 가산)·위주(渭州 : 영변군)·태주(泰州 : 태천)·연주(漣州 : 개천시)·순주(順州 : 순천) 등 각 주의 산골짜기에 흩어져 살면서 일사불란하게 약탈을 자행하여 백성들의 큰 근심거리가 되었다. 적도들이 자주(慈州 : 순천시)·숙주(肅州 : 숙천)를 불지르고 묘덕사(妙德寺)·향산사(香山寺) 등의 사원을 도륙하는 지경에 이르자 왕이 군대를 보내어 토벌하게 했지만, 누차의 전투에서도 승리하지 못했다.
齊儉始至營, 與錄事金重甲謀, 部分諸校, 發興化·雲中道兵, 爲掩襲計. 賊依阻山林, 無定居, 諸郡人又多爲賊耳目, 軍中動靜, 輒先知之, 戰始交, 輒敗北, 士卒氣沮, 逗留不進, 裁留五百人爲聲援, 引還. 賊乘勝攻寧州靈化寺, 驅僧爲兵, 進攻漣州, 賊勢轉盛.
박제검이 처음 병영에 부임하자 녹사(錄事) 김중갑(金重甲)과 함께 작전을 세우고, 장교들을 부대별로 나누어 흥화도(興化道)·운중도(雲中道)로 진격해 적도를 기습 공격하기로 했다. 그러나 적도들은 일전한 거처가 없이 숲을 근거지로 삼고 있었고 고을 백성들이 또한 그들에게 정보를 제공해 적도들이 관군의 동정을 먼저 파악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싸우기만 하면 패배를 거듭했으며, 병사들의 사기도 저하되어 제자리에서 조금도 진군하지 못했으므로 응원군 5백 명만 남겨두고 귀환해버렸다. 적이 승세를 타고 영주(寧州 : 안주시)의 영화사(靈化寺)를 공격해 승려들을 내몰아 군사로 삼고서 연주지역으로 진공하니 적도들의 세력은 더욱 왕성해졌다.
然其遊寇日久, 閭閻無塢壁者, 劫掠旣盡, 大城皆堅守, 未易猝拔. 由是, 漸就飢窘, 謀欲降. 齊儉聞之, 遣人招誘, 諸屯賊相率來降. 齊儉每見降者, 輒拊循之曰, “汝等亦皆吾赤子.” 開倉賑之, 前後凡六百餘斛. 乃聽其所欲, 分處龜·漣等州, 使之安業. 給光秀等傳騎送京, 王以光秀爲校尉, 金甫攝校尉, 思進·軾端·戒訓爲隊正. 獨進國不降, 率其黨百五十餘人, 欲投女眞, 齊儉遣兵盡擒斬之. 龜州別將東方甫等十七人, 與賊交關往來, 皆誅之.
그러나 떠돌아다니며 약탈하는 행태가 오래 지속되자, 방어시설이 없는 민가는 거의 다 털려버렸으며, 큰 성은 모두 관군이 굳게 수비하므로 쉽사리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점점 수세에 몰리고 굶주리게 된 적도들은 항복할 계획을 꾸미게 되었다. 박제검이 이 소식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회유하자 여러 곳에 진을 쳤던 적도들이 서로 이끌고 투항해 왔다. 박제검이 투항해 온 자들을 볼 때마다, “너희들 또한 모두 임금의 적자(赤子)들이다.”라고 위무하며, 창고를 열어서 전후 모두 6백여 섬의 곡식을 나누어주었다. 또 그들의 소원대로, 귀주(龜州 : 구성시)·연주 등지에 분산 거주시켜 편안히 생업에 종사하도록 조치했다. 광수(光秀) 등에게는 역마를 제공해 개경에 보내니, 왕이 광수를 교위(校尉)로, 김보를 섭교위(攝校尉)로 삼았으며, 사진·식단·계훈에게는 대정(隊正) 벼슬을 주었다. 진국만이 항복하지 않은 채 일당 1백 5십여 명을 이끌고 여진(女眞)에게 투항하고자 하므로 박제검이 군사를 보내어 모두 사로잡은 다음 처형시켰다. 또 귀주별장(龜州別將) 동방보(東方甫) 등 17명이 적도들과 결탁해 왕래했으므로 모두 잡아 처형했다.
齊儉後知御史臺事, 其子葆光, 年少輕薄, 初補權務氣驕. 道遇李紹膺妻, 見從婢有持薑者, 求之不與, 葆光歐辱之. 紹膺妻大怒, 率僮僕, 持刀杖, 至齊儉家呼噪, 欲殺葆光, 葆光及家人皆逃匿. 紹膺女壻, 慶大升弟也, 紹膺妻憑慶勢, 訴重房, 重房奏, “葆光道辱宰相妻, 大無禮. 宜置於法.” 事下重房治之, 葆光竟不出, 齊儉坐免. 歷抵諸將家乞憐, 諸將哀之, 請復其官, 王許之.
박제검은 뒤에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가 되었는데, 그 아들 박보광(朴葆光)은 나이가 적고 경박한 자로, 처음 권무(權務)에 임명되자 방자하게 행동했다. 길에서 이소응(李紹膺)의 처와 마주쳤는데, 그 여종이 가진 생강을 보고 탐을 내었으나 주지 않자 박보광이 구타하고 욕질을 했다. 이소응의 아내가 대로해 하인들을 칼과 몽둥이로 무장시킨 다음 박제검의 집으로 가 마구 고함을 지르며 박보광을 죽이려고 하니, 박보광과 집안사람들이 모두 도망해 숨었다. 이소응의 사위는 경대승(慶大升)의 동생으로, 이소응의 처가 경대승의 권세에 기대어 중방(重房)에 호소하니 중방에서는, “박보광이 길에서 재상의 처에게 치욕을 가한 것은 크게 무례한 행위이니 마땅히 법으로 처치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사건을 중방에 회부해 죄를 다스리게 하였는데 박보광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으며, 박제검은 면직되었다. 그 후 장군들의 집을 찾아다니며 애걸하자 장군들이 불쌍히 여겨 복직을 건의했으며,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奇卓誠, 幸州人. 美容儀, 善射御. 初補校尉, 毅宗好馳馬擊毬, 擢爲牽龍, 常在王側. 善事權貴, 驟遷衛將軍, 明宗初, 累轉叅知政事. 趙位寵起兵, 卓誠爲副元帥禦之, 及還, 判兵部事, 進門下侍郞平章事判吏部事.
기탁성(奇卓誠)은 행주(幸州) 사람이다. 용모와 행동이 단아했고,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다. 처음 교위(校尉)에 임명되었는데, 의종이 승마와 격구(擊毬)를 좋아했으므로 그를 견룡군(牽龍軍)으로 발탁해 늘 측근에서 모시게 했다. 또 권세가들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재빨리 위장군(衛將軍)으로 승진했으며, 명종 초에는 여러 번 승진해 참지정사(叅知政事)가 되었다. 조위총(趙位寵)이 반란을 일으키자, 기탁성은 부원수(副元帥)가 되어 이를 방어했으며, 귀환해서는 판병부사(判兵部事)로 있다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판이부사(判吏部事)로 승진하였다.
有金平者, 少有文名, 金甫當之亂, 妻父韓彦國被戮, 平携妻子, 隱於昇平郡. 及卓誠秉政, 以平有才, 擢爲直史舘. 卓誠貪財賣官, 由是, 賢者屛跡, 讒佞競進. 家臣高忠全·李仁齡, 皆姦黠貪鄙, 惡聲遠播. 九年卒. 廣平宮久廢無主, 卓誠欲請王居之. 其妻諫止之, 不聽居數月而死. 後王論討位寵功, 贈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守太師門下侍中, 圖形閣上.
김평(金平)이란 자는 젊은 시절부터 문명이 높았는데, 김보당의 병란에 장인 한언국(韓彦國)이 피살되자 처자를 데리고 승평군(昇平郡 : 전라남도 순천시)에 숨어 살았다. 기탁성은 정권을 잡자 김평의 재능을 높이 사 직사관(直史館)으로 발탁했다. 그러나 기탁성은 재물 욕심이 많아 벼슬을 팔곤 했으므로, 어진 이들이 자취를 감추고 남을 모함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다투어 관직에 진출했다. 그중 가신(家臣) 고충전(高忠全)과 이인령(李仁齡)은 모두 간교하고 탐욕스러워 그 악명이 널리 퍼졌다. 기탁성은 명종 9년(1179)에 죽었다. 광평궁(廣平宮)의 주인이 없어 오래 폐가로 버려지자 그가 왕에게 부탁해 그곳에 살려고 했다. 그의 처가 그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말했으나, 듣지 않고 수개월 동안 광평궁에서 살다가 죽었다. 뒤에 왕이 조위총의 반란을 평정한 공을 기려 추충협모좌리동덕공신(推忠協謀佐理同德功臣)·수태사(守太師)·문하시중(門下侍中)을 추증하고 공신각에 초상을 그려 안치했다.
洪仲方, 起自行伍, 鄭仲夫廢毅宗立明宗, 仲方與有力驟拜大將軍. 性謇直不阿, 每面折人過, 王器之, 人亦倚重. 時武散官·檢校將軍以下散員同正以上聚議, 欲奪處東班權務官. 重房·臺省畏衆口, 莫敢誰何, 仲方獨曰, “國家設官分職, 唯卿監外, 武臣不兼文官. 自庚寅以後, 吾儕得處臺省, 布列朝班. 校尉·隊正許著幞頭, 西班散職, 差任外官, 固非先王之制. 若又遽奪權務官, 其如東·西定制何? 吾寧死不從.”
홍중방(洪仲方)은 군졸[行伍] 출신으로 정중부(鄭仲夫)가 의종을 폐위시키고 명종을 옹립할 당시 조력했던 덕분에 갑자기 대장군으로 뛰어올랐다. 성품이 강직하여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고, 매양 면전에서 남의 잘못을 책망하므로 왕이 그를 인재로 여기게 되었고 사람들로부터도 신뢰를 받았다. 당시 산관(散官)인 검교장군(檢校將軍) 이하 산원(散員)·동정(同正) 이상의 무반들이 모여 문반들이 맡고 있던 권무관(權務官) 직을 빼앗고자 의논했다. 중방(重房)과 대성(臺省)은 무반들이 떠들어대자 겁을 내어 감히 제지하지 못했지만 홍중방만 홀로 반대했다. “나라에서 관직을 제정할 때 경(卿)과 감(監) 외에는 무반들이 문반을 겸직하지 못하게 했는데 경인(의종 24, 1170)년 이후 우리 무반들이 대성에 들어가게 되어 조정의 반열에 포진하게 되었다. 또 교위(校尉)와 대정(隊正)도 복두(幞頭)를 쓰는 것이 허용되고, 무반의 산직(散職)이 지방 관직으로 나가게 된 것은 도저히 선왕의 제도라 할 수 없다. 만약 또 권무관까지 빼앗는다면 문반과 무반을 구분한 제도에 비추어볼 때 어찌 옳다고 하겠는가? 나는 차라리 죽을지언정 따르지 못하겠다.”
議遂寢. 於是, 西班散職, 群聚於路, 每見達官, 控訴不已. 一日, 遇仲方, 遮道慢罵, 仲方攘臂跋馬排突. 至重房曰, “吾今日幾死矣. 下之陵上, 至如是耶?” 乃密謀, 捕首謀者四五人配島. 又流其黨十餘人, 時議尤重之. 累官至守司空尙書左僕射, 掌外官·長吏之職, 進退予奪, 惟意所恣. 又蓄嬖妾, 嗜利者附之, 爭納賄賂. 九年卒.
이에 그 주장이 들어가 버렸다. 이렇게 되자 무반의 산직(散職)들이 길에서 무리를 지어 고관들을 볼 때마다 길을 막고 호소하기를 마지않았다. 하루는 그자들이 홍중방과 마주치자 길을 막고 욕설을 퍼부으니, 홍중방이 팔을 떨치고 말을 채찍질하여 그들을 밀치고 마구 내달았다. 중방에 도착하자, “내가 오늘 거의 죽을 뻔하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능욕하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 하며 탄식했다. 그리고 은밀히 계획을 꾸며 주모자 네댓 명을 체포해 섬으로 유배시켰다. 또 일당 십여 명을 유배하니, 당시 여론이 그를 더욱 추앙했다. 거듭 승진해 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자 외관(外官)·장리(長吏)들을 관장하면서 임면과 상벌을 오직 자기 뜻대로 자행했다. 또 애첩을 두었는데, 사리를 탐하는 자들이 다투어 뇌물을 바치며 아부했다. 명종 9년(1179)에 죽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