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전라북도 고창 지역을 배경으로 조선시대 의녀 서장금의 성공담을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 「대장금」은 중종[재위 1506~1544]의 신임을 받...)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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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궁에서 쫓겨나 신분을 숨기고 백정으로 살아가는 의금부 군관 서천수[박찬환]와 수라간 나인 박씨[김혜선] 사이에서 장금[이영애]이 태어난다. 1506년(연산군 12) 장금은 부모를 여읜 뒤 어머니 박씨의 유품과 유서를 물려받고, 1508년(중종 3) 생각시로 궁에 들어간다. 함께 입궁한 최고상궁 최 상궁[견미리]의 조카인 최금영[홍리나]과 경쟁하며 고달픈 수라간 생활을 하지만 요리의 스승 격인 한 상궁[양미경]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는다. 장금을 중심으로 궐 안 하층민들의 갖가지 애환과 갈등이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가운데 최 상궁과 그 일당의 음모로 장금은 궁에서 쫓겨나 제주감영의 관비 신세가 된다. 장금은 제주에서 관비 생활을 하며 의술 공부를 시작하고 세월이 흐른 뒤 제주에서 여의(女醫)로 이름을 얻는다. 우연한 기회에 제주에 침범한 왜구 수장의 병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지만 머지않아 방면되고, 장금의 실력과 심성을 알고 있는 내의원 의관 정운백의 추천으로 의녀가 될 결심을 한다. 당당히 일등으로 의녀 시험에 합격하여 의녀로서 궁으로 돌아온 장금은 왕의 승은을 입어 숙원이 된 최금영의 견제와 시기로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동병이치(同病異治)를 주장하며 공주의 병을 완치시키고 치료를 거부하는 자순대부의 마음을 돌려 치료를 받게 하는 등 활약상을 보여 준다. 중종은 이런 장금에게 감동하여 실력 있는 의녀에게는 시침과 탕액을 할 수 있도록 교지를 내린다. 이로써 장금은 조선 최초로 시침과 탕액을 허가받은 의녀가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장금은 중종이 앓고 있던 지병의 원인을 밝혀내 어의를 제치고 중종의 주치의가 된다. 장금의 일에 대한 열정과 어진 심성에 매력을 느낀 중종은 장금에게 참봉을 제수하고 신분을 양반으로 승격시키려 하지만 조정 중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마침내 중종은 장금과의 독대에서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너를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을 털어놓고 장금을 자신의 주치의로서만 있도록 한다. 「대장금」에서 전라북도 고창군이 배경이 된 곳은 최 상궁이 박씨의 무덤을 찾아왔던 장면을 촬영한 선운사 부근의 돌무덤, 장금과 한 상궁이 장금의 어머니인 박씨의 무덤이 있는 곳을 찾아왔던 장면을 촬영한 선운사 진흥굴, 죄를 짓고 도망치는 최판술이 배를 타려는 장면을 촬영한 선운사 인근의 주진천[인천강] 등이다. [의의와 평가] 「대장금」은 조선 중종 때 ‘대장금’이라는 대단한 칭호까지 받은 서장금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있던 한 여성의 의미 있는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방영 당시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일대에서 일부 촬영이 되면서 고창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창 선운사 일대를 둘러보며 「대장금」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으며, 외국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싶은 지역으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궁에서 쫓겨나 신분을 숨기고 백정으로 살아가는 의금부 군관 서천수[박찬환]와 수라간 나인 박씨[김혜선] 사이에서 장금[이영애]이 태어난다. 1506년(연산군 12) 장금은 부모를 여읜 뒤 어머니 박씨의 유품과 유서를 물려받고, 1508년(중종 3) 생각시로 궁에 들어간다. 함께 입궁한 최고상궁 최 상궁[견미리]의 조카인 최금영[홍리나]과 경쟁하며 고달픈 수라간 생활을 하지만 요리의 스승 격인 한 상궁[양미경]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는다. 장금을 중심으로 궐 안 하층민들의 갖가지 애환과 갈등이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가운데 최 상궁과 그 일당의 음모로 장금은 궁에서 쫓겨나 제주감영의 관비 신세가 된다. 장금은 제주에서 관비 생활을 하며 의술 공부를 시작하고 세월이 흐른 뒤 제주에서 여의(女醫)로 이름을 얻는다. 우연한 기회에 제주에 침범한 왜구 수장의 병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지만 머지않아 방면되고, 장금의 실력과 심성을 알고 있는 내의원 의관 정운백의 추천으로 의녀가 될 결심을 한다. 당당히 일등으로 의녀 시험에 합격하여 의녀로서 궁으로 돌아온 장금은 왕의 승은을 입어 숙원이 된 최금영의 견제와 시기로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동병이치(同病異治)를 주장하며 공주의 병을 완치시키고 치료를 거부하는 자순대부의 마음을 돌려 치료를 받게 하는 등 활약상을 보여 준다. 중종은 이런 장금에게 감동하여 실력 있는 의녀에게는 시침과 탕액을 할 수 있도록 교지를 내린다. 이로써 장금은 조선 최초로 시침과 탕액을 허가받은 의녀가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장금은 중종이 앓고 있던 지병의 원인을 밝혀내 어의를 제치고 중종의 주치의가 된다. 장금의 일에 대한 열정과 어진 심성에 매력을 느낀 중종은 장금에게 참봉을 제수하고 신분을 양반으로 승격시키려 하지만 조정 중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마침내 중종은 장금과의 독대에서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너를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을 털어놓고 장금을 자신의 주치의로서만 있도록 한다. 「대장금」에서 전라북도 고창군이 배경이 된 곳은 최 상궁이 박씨의 무덤을 찾아왔던 장면을 촬영한 선운사 부근의 돌무덤, 장금과 한 상궁이 장금의 어머니인 박씨의 무덤이 있는 곳을 찾아왔던 장면을 촬영한 선운사 진흥굴, 죄를 짓고 도망치는 최판술이 배를 타려는 장면을 촬영한 선운사 인근의 주진천[인천강] 등이다. [의의와 평가] 「대장금」은 조선 중종 때 ‘대장금’이라는 대단한 칭호까지 받은 서장금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있던 한 여성의 의미 있는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방영 당시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일대에서 일부 촬영이 되면서 고창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창 선운사 일대를 둘러보며 「대장금」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으며, 외국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싶은 지역으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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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
| +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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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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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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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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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2)|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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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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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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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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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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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 ||
| + |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 ||
| + |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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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이섭대천]](利涉大川) == | ||
| + |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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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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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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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 ||
| + |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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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 | ||
| + |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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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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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효양산 은선사]] == | ||
| + |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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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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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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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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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희성당]](希聖堂) == | ||
| + |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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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같이 보기 == | ||
| + | * [[이천 서씨]] | ||
| + | * [[대구 서씨]] | ||
| + | * [[달성 서씨]] | ||
| + | * [[부여 서씨]] | ||
| + | * [[연산 서씨]] | ||
| + | * [[남양 서씨]] | ||
| + | * [[당성 서씨]] | ||
| + | * [[봉성 서씨]] | ||
| + | * [[절강 서씨]] | ||
| + | * [[중국 서씨]] | ||
| + | * [[일본 서씨]] | ||
2025년 8월 24일 (일) 22:47 기준 최신판
전라북도 고창 지역을 배경으로 조선시대 의녀 서장금의 성공담을 다룬 텔레비전 드라마.
「대장금」은 중종[재위 1506~1544]의 신임을 받은 의녀(醫女)였던 서장금(徐長今)의 삶을 재구성한 픽션 드라마이다. 50% 넘는 시청률을 기록하였으며, 중국·대만·일본·미국 등지에도 수출되어 많은 인기를 끌었다. 드라마의 일부 내용이 전라북도 고창군의 선운사 진흥굴과 도솔암 등지에서 촬영되었다.
남존여비 사상이 팽배한 봉건 시대에 집념과 의지로 궁중 최고의 요리사가 되고, 우여곡절 끝에 조선 최고의 의녀가 되어 내의원의 수많은 남자들을 물리치고 임금의 유일한 여자 주치의가 되었던 역사상 실존 인물인 서장금의 일대기를 다루었다. MBC에서 총 56부작으로 제작하여 2003년 9월 15일부터 2004년 3월 30일까지 매주 월요일과 화요일에 방영하였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를 겪으면서 궁에서 쫓겨나 신분을 숨기고 백정으로 살아가는 의금부 군관 서천수[박찬환]와 수라간 나인 박씨[김혜선] 사이에서 장금[이영애]이 태어난다. 1506년(연산군 12) 장금은 부모를 여읜 뒤 어머니 박씨의 유품과 유서를 물려받고, 1508년(중종 3) 생각시로 궁에 들어간다. 함께 입궁한 최고상궁 최 상궁[견미리]의 조카인 최금영[홍리나]과 경쟁하며 고달픈 수라간 생활을 하지만 요리의 스승 격인 한 상궁[양미경]의 보호와 보살핌을 받는다. 장금을 중심으로 궐 안 하층민들의 갖가지 애환과 갈등이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가운데 최 상궁과 그 일당의 음모로 장금은 궁에서 쫓겨나 제주감영의 관비 신세가 된다. 장금은 제주에서 관비 생활을 하며 의술 공부를 시작하고 세월이 흐른 뒤 제주에서 여의(女醫)로 이름을 얻는다. 우연한 기회에 제주에 침범한 왜구 수장의 병을 치료했다는 이유로 한양 의금부로 압송되지만 머지않아 방면되고, 장금의 실력과 심성을 알고 있는 내의원 의관 정운백의 추천으로 의녀가 될 결심을 한다. 당당히 일등으로 의녀 시험에 합격하여 의녀로서 궁으로 돌아온 장금은 왕의 승은을 입어 숙원이 된 최금영의 견제와 시기로 어려움을 겪는다. 하지만 동병이치(同病異治)를 주장하며 공주의 병을 완치시키고 치료를 거부하는 자순대부의 마음을 돌려 치료를 받게 하는 등 활약상을 보여 준다. 중종은 이런 장금에게 감동하여 실력 있는 의녀에게는 시침과 탕액을 할 수 있도록 교지를 내린다. 이로써 장금은 조선 최초로 시침과 탕액을 허가받은 의녀가 된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장금은 중종이 앓고 있던 지병의 원인을 밝혀내 어의를 제치고 중종의 주치의가 된다. 장금의 일에 대한 열정과 어진 심성에 매력을 느낀 중종은 장금에게 참봉을 제수하고 신분을 양반으로 승격시키려 하지만 조정 중신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힌다. 마침내 중종은 장금과의 독대에서 “남자로서, 인간으로서 너를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라는 마음을 털어놓고 장금을 자신의 주치의로서만 있도록 한다. 「대장금」에서 전라북도 고창군이 배경이 된 곳은 최 상궁이 박씨의 무덤을 찾아왔던 장면을 촬영한 선운사 부근의 돌무덤, 장금과 한 상궁이 장금의 어머니인 박씨의 무덤이 있는 곳을 찾아왔던 장면을 촬영한 선운사 진흥굴, 죄를 짓고 도망치는 최판술이 배를 타려는 장면을 촬영한 선운사 인근의 주진천[인천강] 등이다. [의의와 평가] 「대장금」은 조선 중종 때 ‘대장금’이라는 대단한 칭호까지 받은 서장금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해 그동안 역사에 묻혀 있던 한 여성의 의미 있는 삶을 조명한 작품이다. 방영 당시 50%가 넘는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가 전라북도 고창군 선운사 일대에서 일부 촬영이 되면서 고창을 알리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고창 선운사 일대를 둘러보며 「대장금」의 추억을 되새기고 있으며, 외국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싶은 지역으로 꼽히고 있기도 하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효양산 은선사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