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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부호 서상호(徐相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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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의 부호 [[서상호(통영)|서상호]](徐相灝)
  
서상호(徐相灝, 1888년 ~ 1964년 12월 20일[1])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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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통영)|서상호]](徐相灝, 1888년 ~ 1964년 12월 20일[1])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남은행 취체역을 맡았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남은행 취체역을 맡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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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5월 30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국회의원(통영군 갑) 당선
 
1950년 5월 30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국회의원(통영군 갑)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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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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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의 주도로 '시대일보'가 창간되었다. 사장 최남선, 전무이사는 [[서상호(통영)|서상호]](徐相灝), 편집국장은 진학문, 정치부장은 안재홍(安在鴻), 사회부장은 염상섭(廉想燮) 등이었다.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했고, 크기는 대형판 4면으로 1행은 14자, 1단은 124행, 1면은 12단으로 꾸몄다.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첫 번째 사명으로 삼았고, 당시 발행되던 신문들과는 달리 1면에 정치기사가 아닌 사회기사를 실었다는점이 특징이다. 또 1면 머리에 '오늘 일 내일 일'이라는 시평 칼럼을 두고 논설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엉석바지'라는 미국 만화를 특약, 6단폭의 6컷으로 연재했다. 초기의 발행부수가 2만 부에 이르러 당시 〈조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창간 2년 이후 재정상황이 어려워지자, 1926년 9월 18일 이상협이 〈시대일보〉의 판권을 넘겨받아 〈중외일보 (中外日報)〉라는 이름으로 새 신문을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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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환]]은 고향인 통영에서 5~6만 원 상당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고 통영의 부호 [[서상호(통영)|서상호]](徐相灝)와 협의하였다. 또한 고향에서 동지 규합을 위하여 활동하였으나, 1919년 5월 무렵 정진영의 밀고로 [[서상환]]을 비롯한 재건 달성친목회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서상환]]은 9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구류 처분을 받았고, 1920년 3월 22일 대구고등법원에서 면소 판결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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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호(통영)|서상호]](徐相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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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7월 25일 ~ 1964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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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본관은 [[대구 서씨]](大丘), 호는 죽사(竹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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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환]] 전 법무부 장관은 그의 4촌 동생이며,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의 피해자 서정철(徐廷哲, 1921. 5. 13 ~ 1959. 2. 18.) 준장과 서정화 전 내무부장관, 서정신(徐廷信, 1940. 8. 8 ~ 2016. 3. 14) 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등 3형제와 서정귀 전 국회의원은 6촌 재종손자(再從孫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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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 7월 25일 경상도 고성도호부 춘원면 면량리(현 경상남도 통영시 정량동)에서 천석꾼이던 아버지 서희순(徐禧淳, 1852. 7. 4 ~ 1927. 3. 10)[2]과 어머니 함안 조씨(1854 ~ 1915. 7. 24) 사이의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2살 때 결혼하고 통영군 통영면 명정리(현 통영시 명정동)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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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수학하고 고향 통영군의 의성학교(義成學校)에서 3년 간 일본어를 배웠다. 의성학교 졸업 후 1908년 4촌 동생 [[서상환]]과 함께 상경하여 봉명학원(鳳鳴學院)에 입학했다. 봉명학원 2학년 때인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왔다가, 그해 겨울 아버지의 돈궤짝을 털어 몰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서상환]]과 함께 니혼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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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들의 가출로 병을 얻은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혼자 귀국한 그는 통영군 통영면 길야정(현 통영시 항남동)에서 곡물상 및 정미소 등을 경영했으며, 통영공립보통학교의 학무위원으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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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가 창설되자, 당시 곡물 거래처였던 대궁상회(大弓商會) 대표 [[서상일]]을 통해 윤상태(尹相泰)와 최준(崔浚) 등을 알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서상환]]과 함께 4만원을 출자하고 자신의 정미소를 통영군 연락 거점으로 활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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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에는 통영공립보통학교 부속 야학교를 개설하고 상임 간사를 지내면서 친척 및 보통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여러 자제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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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밖에도 일본적십자사 유효특별사원으로 활동했으며, 통영공립보통학교 교외 대운동장 설비를 위해 700원을 기부하고, 통영면사무소 신축비 100원, 통영경찰서 구내 상무회도장(尙武會道場) 건축비, 통영공립보통학교 여자부 건물 건축비, 교육표본 구입비, 통영항 관리비용 등을 기부했고, 1918년에 쌀값 인상에 즈음하여 통영세민구제회(統營細民求濟會)가 설립되자 위원이 되어 구제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또 곡물상으로서 백미를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기도 하는 등 지역 사회 및 교육 사업 전반에 관심을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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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서상호는 그해 3월 8일 통영면 북신리(현 통영시 북신동)에 있던 송정택(宋正宅)의 사랑방에서 진평헌(陳平軒), 양재원(梁在元), 권남선, 김형기(金炯綺), 배익조(裵益祚) 등 17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리에 모여, 3월 13일 통영읍내 장날을 기해 남망산공원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그는 양재원 등 4명과 함께 남망산의 광부 450명과 도산면 거주 광부 170명을 인솔하기로 했는데, 같은 달 10일 새벽 강세제와 허장완, 이학이(李學伊) 등이 통영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훔쳐 선언서 1,200매를 등사한 뒤 훔친 등사판을 다시 갖다 놓으려다 현장에서 모두 검거되면서 만세운동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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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그해 6월경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실체가 발각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서상환]]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그해 7월 통영전기주식회사(統營電氣株式會社) 감사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 뒤 1919년 9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고등법원에 이송되었으며,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에 대해 면소로 방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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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4월 17일 사립 보성법률상업학교 재단법인 기성위원회(期成委員會)를 조직하여 기성위원에 취임하였다. 이때 [[서상호(통영)|서상호]]는 20만원을 기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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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7월에는 [[서상환]], 송정택, 진평헌 등 당시 만세운동 결의자들을 중심으로 통영청년단을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박봉삼을 선출했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실제 내용과 다른 엉뚱한 주제를 내세워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항일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으나, 그럼에도 강연회가 해산되거나 연사가 체포되는 경우가 많았다. 1922년에는 극심한 수재를 입은 황해도 지방 주민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1년 통영청년단은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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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같은 해 경상남도 마산부 원정(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 있던 주식회사 원동무역(元東貿易)에 감사에 취임하였으며, 1923년에는 이사에 취임했다.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이 시대일보사를 창립하자, 전무이사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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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는 경남은행(慶南銀行) 상무이사에 취임했고, 이어 전무취체역을 역임했다. 1928년 경남은행이 대구은행(大邱銀行)과 통합되어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이 되자,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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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2월 여운형이 창간한 조선중앙일보에 전무이사로 취임하여 다시 언론계에 뛰어들었으며, 1937년에는 주식회사 대동상사(大東商事)에 전무이사로 취임했다. 1942년에는 천석꾼 김덕보가 사망하자, 상속자인 김재율을 설득해 기부금을 내도록 권유하여 통영공립중학교 설립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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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광복 후에는 통영읍 봉평리(현 통영시 봉평동)으로 이주했다. 이후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1946년 10월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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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통영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63표(0.15%)의 표차로 접전 끝에 한국민주당 김재학(金載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김재학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2대 국회에서는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으로 있었으며, 1952년 내각책임제 개헌 때 찬성표를 던졌다.이때 통영군 통영읍 일원을 충무시로 승격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으나, 결국 1953년 거제도만 거제군으로 분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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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민주국민당 최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시에서 참의원으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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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4년 12월 20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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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고려)|서한]](徐閈)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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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고려)|서정]](徐靖),우복야 [[서균(고려)|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고려)|서린]](徐嶙), 평장사 [[서공(고려)|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고려)|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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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고려)|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고려)|서균]](徐鈞) [[서린(고려)|서린]](徐璘), [[서원(고려)|서원]](徐元) [[서공(고려)|서공]](徐恭) [[서성(고려)|서성]](徐成) [[서순(고려)|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고려)|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고려1)|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고려)|서원경]],[[서충(고려)|서충]],[[서신]],[[서윤(고려)|서윤]],[[서후상]],[[서윤현(고려)|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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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고려)|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고려1)|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고려)|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고려)|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고려)|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고려3)|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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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고려)|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고려1)|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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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고려)|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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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통일신라)|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고려)|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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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진나라)|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삼국)|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오나라)|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남송)|서희]](徐煕), [[서도(남송)|서도]](徐道), [[서도(남송1)|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중국)|서문백]](徐文伯), [[서사백(중국)|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원위)|서건]](徐謇), [[서웅(원위)|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수나라)|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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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일가연합회]] [[https://band.us/@seosar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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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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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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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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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섭대천]](利涉大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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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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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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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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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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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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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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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천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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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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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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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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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산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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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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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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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성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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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강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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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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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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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고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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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러시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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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튀르키예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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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시코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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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리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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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아시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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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자흐스탄서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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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즈베키스탄서씨]]

2024년 2월 7일 (수) 12:38 기준 최신판

통영의 부호 서상호(徐相灝)

서상호(徐相灝, 1888년 ~ 1964년 12월 20일[1])는 대한민국의 국회의원이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남은행 취체역을 맡았었다.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 국회의원(통영군 갑) 낙선

1950년 5월 30일 대한민국 제2대 국회의원 선거: 국회의원(통영군 갑) 당선

시대일보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의 주도로 '시대일보'가 창간되었다. 사장 최남선, 전무이사는 서상호(徐相灝), 편집국장은 진학문, 정치부장은 안재홍(安在鴻), 사회부장은 염상섭(廉想燮) 등이었다. 국한문혼용체를 사용했고, 크기는 대형판 4면으로 1행은 14자, 1단은 124행, 1면은 12단으로 꾸몄다. '민족의 단합과 협동'을 첫 번째 사명으로 삼았고, 당시 발행되던 신문들과는 달리 1면에 정치기사가 아닌 사회기사를 실었다는점이 특징이다. 또 1면 머리에 '오늘 일 내일 일'이라는 시평 칼럼을 두고 논설을 중요하게 다루었고, '엉석바지'라는 미국 만화를 특약, 6단폭의 6컷으로 연재했다. 초기의 발행부수가 2만 부에 이르러 당시 〈조선일보〉·〈동아일보〉와 함께 3대 민간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창간 2년 이후 재정상황이 어려워지자, 1926년 9월 18일 이상협이 〈시대일보〉의 판권을 넘겨받아 〈중외일보 (中外日報)〉라는 이름으로 새 신문을 창간했다.


서상환은 고향인 통영에서 5~6만 원 상당의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달라는 요청을 받고 통영의 부호 서상호(徐相灝)와 협의하였다. 또한 고향에서 동지 규합을 위하여 활동하였으나, 1919년 5월 무렵 정진영의 밀고로 서상환을 비롯한 재건 달성친목회 관련자들이 체포되었다. 서상환은 9월 23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구류 처분을 받았고, 1920년 3월 22일 대구고등법원에서 면소 판결로 석방되었다.


서상호(徐相灝)

1888년 7월 25일 ~ 1964년 12월 20일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 본관은 대구 서씨(大丘), 호는 죽사(竹史).

서상환 전 법무부 장관은 그의 4촌 동생이며,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의 피해자 서정철(徐廷哲, 1921. 5. 13 ~ 1959. 2. 18.) 준장과 서정화 전 내무부장관, 서정신(徐廷信, 1940. 8. 8 ~ 2016. 3. 14) 전 서울고등검찰청 검사장 등 3형제와 서정귀 전 국회의원은 6촌 재종손자(再從孫子)이다

1888년 7월 25일 경상도 고성도호부 춘원면 면량리(현 경상남도 통영시 정량동)에서 천석꾼이던 아버지 서희순(徐禧淳, 1852. 7. 4 ~ 1927. 3. 10)[2]과 어머니 함안 조씨(1854 ~ 1915. 7. 24) 사이의 1남 4녀 중 외아들로 태어났다. 12살 때 결혼하고 통영군 통영면 명정리(현 통영시 명정동)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16세까지 서당을 다니며 한문을 수학하고 고향 통영군의 의성학교(義成學校)에서 3년 간 일본어를 배웠다. 의성학교 졸업 후 1908년 4촌 동생 서상환과 함께 상경하여 봉명학원(鳳鳴學院)에 입학했다. 봉명학원 2학년 때인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에 내려왔다가, 그해 겨울 아버지의 돈궤짝을 털어 몰래 일본 도쿄로 건너가 서상환과 함께 니혼대학 전문부 법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들의 가출로 병을 얻은 아버지의 간곡한 부탁으로 혼자 귀국한 그는 통영군 통영면 길야정(현 통영시 항남동)에서 곡물상 및 정미소 등을 경영했으며, 통영공립보통학교의 학무위원으로 있었다.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가 창설되자, 당시 곡물 거래처였던 대궁상회(大弓商會) 대표 서상일을 통해 윤상태(尹相泰)와 최준(崔浚) 등을 알게 되었고, 그의 권유로 서상환과 함께 4만원을 출자하고 자신의 정미소를 통영군 연락 거점으로 활용했다.

1918년에는 통영공립보통학교 부속 야학교를 개설하고 상임 간사를 지내면서 친척 및 보통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여러 자제들에게 학자금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일본적십자사 유효특별사원으로 활동했으며, 통영공립보통학교 교외 대운동장 설비를 위해 700원을 기부하고, 통영면사무소 신축비 100원, 통영경찰서 구내 상무회도장(尙武會道場) 건축비, 통영공립보통학교 여자부 건물 건축비, 교육표본 구입비, 통영항 관리비용 등을 기부했고, 1918년에 쌀값 인상에 즈음하여 통영세민구제회(統營細民求濟會)가 설립되자 위원이 되어 구제비를 기부하기도 했다. 또 곡물상으로서 백미를 저렴한 가격으로 판매하기도 하는 등 지역 사회 및 교육 사업 전반에 관심을 가졌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서상호는 그해 3월 8일 통영면 북신리(현 통영시 북신동)에 있던 송정택(宋正宅)의 사랑방에서 진평헌(陳平軒), 양재원(梁在元), 권남선, 김형기(金炯綺), 배익조(裵益祚) 등 17명의 동지들과 함께 비밀리에 모여, 3월 13일 통영읍내 장날을 기해 남망산공원에서 만세운동을 벌일 것을 결의했다. 그는 양재원 등 4명과 함께 남망산의 광부 450명과 도산면 거주 광부 170명을 인솔하기로 했는데, 같은 달 10일 새벽 강세제와 허장완, 이학이(李學伊) 등이 통영면사무소에서 등사판을 훔쳐 선언서 1,200매를 등사한 뒤 훔친 등사판을 다시 갖다 놓으려다 현장에서 모두 검거되면서 만세운동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다가 그해 6월경 조선국권회복단 중앙총부의 실체가 발각되어 경성부 종로경찰서에 서상환 등 13명의 동지들과 함께 검거되었다. 옥고를 치르던 그해 7월 통영전기주식회사(統營電氣株式會社) 감사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 뒤 1919년 9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다이쇼 8년(1919) 제령 제7호 위반 혐의로 고등법원에 이송되었으며, 1920년 3월 22일 고등법원에서 소위 내란 혐의에 대해 면소로 방면되었다.

1921년 4월 17일 사립 보성법률상업학교 재단법인 기성위원회(期成委員會)를 조직하여 기성위원에 취임하였다. 이때 서상호는 20만원을 기부하였다.

그해 7월에는 서상환, 송정택, 진평헌 등 당시 만세운동 결의자들을 중심으로 통영청년단을 결성하고, 초대 회장으로 박봉삼을 선출했다. 이들은 일본 경찰의 의혹을 피하기 위해 실제 내용과 다른 엉뚱한 주제를 내세워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항일의식 고취에 힘을 쏟았으나, 그럼에도 강연회가 해산되거나 연사가 체포되는 경우가 많았다. 1922년에는 극심한 수재를 입은 황해도 지방 주민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1931년 통영청년단은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되고 말았다.

또한 같은 해 경상남도 마산부 원정(현 창원시 마산합포구 남성동)에 있던 주식회사 원동무역(元東貿易)에 감사에 취임하였으며, 1923년에는 이사에 취임했다. 1924년 3월 31일 최남선이 시대일보사를 창립하자, 전무이사에 취임했다.

1925년에는 경남은행(慶南銀行) 상무이사에 취임했고, 이어 전무취체역을 역임했다. 1928년 경남은행이 대구은행(大邱銀行)과 통합되어 경상합동은행(慶尙合同銀行)이 되자,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1933년 2월 여운형이 창간한 조선중앙일보에 전무이사로 취임하여 다시 언론계에 뛰어들었으며, 1937년에는 주식회사 대동상사(大東商事)에 전무이사로 취임했다. 1942년에는 천석꾼 김덕보가 사망하자, 상속자인 김재율을 설득해 기부금을 내도록 권유하여 통영공립중학교 설립에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통영읍 봉평리(현 통영시 봉평동)으로 이주했다. 이후 한국민주당에 입당하여 1946년 10월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경상남도 통영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63표(0.15%)의 표차로 접전 끝에 한국민주당 김재학(金載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또한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김재학 후보에 설욕하고 당선되었다. 2대 국회에서는 법제사법위원회 위원으로 있었으며, 1952년 내각책임제 개헌 때 찬성표를 던졌다.이때 통영군 통영읍 일원을 충무시로 승격시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했으나, 결국 1953년 거제도만 거제군으로 분리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민주국민당 최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시에서 참의원으로 출마했으나 역시 낙선하였다.

1964년 12월 20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별세했다.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徐閈)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 [[1]]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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