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역대 서국(徐國) 군주)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동이족]](東夷族)=[[서이족]](徐夷族)=[[부여족]](扶餘族) | [[동이족]](東夷族)=[[서이족]](徐夷族)=[[부여족]](扶餘族) | ||
− | 이(夷)는, 어질어 산숨(生命)을 좋아하니 잘몬(萬物)이 땅에 밑뿌리 터 나는 것이요. 그것은 크니, 하늘이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큰 것이며, 그래서 사람이 본받은 땅, 땅이 본받은 하늘, 하늘이 본받은 길,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이다. | + | 이(夷)는, 어질어 산숨(生命)을 좋아하니 잘몬(萬物)이 땅에 밑뿌리 터 나는 것이요. 그것은 크니, 하늘이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큰 것이며, 그래서 사람이 본받은 땅, 땅이 본받은 하늘, 하늘이 본받은 길,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이다. |
− | 이(夷)는 동이(東夷)다. 노자 늙은이가 ‘참알줄’(道德經)을 세상에 드러낸 때를 기원전 6세기쯤으로 보면, 당시 동이족(東夷族)이 살던 땅과 | + | 이(夷)는 동이(東夷)다. 노자 늙은이가 ‘참알줄’(道德經)을 세상에 드러낸 때를 기원전 6세기쯤으로 보면, 당시 [[동이족]](東夷族)이 살던 땅과 [[고조선]]의 영토가 맞물린다. 동이족은 지금의 강소성, 산동성,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한반도에 흩어져 살았다. 특히 산동성과 하북성 일대는 오래전부터 하(夏)․은(殷)․주(周)의 땅이었다. 그들도 동이였다. 그들의 후예는 고구려로 이어진다. 놀랍게도 노자 늙은이는 산동성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그도 [[동이족]]의 후예? |
‘동이열전(東夷列傳)’: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 | ‘동이열전(東夷列傳)’: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 | ||
− | ‘고구려(高句驪)’: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 + | ‘고구려(高句驪)’: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 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방 2천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習俗)에 음식을 아낀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동이들이 서로 전하여 오기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많이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 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치듯 빨리 간다. |
또 후한(後漢) 시대의 허신(許愼, 58년 무렵~147년 무렵)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夷)는 “평야. 종대종궁. 동방지인야.(平也. 从大从弓. 東方之人也.)”로 적었다. 이때 평(平)은 ‘고름’(平平)보다는 ‘바로잡음’(平定)의 뜻에 가깝다. 풀면 “어지러움을 바로잡는다. 큼을 따르고 활을 따른다. 동쪽의 사람이다.” 그런 뜻이다. 바로 이어서 주(注)를 달았다. 주의 앞부분이다. | 또 후한(後漢) 시대의 허신(許愼, 58년 무렵~147년 무렵)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夷)는 “평야. 종대종궁. 동방지인야.(平也. 从大从弓. 東方之人也.)”로 적었다. 이때 평(平)은 ‘고름’(平平)보다는 ‘바로잡음’(平定)의 뜻에 가깝다. 풀면 “어지러움을 바로잡는다. 큼을 따르고 활을 따른다. 동쪽의 사람이다.” 그런 뜻이다. 바로 이어서 주(注)를 달았다. 주의 앞부분이다. | ||
15번째 줄: | 15번째 줄: | ||
여기서 중국은 황하 유역을 가리킬 뿐 나라이름이 아니다. “중국, 경사야(中國, 京師也)”라 했듯이 수도를 말하기도 하고, 또 중원을 차지한 나라를 뜻하기도 했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라는 뜻은 하나라가 중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 주(周)나라부터는 황하(黃河)에서 ‘하’, 낙양(洛陽)에서 ‘낙’을 딴 ‘하락’(河洛) 지역을 중원의 중심으로 보았다. 신해혁명 이후 1912년에 한, 만, 몽, 장, 회족의 다섯 민족을 하나로 묶어 ‘중화’(中華)라 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은 처음으로 나라이름이 되었다. | 여기서 중국은 황하 유역을 가리킬 뿐 나라이름이 아니다. “중국, 경사야(中國, 京師也)”라 했듯이 수도를 말하기도 하고, 또 중원을 차지한 나라를 뜻하기도 했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라는 뜻은 하나라가 중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 주(周)나라부터는 황하(黃河)에서 ‘하’, 낙양(洛陽)에서 ‘낙’을 딴 ‘하락’(河洛) 지역을 중원의 중심으로 보았다. 신해혁명 이후 1912년에 한, 만, 몽, 장, 회족의 다섯 민족을 하나로 묶어 ‘중화’(中華)라 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은 처음으로 나라이름이 되었다. | ||
− | 사마천[司馬遷, BC.145년(혹은 BC.135년)~BC.87년(추정)]이 쓴 <사기(史記)>에 노자 늙은이를 “초(楚)나라 사람으로 주(周)나라에서 도서관장을 지냈다”고 적고 있으나, 초와 주의 영토는 동이족의 영토와도 겹치니 <설문해자>의 내용을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 밝힌 동이는 ‘참알줄’(道德經)의 사상과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노자 늙은이가 | + | 사마천[司馬遷, BC.145년(혹은 BC.135년)~BC.87년(추정)]이 쓴 <사기(史記)>에 노자 늙은이를 “초(楚)나라 사람으로 주(周)나라에서 도서관장을 지냈다”고 적고 있으나, 초와 주의 영토는 동이족의 영토와도 겹치니 <설문해자>의 내용을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 밝힌 동이는 ‘참알줄’(道德經)의 사상과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노자 늙은이가 [[동이족]]이었거나, 아니라면 동이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게 확실하다. |
동이열전에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하였고, 설문해자주에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고 하였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설명에는 군자가 동이사람과 같고, 그는 바르고 떳떳하며, 온씨알(百姓)을 불쌍히 여겨 늘 고민하는 걸로 나온다. 노자 늙은이 25월에 “그러므로 길이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임금 또한 크다.”는 내용이 있다. 그로부터 사람이 본받은 땅이요, 땅이 본받은 하늘이요, 하늘이 본받은 길이요,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를 갈무리해 낸다. 말과 뜻과 사상이 같지 않은가! | 동이열전에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하였고, 설문해자주에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고 하였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설명에는 군자가 동이사람과 같고, 그는 바르고 떳떳하며, 온씨알(百姓)을 불쌍히 여겨 늘 고민하는 걸로 나온다. 노자 늙은이 25월에 “그러므로 길이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임금 또한 크다.”는 내용이 있다. 그로부터 사람이 본받은 땅이요, 땅이 본받은 하늘이요, 하늘이 본받은 길이요,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를 갈무리해 낸다. 말과 뜻과 사상이 같지 않은가! |
2022년 11월 5일 (토) 22:16 판
이(夷)는, 어질어 산숨(生命)을 좋아하니 잘몬(萬物)이 땅에 밑뿌리 터 나는 것이요. 그것은 크니, 하늘이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큰 것이며, 그래서 사람이 본받은 땅, 땅이 본받은 하늘, 하늘이 본받은 길,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이다.
이(夷)는 동이(東夷)다. 노자 늙은이가 ‘참알줄’(道德經)을 세상에 드러낸 때를 기원전 6세기쯤으로 보면, 당시 동이족(東夷族)이 살던 땅과 고조선의 영토가 맞물린다. 동이족은 지금의 강소성, 산동성, 하북성,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그리고 한반도에 흩어져 살았다. 특히 산동성과 하북성 일대는 오래전부터 하(夏)․은(殷)․주(周)의 땅이었다. 그들도 동이였다. 그들의 후예는 고구려로 이어진다. 놀랍게도 노자 늙은이는 산동성에서 살았다. 그렇다면 그도 동이족의 후예?
‘동이열전(東夷列傳)’: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동방(東方)을 이(夷)라 한다’고 하였다.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천성(天性)이 유순하여 도리(道理)로서 다스리기 쉽기 때문에 군자국(君子國)과 불사국(不死國)이 있기까지 하다.
‘고구려(高句驪)’: 고구려는 요동(遼東)의 동쪽 천리 밖에 있다. 남쪽은 조선(朝鮮)과 예맥(濊貊), 동쪽은 옥저(沃沮), 북쪽은 부여와 접경하여 있다. 그 나라의 넓이는 방 2천리인데,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산다. 농사지을 땅이 적어서 힘껏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 부족하기 때문에 그 습속(習俗)에 음식을 아낀다. 그러나 궁실은 잘 지어 치장한다. 동이들이 서로 전하여 오기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많이 같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적에 한 쪽 다리는 펴서 끌며, 걸을 때는 모두 달음박질을 치듯 빨리 간다.
또 후한(後漢) 시대의 허신(許愼, 58년 무렵~147년 무렵)이 편찬한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夷)는 “평야. 종대종궁. 동방지인야.(平也. 从大从弓. 東方之人也.)”로 적었다. 이때 평(平)은 ‘고름’(平平)보다는 ‘바로잡음’(平定)의 뜻에 가깝다. 풀면 “어지러움을 바로잡는다. 큼을 따르고 활을 따른다. 동쪽의 사람이다.” 그런 뜻이다. 바로 이어서 주(注)를 달았다. 주의 앞부분이다.
“무릇 사람은 그가 사는 땅의 성질을 닮는다. 오직 동이만이 큼을 따랐으니 큰사람(大人)이다. 동이의 풍속은 어질고, 어진이가 오래 살며, 군자가 죽지 않는 나라다.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 큰 그림은 사람의 꼴을 본 땄다. 이(夷)의 옛 글씨는 대(大)와 같다. 즉 하(夏)나라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다.”(葢在坤地頗有順理之性. 惟東夷从大. 大人也. 夷俗仁. 仁者壽. 有君子不死之國. 按天大,地大,人亦大. 大象人形而夷篆從大. 則與夏不殊. 夏者,中國之人也.)
여기서 중국은 황하 유역을 가리킬 뿐 나라이름이 아니다. “중국, 경사야(中國, 京師也)”라 했듯이 수도를 말하기도 하고, 또 중원을 차지한 나라를 뜻하기도 했다. “하나라 사람은 중국사람”이라는 뜻은 하나라가 중원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리 쓴 것이다. 주(周)나라부터는 황하(黃河)에서 ‘하’, 낙양(洛陽)에서 ‘낙’을 딴 ‘하락’(河洛) 지역을 중원의 중심으로 보았다. 신해혁명 이후 1912년에 한, 만, 몽, 장, 회족의 다섯 민족을 하나로 묶어 ‘중화’(中華)라 하고 중화민국을 세웠다. 이후 ‘중국’은 처음으로 나라이름이 되었다.
사마천[司馬遷, BC.145년(혹은 BC.135년)~BC.87년(추정)]이 쓴 <사기(史記)>에 노자 늙은이를 “초(楚)나라 사람으로 주(周)나라에서 도서관장을 지냈다”고 적고 있으나, 초와 주의 영토는 동이족의 영토와도 겹치니 <설문해자>의 내용을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설문해자주(說文解字注)에 밝힌 동이는 ‘참알줄’(道德經)의 사상과 아주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노자 늙은이가 동이족이었거나, 아니라면 동이사상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게 확실하다.
동이열전에 “이(夷)란 근본(根本)이다. 이(夷)가 어질어서 생명(生命)을 좋아하므로 만물(萬物)이 땅에 근본하여 산출(産出)되는 것과 같다.”하였고, 설문해자주에 “요컨대 하늘은 크고 땅도 크며 사람 또한 크다.”고 하였다. 그 뒤로 길게 이어지는 설명에는 군자가 동이사람과 같고, 그는 바르고 떳떳하며, 온씨알(百姓)을 불쌍히 여겨 늘 고민하는 걸로 나온다. 노자 늙은이 25월에 “그러므로 길이 크고 하늘도 크고 땅도 크며 임금 또한 크다.”는 내용이 있다. 그로부터 사람이 본받은 땅이요, 땅이 본받은 하늘이요, 하늘이 본받은 길이요, 길이 본받은 제절로(自然)를 갈무리해 낸다. 말과 뜻과 사상이 같지 않은가!
조금 다른 이야기 하나를 더 꺼내 보자. 이번엔 꿍꿍이다. 이(夷)는 큰 활이니 그로부터 궁궁을을(弓弓乙乙)이 비롯한 게 아닐까? 이(夷)에서 궁궁을을이요, 궁궁을을에서 약(弱)이 아닐까? 노자 늙은이는 36월에 “부드러움이 굳셈을 이긴다”(柔弱勝剛强)고 했잖은가. 수운은 또 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에 “송송가가(松松家家) 알았으되 이재궁궁(利在弓弓) 어찌알꼬 천운이 둘렀으니 근심말고 돌아가서 윤회시운(輪廻時運)구경하소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라 했고, 소태산은 “궁궁은 무극(無極) 곧 일원(一圓)이 되고, 을을(乙乙)은 태극(太極)이 되나니 곧 도덕의 본원을 밝히심이요, 이러한 원만한 도덕을 주장하여 모든 척이 없이 살면 이로운 것이 많다는 것이니라.”고 했다.
목차
역대 서국(徐國) 국왕
- 약목(若木)
부여왕 계보
- 동명왕(東明王)
백제왕 계보
한국에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https://band.us/@seosarang
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서언왕(徐偃王)(백익(伯益) 30세손 卅三世孫)—二世 서보종(徐寶宗)字棟、서보형(徐寶衡)、서보명(徐寶明)——三世 서창(徐滄)——四世 서평(徐平)——五世 서랑(徐瑯)——六世 서박(徐璞)——七世 ㅅ서형(徐瑩)——八世 서양(徐陽)——九世 서인(徐仁)——十世 서충(徐忠)——十一世孫 서흥(徐興)、서군(徐君) 서국국군(徐國國君)——十二世 서수(徐秀)字章翳——十三世 서아(徐雅) 거남창군(居南昌郡)——十四世 서승(徐勝)——十五世 서추(徐樞)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十六世 서소(徐釗)——十七世 서상(徐相)——十八世 서회(徐匯)——十九世 서엽(徐燁)——二十世 서감(徐坩)——廿一世 서명(徐銘) 천동해군랑야(遷東海郡瑯琊)——廿二世 서룡(徐龍)——廿三世 서복(徐福)우명(서시)진조조명(방사)증동도(일본)거동해랑야(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 서손(徐遜) 세거동해군담현(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 서진(徐真)、——廿六世 서상(徐尚)——廿七世 서천(徐天)——廿八世 서수(徐守)、——廿九世 서로(徐魯)——三十世 서진(徐振)、서규(徐揆)——卅一世 서석(徐錫)——卅二世 서방(徐芳)、서지(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 서추(徐秋)(志子)——卅四世 서창(徐昶)——卅五世 서성(徐晟)、——卅六世 서수(徐綬)——卅七世 서승(徐升)、——卅八世서교(徐喬)——卅九世 서염(徐琰)、——四十世 서해(徐垓)——四一世 서이(徐怡) 거하남언사(居河南偃師)——四二世 서현(徐賢)——四三世 서례(徐禮)——四四世 서종(徐宗)——四五世서성(徐成)——四六世 서한(徐漢)——四七世 서령(徐靈)——四八世 서중(徐中) 유하남언사천담성(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 서전(徐佃)——五十世 서예(徐豫)、서장(徐章) 본종세거동해군담현(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 서창(徐倉) 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 서전(徐田)(衢州2代)——五三世 서천(徐泉)(衢州3代)——五四世 서창(徐昌)(衢州4代)、서면(徐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 서균(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 서릉(徐陵)(507-583,유사(儒士)、서맹(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 서언(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 서우(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 서유(徐惟)(衢州9代585-668)、서광(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서소(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 서계(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 서영(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서성(徐盛)公(徐洎次子)居江西、서기(徐奇)(徐洎季子)居丹陽、서홍(徐洪)官衢州刺史(徐洎四子)居信安、서반(徐攀)(徐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 서유(徐柔)(633-715,서홍(徐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서긍(徐矜)(636-720,서홍(徐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서무(徐務) 서홍(徐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 서계(徐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서홍민(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 서민(徐敏)(衢州12代字大立,徐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서회(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서진(徐珍)公(徐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서구(徐玖)守居浙江信安、서광(徐珖)居建安、서개(徐玠)(937-942,남당재상(南唐宰相)、서재(徐宰) 서홍민(徐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서운(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 서반(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 서회(徐晦)長子)遷居臨沂、서호(徐湖)서회(徐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서창(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서강(徐江)(狀元 서회(徐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서창(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서회(徐回) 서진(徐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서요(徐陶)(700-770,서재(徐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 서견(徐堅)(衢州15代,서회(徐回)公長子)、서인(徐寅) 서회(徐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 서상(徐商)(859-873,字義聲,서요(徐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 재상(宰相)——六十七世 서인사(徐仁嗣) 서상(徐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서효사(徐孝嗣) 서상(徐商公次子)、서언약(徐彥若)(888-904,서상(徐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재상(宰相)——六十八世 서관(徐綰) 서언약(徐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 서온(徐溫)(862-927,字敦美,오국(吳國) 재상(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 서지훈(徐知訓)、서지순(徐知詢)、서지고(徐知誥) 남당황제양자 이승(南唐皇帝養子李升)、서지간(徐知諫)、서지증(徐知證)、서지악(徐知諤)、서지해(徐知海)(885-968)——七十一世 서유(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서광보(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중화서씨(中華徐氏)入閩서긍(徐矜)公 서홍(徐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서회(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서상(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일문(一門) 22 명(名) 진사(進士):1、서회(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서첨(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서광실(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서종의(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서종례(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서정(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 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서명숙(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서승당(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서영(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서진방(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서대수(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 서긍(徐矜)公(760-840衢州剌史서홍(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서회(徐晦)(760-838,서긍(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 서강(徐江)(784-860)——4世 서기(徐棋)(808-882)——5世 서촉(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 서돈(徐墩)(856-933)——7世 서쟁(徐錚)(880-958)——8世 서망(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 서설(徐楔)(926-1000)——10世 서등(徐燈)(950-1032)——11世 서방(徐坊)(986-1065)——12世 서종(徐鐘)(1010-1088)——13世 서청(徐清)(1032-1100)——14世 서식(徐植)(1058-1135)——15世 서휘(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서양(徐烊)(1072-1150)、서첨(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서광실(徐光實) 서첨의 아우(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 서배(徐培)(1095-1173)、서종의(徐宗義) 서첨 장자(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서종례(徐宗禮) 서첨 차자(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서호(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 서정(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서실(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서용(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서순미(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 서진로(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서유자(徐孺子)(1142-1220)、서선(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서백교(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서이정(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서정(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 서명숙(徐明淑)(1166-1243,徐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 서덕문(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서뢰문(徐雷聞) (遷德化徐公店)、서춘문(徐春聞)(1192-1265)、——21世嗣子 서연(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 서진방(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서회(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한성백제문화제(漢城百濟文化祭)
서울특별시 송파구에서 한성백제 문화를 주제로 매년 9월~10월 초에 개최하는 축제
매년 9월 말~10월 초 한성백제 시대의 도읍지였던 서울 송파구에서 개최되는 문화 축제로 1994년 제1회가 열렸다. 현재 송파구 지역은 기원전 18년부터 475년까지 약 500년간 한성백제 수도의 역할을 해 왔다. 때문에 송파에서는 백제의 다양한 유물과 유적들을 만나볼 수 있는데, 대표적으로 풍납토성(사적 제11호), 몽촌토성(사적 제297호), 석촌동 고분군(사적 제243호) 등이 있다.
한성백제문화제에서는 백제의 문화를 배우고, 체험할 수 있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대표적으로 한성백제혼불 채화식, 전통놀이 및 문화체험, 도전! 한성백제박사, 한성백제 어울마당, 한성백제 성곽돌기, 역사문화거리행렬 등이 진행된다.
백제고분제(동명제)(百濟古墳齊)
백제고분제는 백제초기 건국 온조왕부터 개로왕까지 493년에 이르는 고도 위례성의 찬란한 문화와 예술을 꽃피운 백제전기왕들의 신령께 제를 드리는 행사로 석촌동 백제초기 적석총(사적 제243호)에서 개최한다.
숭렬전(崇烈殿)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면 산성리에 있는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창건한 사당. 1972년 5월 4일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온조왕묘(溫祚王廟)
경기도 광주시와 충청남도 직산군에 있는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
백제를 세워 국민을 계몽하고 교화한 온조왕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현재 두 곳에 있다. 한 곳은 충청남도 직산에 중건된 것이고, 한 곳은 경기도 광주의 남한산성 안에 있는 것으로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고려 때 세운 것으로 전한다
백제문화제(百濟文化祭)
백제의 왕도(王都),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개최되는 역사문화축제> 68년을 이어온 백제문화제는 고대 동아시아의 문화강국이었던 백제의 전통성에 근거하여 백제의 수도였던 충청남도 공주시와 부여군에서 1955년부터 매년 개최하는 역사재현형 축제이다. 또한 2015년7월 백제역사유적지구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계기로 백제의 후예들과 관광객들이 만들어가는 세계적인 역사문화축제로 나아가고 있다.
삼충제(三忠祭)
매년 10월에 열리는 백제문화제 때 이곳에서 삼충제(三忠祭)
백제 말의 세 충신인 성충(成忠), 흥수(興首), 계백(階伯)에게 올리는 제사. 매년 충남 부여와 공주에서 개최되는 백제 문화제 중의 하나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15호. 소재지 : 충남(忠南) 부여군(扶餘郡) 부여읍(扶餘邑) 쌍북리(雙北里) 40-1번지. 백제(百濟)의 충신이었던 성충(成忠)ㆍ흥수(興首)ㆍ계백(階伯)을 기리기 위해 지은 사당이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관내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서희(徐熙) 선생의 일대기와 외교적 리더십에 관한 역할극, 토론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꿈을 키우며 갈등을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 미래 사회를 이끄는 리더로서의 성장하도록 한다.
9월에 개최되는 ‘장위공 서희(徐熙) 문화제’는 위드 코로나 시대에 안전하게 즐길 만한 지속 가능한 모델을 제시하며 온·오프라인을 병행해 사전 예약제 등 다양한 형태로 진행한다.
미래의 주역이 될 학생을 대상으로 장위공 서희 선생의 얼과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전국미술대회’, 그리고 10월에는 서희(徐熙) 선생 서거 주기 추모제를 개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