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오나라)"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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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삼국지 [[서성(오나라)|서성]](徐盛)전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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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주 낭야군 거현 출신인데 난세가 되자 오군으로 피난을 와서 담력이 있고 의로운 자로 알려졌다. 손권에게 등용되었다. 황조의 아들 황역은 일찍이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서성을 공격했다. 서성은 당시 관리와 군사들이 2백 명도 차지 않았지만, 서로 대적하며 공격하여 황역의 관리와 군사 1천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에 성문을 열고 출전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황역은 마침내 끊어져 다시는 노략질하지 못했다. 손권이 이 공으로 교위, 무호현령으로 삼았다. 다시 임성남쪽의 아산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니, 중랑장으로 승진하여 병사들을 감독하고 가르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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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흠전에 따르면 이 시기에 서성이 장흠의 부하를 처벌하려 했지만 손권에게 거절당해 장흠과 사이가 나빠졌다. 이후 유수구 전투에서 장흠의 사적인 원한에 사로잡혀있지 않은 태도를 보고 서성은 감동했다. 남쪽의 산월을 쳐서 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 또 조조가 유수구에 쳐들어왔을 때에는 동습과 함께 수군을 이끌다가 폭풍을 맞아 배가 적의 해안가에서 좌초되었다. 서성은 그대로 적을 향해 돌진하여 적을 흩어 버린 뒤 바람이 그치자 돌아왔다. 손권은 서성을 매우 칭찬했다. 주태전에 따르면 주연과 더불어 주태를 경시하다가 손권이 주태의 상처를 보여 설명하자 승복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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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조가 유수(濡須)로 나오자, 손권을 따라 이를 막았다. 위에서 일찍이 크게 횡강(橫江)까지 출전하니, 서성과 여러 장수들이 함께 달려가 토벌하였다. 이 때 몽충선(蒙衝船)을 탔는데, 세찬 바람을 만나, 배가 적의 강안 아래로 떨어지니,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고 떨며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는데, 서성이 홀로 병사를 거느리고 올라가 돌격하여 적을 쳐부수니, 적은 퇴각하여 달아났고, 죽거나 다친 자가 있었으며, 바람이 그치자 바로 돌아오니, 손권이 크게 장하게 여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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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제전에 따르면 215년, 2차 합비 공방전에서는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창을 잃었는데, 이를 하제가 되찾아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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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손권이 조비에게 칭신해 위의 번국(藩國)이 되기를 칭하였을 때, 위에서 사신 형정을 시켜 손권을 배수하여 오왕으로 삼게 하였다. 손권이 도정까지 나와 형정을 기다리는데, 형정은 교만한 안색을 띄었기에, 장소가 이미 노하였고 서성도 분노하여 동열(同列)에 서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길 | ||
+ | 나 서성 등이 필사적으로 몸을 던지고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해 허(許), 낙(洛)을 병합하고, 파(巴), 촉(蜀)을 삼킬 수 없어서 우리 주군이 형정과 더불어 맹약하게 했으니, 또한 치욕이지 않은가! | ||
+ | 라는 말을 사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할 정도로 대담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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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형정이 이를 듣고 그의 일행에게 말하길 "강동의 장상(將相)들이 이와 같으니, 남의 밑에 오래 있지는 않겠구나." 후에 건무장군으로 승진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으며, 여강태수를 겸임했고, 임성현을 하사받아 봉읍으로 삼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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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뒤 이릉대전에도 참전했다. 육손전에 따르면 유비가 쳐들어오자 육손 등과 함께 요격을 맡았고, 유비가 백제성으로 퇴각하자 반장, 송겸과 더불어 유비를 추격하자고 주장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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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비의 1차 남정 당시인 222년 전종, 하제, 여범 등과 동구에서 조휴의 군사와 분투했으며, 여기서도 폭풍우를 만나 익사한 자가 수천 명에 다다랐다고 한다. 하지만 서성이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조휴와 강을 끼고 대치했다. 조휴가 병사를 시켜 장차 배로 가서 서성을 공격하여 했는데, 서성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들을 막아내니, 적들은 이기지 못하고, 각자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안동장군으로 승진하고, 무호후에 봉해졌다. 하제의 전함을 보고 조휴는 철수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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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24년 조비가 직접 오나라 정벌군을 일으켰을 때에는 건업을 따라 울타리를 쌓고 부락을 지으며, 울타리 위에는 임시누각을 설치하고 전함을 잔뜩 띄웠다. 즉 거짓 성벽을 세워 적을 속이는 위성계(僞城計)를 실행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은 이를 무익한 짓이라 여겼고, 건강실록에 따르면 손권조차 효과가 있을거라 믿지 않았다고 한다. 서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듣지 않고 완고하게 실행했는데, 그 결과 광릉(廣陵)에 도착한 조비는 이를 보고 진짜로 포기한 채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비가 "위에 비록 무장한 기병이 많아도 소용이 없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여러 장수들이 이에 탄복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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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황무 연간(222~229년)에 죽었다고 한다. 아들 서해(徐楷)가 작위를 잇고 병사를 통솔했다. 석정전투 참가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는 228년 이전에 사망한 듯하다. 또는 최대 229년을 몰년으로 치더라도 병석에 누워있던가 해서 참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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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와 비교하여 활약한 기간은 비슷하지만, 오군 장수 중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편. 적벽대전 때 동남풍을 비는 제갈량을 죽이려는 부분에서 본격적으로 나오며 이때부터 정봉과 꾸준히 세트로 등장한다. 판소리 적벽가에서도 '서성 정봉'이라며 세트로 불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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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사와 연의의 묘사가 많이 다른 편이다. 일단 같이 활약한 정봉은 실제 정사에서는 훨씬 후반기 인물이므로 여기서부터 다르고, 일화들도 조비가 손권을 오왕에 봉했을 때의 일화 외에 다른 일화들은 잘려나간 부분이 많다. 특히 합비 공방전에서 적진에 좌초되었다가 탈출한 일화 등이 잘렸다. 그리고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에서는 정봉과 함께 호위 취급을 받고 제갈량을 죽이려다 조운에게 굴욕, 유비와 함께 도망가는 손부인에게 굴욕, 형주 공방전에서 조인에게 밀려서 후퇴하는 등 굴욕적으로 나온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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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러나 장수로서 활약하는 부분으로는 오나라 장수 중에서는 상위권이다. 위성계를 사용하는 부분에서는 원래는 위군이 이것에 쫄아서 전투없이 후퇴했지만, 연의에서는 위군이 이것 때문에 혼란에 빠져 오군의 기습에 대파당하는 것으로 나오고, 원래는 참가하지 않았던 석정 전투에도 등장하는 등 더 부각되어서 좋게 나온 부분들도 있어 주환, 전종같은 도독급으로 묘사된다. |
2022년 9월 9일 (금) 14:33 판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
삼국 시대 오나라 낭야(琅邪) 거현(莒縣) 사람. 자는 문향(文嚮)이다. 후한 말기에 오(吳)에서 살았는데, 손권(孫權)이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채용했다. 용맹이 뛰어났고, 특히 수전(水戰)에 능했으며, 손권을 위해 여러 차례 큰 공을 세웠다. 시상(柴桑)을 지키면서 황조(黃祖)와 맞섰는데, 적은 병사로 많은 적을 상대했다. 교위(校尉)로 옮겼다. 헌제(獻帝) 건안(建安) 연간에 조조(曹操)가 유수(濡須)를 공격할 때 맞싸워 공을 세웠다. 나중에 건안장군(建安將軍)으로 옮기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진 뒤 여강태수(廬江太守)를 관할했다. 손권 황무(黃武) 6년(227) 위(魏)나라 군대가 동구(洞口)를 공격하자 여범(呂範), 전종(全琮)과 함께 막아냈다.
마침 큰 바람이 풀어 익사자가 수천 명 나왔는데, 그만 병사들을 수습하여 좇아 적장을 죽이고 수백 명의 적을 죽여 안동장군(安東將軍)으로 옮기고 무호후(蕪湖侯)에 봉해졌다. 황무 연간에 죽었다. 제갈량(諸葛亮)이 남병산(南屛山)에서 동남풍을 빌고 난 뒤 정봉(丁奉)과 함께 뒤를 쫓았다 하여 「적벽가(赤壁歌)」에 이름이 올라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강 한복판에 거짓 성루를 만들고 배를 정렬하여 이변에 놀란 조비(曹丕)가 싸워보지도 못하고 물러나게 하기도 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大丘達城徐氏) (달성 서씨 대구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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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華徐氏遠祖(중화 서씨원조):徐偃王(서언왕)(伯益卅三世孫)—二世徐寶宗字棟、徐寶衡、徐寶明——三世徐滄——四世徐平——五世徐瑯——六世徐璞——七世徐瑩——八世徐陽——九世徐仁——十世徐忠——十一世孫徐興、徐君(徐國國君)——十二世徐秀字章翳——十三世徐雅居南昌郡——十四世徐勝——十五世徐樞居河南偃師——十六世徐釗——十七世徐相——十八世徐匯——十九世徐燁——二十世徐坩——廿一世徐銘遷東海郡瑯琊——廿二世徐龍——廿三世徐福(又名徐市秦朝著名方士曾東渡日本居東海郡瑯琊)——廿四世徐遜(世居東海郡郯縣)——廿五世徐真、——廿六世徐尚——廿七世徐天——廿八世徐守、——廿九世徐魯——三十世徐振、徐揆——卅一世徐錫——卅二世徐芳、徐志(錫次子本宗(本宗世居東海郡郯縣)、——卅三世徐秋(志子)——卅四世徐昶——卅五世徐晟、——卅六世徐綬——卅七世徐升、——卅八世徐喬——卅九世徐琰、——四十世徐垓——四一世徐怡居河南偃師——四二世徐賢——四三世徐禮——四四世徐宗——四五世徐成——四六世徐漢——四七世徐靈——四八世徐中(由河南偃師遷郯城)——四九世徐佃——五十世徐豫、徐章(本宗世居東海郡郯縣)——五一世(衢州1代)始祖南洲號徐倉由徐州渡江居浙江衢州(章長子)——五二世徐田(衢州2代)——五三世徐泉(衢州3代)——五四世徐昌(衢州4代)、勉(466-535,官吏部尚書)——五五世徐均(衢州5代,485-566)——五六世徐陵(507-583,儒士)、徐孟(衢州6代,510-581)——五七世徐彥(衢州7代,537-618)——五八世徐友(衢州8代,560-641)—五九世徐惟(衢州9代585-668)、徐曠(字文遠,隋未唐初世居洛州偃師)、徐昭(字德光官郎中)———六十世徐洎官至太尉(衢州10代)——六十一世徐永(衢州11代610-682,洎長子本宗)居會稽、徐盛公(洎次子)居江西、徐奇(洎季子)居丹陽、徐洪官衢州刺史(洎四子)居信安、徐攀(洎五子)居吳郡——六十二世徐柔(633-715,洪公長子,守居浙江信安,子安貞中書侍郎孫知新)、徐矜(636-720,洪公次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遷居泉郡徐公店1世祖,今屬晉江池店)、徐務(洪公季子,唐昭宗居唐天寶八年避亂,由浙江信安入閩莆陽延壽1世莆陽徐氏始祖,太尉洎公孫)字恒經配散騎常侍莆陽黃華之女諱昌娥封夫人由龍遊縣入閩卜居莆田縣崇仁裏徐州村、徐弘敏(字有功大理卿635-702)、——六十三世徐敏(衢州12代字大立,矜公長子)守居會稽、次徐梅守居浙江信安(字大新,矜公次子)、徐晦(入閩泉郡徐公店2世768-838年字大章號登瀛,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公昌朝姐諱昌月);徐珍公(務公長子居岩麓溪南延壽裏配林氏)、徐玖守居浙江信安、徐珖居建安、徐玠(937-942,南唐宰相)、徐宰(弘敏子,進士居河南偃師)、徐惲(676-746,弘敏侄)——六十四世徐潘(晦公長子,衢州世,閩泉郡徐公店字適洲狀元徐晦長子)遷居臨沂、徐湖(晦公次子經延壽遷居連江徐倉後裔至宋奉政大夫天一公又分閩侯荊溪)、徐江(狀元晦公季子本宗)世居泉郡徐公店,今屬晉江池店徐倉,南唐間吾族澤厚公由泉郡徐倉析居安平狀元巷徐公店、晉江龍首山常泰裏妙峰堂徐公店嗣子衍公(本宗)宋嘉熙年間遷居晉邑華洲徐公店;徐回(珍公子,衢州14代,入閩延壽3世)徐陶(700-770,宰公子,唐進士居河南偃師)、——六十五世徐堅(衢州15代,回公長子)、徐寅(回公次子,入閩延壽4世字昭夢,後唐開平四年狀元);徐商(859-873,字義聲,陶公子,由洛州偃師遷鄭州新鄭官至宰相)——六十七世徐仁嗣(商公長子,唐進士居鄭州新鄭)、徐孝嗣(商公次子)、徐彥若(888-904,商公季子,字俞之唐進士官至宰相)——六十八世徐綰(彥若子,右都指揮使居鄭州新鄭)——六十九世徐溫(862-927,字敦美,吳國宰相由新鄭遷居海州朐山)——七十世徐知訓、徐知詢、徐知誥(南唐皇帝養子李升)、徐知諫、徐知證、徐知諤、徐知海(885-968)——七十一世徐遊(910-982居海州朐山)——七十二世徐光溥(934-965,前蜀宰相由海州朐州遷居長州昆山。
泉郡徐氏古譜載曰:龍虎榜頭(指鄰歐陽詹故里)孫嗣祖鳳凰池(指東為大唐李家王朝後李氏堂號稱之為鳳池,其後徐公店遂易名池店)上弟聯兄書香之祠聯。
(四)中華徐氏入閩徐矜公(洪公次子,今晉江池店)係泉郡徐公店始祖——泉郡狀元尚書徐晦故宅(一在晉江安平徐狀元巷,一在晉江徐公店今屬池店)一門22名進士:1、徐晦(唐貞元十六年狀元);2、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3、徐瞻(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4、徐光實(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5、徐宗義(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6、徐昇堂(明永樂十九年狀元曾鶴齡榜進士)、7、徐宗禮(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8、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9、徐定(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10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11、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12、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3、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14、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15、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16、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7、徐明淑(宋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18、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19、徐昇堂(明永樂十九狀元曾鶴齡榜進士);20、徐榮(明嘉靖十一年狀元林大欽榜進士):21、徐晉芳(會魁明萬曆二十九年狀元張以誠榜官監察御史);22、徐大受(清康熙五十二年狀元王敬銘榜進士官內閣中書)。 (2)福建泉郡徐公店始祖:泉郡1世徐矜公(760-840衢州剌史徐洪公次子)由信安遷入泉郡徐公店——2世狀元徐晦(760-838,徐矜公季子)配金華令莆陽黃君昌朝姐諱昌月——3世徐江(784-860)——4世徐棋(808-882)——5世徐燭(832-900,字彥光,號宣軒,居鳳池徐厝埕,墓在泉郡桃花山小天豹穴)——6世徐墩(856-933)——7世徐錚(880-958)——8世徐漭(902-978,字澤厚南唐末年遷居泉郡三十三都常泰裏)——9世徐楔(926-1000)——10世徐燈(950-1032)——11世徐坊(986-1065)——12世徐鐘(1010-1088)——13世徐清(1032-1100)——14世徐植(1058-1135)——15世徐徽(宋政和壬辰科特奏進士)、徐烊(1072-1150)、徐瞻(字德望,宋政和乙未科進士官廣州通判)、徐光實(徐瞻弟,字德充,宋建炎戊申科進士官連州知府以清儉聞)——16世徐培(1095-1173)、徐宗義(徐瞻長子,宋淳熙戊戌科特奏進士)、徐宗禮(徐瞻次子,宋淳熙乙未科特奏進士)、徐浩(宋開禧乙醜科特奏進士)——17世徐定(1118-1191,字德操,宋紹興辛未科進士官潮州太守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徐實(宋乾道丙戌科進士)、徐容(宋乾道已醜科進士中書教官)、南洲(1120-1200,宋季分居福州常泰裏,配安平呂氏)、徐洵美(宋隆興癸未科特奏進士)——18世徐晉老(宋紹興乙醜科進士)、徐孺子(1142-1220)、徐瑄 (1145-1228,字純中又字漢玉,號松月居士,定公子,隨父遷居浙江溫州永嘉徐公店,官嘉興太守安撫使)徐伯嵩(宋慶元丙辰科進士)、徐履正(宋慶元丙辰科進士)、徐挺(宋開禧乙醜科進士)——19世徐明淑(1166-1243,伯嵩子,字仲晦號擇齋,宋理宗紹定壬辰科進士歷官漳州通判兵部侍郎,與尚書洪天錫齊名)、——20世徐德聞 (宋寶慶丙戌科進士)、徐雷聞 (遷德化徐公店)、徐春聞(1192-1265)、——21世嗣子徐衍(1214-1268)——22世諸生號平庵(1237-1311,宋末居晉邑華洲徐公店遂為華洲初祖)裔孫徐縉芳字奕開明萬曆廿九年進士官至監察御史。
以上摘自《泉郡徐公店狀元尚書公徐晦家譜》與《泉郡華洲徐氏族譜》。
삼국지 서성(徐盛)전
서주 낭야군 거현 출신인데 난세가 되자 오군으로 피난을 와서 담력이 있고 의로운 자로 알려졌다. 손권에게 등용되었다. 황조의 아들 황역은 일찍이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서성을 공격했다. 서성은 당시 관리와 군사들이 2백 명도 차지 않았지만, 서로 대적하며 공격하여 황역의 관리와 군사 1천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에 성문을 열고 출전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황역은 마침내 끊어져 다시는 노략질하지 못했다. 손권이 이 공으로 교위, 무호현령으로 삼았다. 다시 임성남쪽의 아산적을 토벌하는데 공을 세우니, 중랑장으로 승진하여 병사들을 감독하고 가르쳤다.
장흠전에 따르면 이 시기에 서성이 장흠의 부하를 처벌하려 했지만 손권에게 거절당해 장흠과 사이가 나빠졌다. 이후 유수구 전투에서 장흠의 사적인 원한에 사로잡혀있지 않은 태도를 보고 서성은 감동했다. 남쪽의 산월을 쳐서 중랑장으로 임명되었다. 또 조조가 유수구에 쳐들어왔을 때에는 동습과 함께 수군을 이끌다가 폭풍을 맞아 배가 적의 해안가에서 좌초되었다. 서성은 그대로 적을 향해 돌진하여 적을 흩어 버린 뒤 바람이 그치자 돌아왔다. 손권은 서성을 매우 칭찬했다. 주태전에 따르면 주연과 더불어 주태를 경시하다가 손권이 주태의 상처를 보여 설명하자 승복했다.
조조가 유수(濡須)로 나오자, 손권을 따라 이를 막았다. 위에서 일찍이 크게 횡강(橫江)까지 출전하니, 서성과 여러 장수들이 함께 달려가 토벌하였다. 이 때 몽충선(蒙衝船)을 탔는데, 세찬 바람을 만나, 배가 적의 강안 아래로 떨어지니,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고 떨며 감히 나서는 자가 없었는데, 서성이 홀로 병사를 거느리고 올라가 돌격하여 적을 쳐부수니, 적은 퇴각하여 달아났고, 죽거나 다친 자가 있었으며, 바람이 그치자 바로 돌아오니, 손권이 크게 장하게 여겼다.
하제전에 따르면 215년, 2차 합비 공방전에서는 싸우다가 부상을 입고 창을 잃었는데, 이를 하제가 되찾아왔다.
손권이 조비에게 칭신해 위의 번국(藩國)이 되기를 칭하였을 때, 위에서 사신 형정을 시켜 손권을 배수하여 오왕으로 삼게 하였다. 손권이 도정까지 나와 형정을 기다리는데, 형정은 교만한 안색을 띄었기에, 장소가 이미 노하였고 서성도 분노하여 동열(同列)에 서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하길 나 서성 등이 필사적으로 몸을 던지고 목숨을 바쳐 국가를 위해 허(許), 낙(洛)을 병합하고, 파(巴), 촉(蜀)을 삼킬 수 없어서 우리 주군이 형정과 더불어 맹약하게 했으니, 또한 치욕이지 않은가! 라는 말을 사신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할 정도로 대담했다.
형정이 이를 듣고 그의 일행에게 말하길 "강동의 장상(將相)들이 이와 같으니, 남의 밑에 오래 있지는 않겠구나." 후에 건무장군으로 승진하고,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으며, 여강태수를 겸임했고, 임성현을 하사받아 봉읍으로 삼았다.
그 뒤 이릉대전에도 참전했다. 육손전에 따르면 유비가 쳐들어오자 육손 등과 함께 요격을 맡았고, 유비가 백제성으로 퇴각하자 반장, 송겸과 더불어 유비를 추격하자고 주장했다
조비의 1차 남정 당시인 222년 전종, 하제, 여범 등과 동구에서 조휴의 군사와 분투했으며, 여기서도 폭풍우를 만나 익사한 자가 수천 명에 다다랐다고 한다. 하지만 서성이 남은 병력을 수습하여 조휴와 강을 끼고 대치했다. 조휴가 병사를 시켜 장차 배로 가서 서성을 공격하여 했는데, 서성은 적은 군사로 많은 적들을 막아내니, 적들은 이기지 못하고, 각자 군대를 이끌고 퇴각하였다. 안동장군으로 승진하고, 무호후에 봉해졌다. 하제의 전함을 보고 조휴는 철수한다.
224년 조비가 직접 오나라 정벌군을 일으켰을 때에는 건업을 따라 울타리를 쌓고 부락을 지으며, 울타리 위에는 임시누각을 설치하고 전함을 잔뜩 띄웠다. 즉 거짓 성벽을 세워 적을 속이는 위성계(僞城計)를 실행한 것이다. 하지만 여러 장수들은 이를 무익한 짓이라 여겼고, 건강실록에 따르면 손권조차 효과가 있을거라 믿지 않았다고 한다. 서성은 그러거나 말거나 듣지 않고 완고하게 실행했는데, 그 결과 광릉(廣陵)에 도착한 조비는 이를 보고 진짜로 포기한 채 군대를 이끌고 퇴각했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조비가 "위에 비록 무장한 기병이 많아도 소용이 없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여러 장수들이 이에 탄복하였다.
황무 연간(222~229년)에 죽었다고 한다. 아들 서해(徐楷)가 작위를 잇고 병사를 통솔했다. 석정전투 참가 기록이 없는 걸로 봐서는 228년 이전에 사망한 듯하다. 또는 최대 229년을 몰년으로 치더라도 병석에 누워있던가 해서 참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정사와 비교하여 활약한 기간은 비슷하지만, 오군 장수 중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편. 적벽대전 때 동남풍을 비는 제갈량을 죽이려는 부분에서 본격적으로 나오며 이때부터 정봉과 꾸준히 세트로 등장한다. 판소리 적벽가에서도 '서성 정봉'이라며 세트로 불린다.
정사와 연의의 묘사가 많이 다른 편이다. 일단 같이 활약한 정봉은 실제 정사에서는 훨씬 후반기 인물이므로 여기서부터 다르고, 일화들도 조비가 손권을 오왕에 봉했을 때의 일화 외에 다른 일화들은 잘려나간 부분이 많다. 특히 합비 공방전에서 적진에 좌초되었다가 탈출한 일화 등이 잘렸다. 그리고 적벽대전과 이릉대전에서는 정봉과 함께 호위 취급을 받고 제갈량을 죽이려다 조운에게 굴욕, 유비와 함께 도망가는 손부인에게 굴욕, 형주 공방전에서 조인에게 밀려서 후퇴하는 등 굴욕적으로 나온다.
그러나 장수로서 활약하는 부분으로는 오나라 장수 중에서는 상위권이다. 위성계를 사용하는 부분에서는 원래는 위군이 이것에 쫄아서 전투없이 후퇴했지만, 연의에서는 위군이 이것 때문에 혼란에 빠져 오군의 기습에 대파당하는 것으로 나오고, 원래는 참가하지 않았던 석정 전투에도 등장하는 등 더 부각되어서 좋게 나온 부분들도 있어 주환, 전종같은 도독급으로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