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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진사 신분이었는데, 47세 되던 해에 계유정난을 당하자, 단종과 명운(命運)을 함께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라 믿어 과거의 꿈을 접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 복위를 꾀했다가 실패했던 순흥(順興)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 |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진사 신분이었는데, 47세 되던 해에 계유정난을 당하자, 단종과 명운(命運)을 함께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라 믿어 과거의 꿈을 접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 복위를 꾀했다가 실패했던 순흥(順興)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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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로는 『둔암일집(遯庵逸集)』 1책이 있다. 이헌경(李獻慶)의 『간옹집(艮翁集)』에 등강촌(登崗村)에서 은거했던 둔암(遯庵)의 지조를 기리는 기(記)가 실려 있다. | 저서로는 『둔암일집(遯庵逸集)』 1책이 있다. 이헌경(李獻慶)의 『간옹집(艮翁集)』에 등강촌(登崗村)에서 은거했던 둔암(遯庵)의 지조를 기리는 기(記)가 실려 있다. |
2022년 8월 23일 (화) 22:36 판
목차
정의
1407(태종 7)∼1490(성종 21). 조선 초기의 학자.
개설
1407년(태종 7)∼1490년(성종 21).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둔암(遯庵).
판도판서(版圖判書) 서진(徐晉)의 후예이다. 증조부는 좌사간(左司諫) 서충(徐衷)이고, 조부는 지군사(知郡事) 서사민(徐士敏)이고, 부친은 생원 서균(徐均)이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진사 신분이었는데, 47세 되던 해에 계유정난을 당하자, 단종과 명운(命運)을 함께하는 것이 선비의 길이라 믿어 과거의 꿈을 접고,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단종 복위를 꾀했다가 실패했던 순흥(順興)으로 들어가 두문불출하였다.
아들로는 종사랑(從仕郞) 서진(徐震)이 있다. 후에 계룡산 숙모전(肅慕殿)의 단종 위패를 모시는 곳에 여러 지사들과 더불어 배향되었다. 이상정(李象靖)과 채제공(蔡濟恭) 등도 그의 충절과 고결한 얼을 기렸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구고리사(九皐里社)에 봉향되었다. 묘소가 있는 곳은 영지산(榮之山) 이촌(伊村) 구거지 뒷편 산록에 있는 한성동(漢城洞) 묘좌(卯坐) 언덕이다.
저서로는 『둔암일집(遯庵逸集)』 1책이 있다. 이헌경(李獻慶)의 『간옹집(艮翁集)』에 등강촌(登崗村)에서 은거했던 둔암(遯庵)의 지조를 기리는 기(記)가 실려 있다.
가족
- 고조할아버지: 서원(徐遠)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21(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매년 11월 첫째주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 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공조전서.정3품 .장관)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명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진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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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고서원 추향제
단산면 사천1리에 소재한 구고서원은 단종때의 절신 돈암 서한정을 모신 서원이다.
서한정은 일찍이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단종(端宗)이 손위(遜位: 왕위를 사양함)하고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달성에서 가족을 이끌고 소백산(小白山)으로 들어가 은둔(隱遁)하였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었고, 구고리사(九皐里社)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돈암일집(遯庵逸集)』 1책이 있다.
서한정의 학문에 대한 언급은 많이 나타나 있지 않다. 다만 권득평이 쓴 제문에는 “청아한 절개와 탁월한 행실[淸操卓行]이 있었다.”고 칭찬하고 있다. 가장(家狀)에서도 학문과 관련한 것으로는 “과거를 폐하고, 어버이를 섬김에 효를 다하고 거상(居喪)에서는 정성을 다하여 예에 따라 어김이 없었다.
밤낮으로 단정히 앉아서는 성리의 학문에 마음을 다하였다.”라는 기록 정도가 남아 있다. 여기서의 예는 당대 학자들이 모두 실천하고자 했던 『주자가례』로 보여진다.
이러한 구문을 통해 성리학을 체득하고, 몸소 실천하려 했던 조선 전기 학자의 모습을 서한정에게서도 잘 발견할 수 있다. 또한 단종의 폐위와 함께 벼슬길을 접었던 그의 행적은 선비의 고고한 절개와 신하의 충을 실천한 것으로 후대에도 길이 남겨지게 되었다.
돈암 서한정을 배향한 서원으로 구고서원(九皐書院)이 있었으나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어 구고서당(九皐書堂)이라는 현판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현재 구고서원 현판과 여러 부속건물의 현판은 책실(冊室)에 보관하였었는데, 근래에는 소수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