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집
목차
정의
1865(고종 2)∼1897(고종 34). 조선 말기의 문신.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 고고고고고고조할아버지: 서경주(徐景霌 달성위 선조부마)
대구 서씨 원조(遠祖) 서한 시제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하탄방리에서 음력 10월1일에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통일신라 아간대부 서신일(徐神逸),내의령 서필(徐弼),내사령 서희(徐熙),문하시중 서눌(徐訥) 좌복야 서유걸(徐惟傑),평장사 서정(徐靖),우복야 서균(徐均) 판대부사 서린(徐嶙), 평장사 서공(徐恭) 추밀원사 서순(徐淳) 등 7대가 연속 재상이 되어 고려의 최고 문벌 귀족 가문으로 성장한다.
고려 초기에 나라의 기틀의 튼튼히 한 서필(徐弼)이다. 이어 손자 서희(徐熙)와 증손자 서눌(徐訥) 서유걸(徐惟傑) 서유위(徐惟偉) 서주행(徐周行), 고손자 서정(徐靖) 서존(徐存),서균(徐鈞) 서린(徐璘), 서원(徐元) 서공(徐恭) 서성(徐成) 서순(徐淳),서숭조,서희찬,서능(徐稜),서효손,서신계, 서린(徐鱗),서성윤,서념,서원경,서충,서신,서윤,서후상,서윤현 등이 15대를 이어 재상이 되었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개설
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윤성(允成). 궁내부특진관 칙임관4등 서공순(徐公淳)의 아들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882년(고종 19) 진사시에 합격하고, 1885년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1888년 도당록(都堂錄)에 오르고 이듬해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을 지냈다.
그 해 대신(臺臣)으로 연차(聯箚)에 참가하지 않은 죄로 귀양갔으나 곧 풀려났다. 1890년 부교리를 지내고 1892년 황단춘향(皇壇春享) 때 향관(享官)에 임명된 것으로 가자(加資)되어 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1894년 갑오경장 이후 군국기무처회의(軍國機務處會議)에 회의원이 되고 그 해 공무아문참의(工務衙門參議)를 역임하였다.
인천항의 대표적 상인은 1898년 당시 외동(外洞)에 살고 있던 서상집(徐相集, 1842∼1896)이었다. 그는 상인이면서도 정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고, 관직에까지 올랐다. 대구 서씨인 그는 인천의 거상, 부상, 호상으로 불릴 만큼 인천항의 상업계를 대표할 만한 상인이었다. 1898년 당시 45세였던 그는 세평에 걸맞은 가옥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호적 대장을 보면 그가 소유하고 있던 가옥은 와가 56간에 초가 6간으로 도합 62간인 가옥 한 채와 초가 12간의 공가(空家) 등 모두 74간이었는데, 외동에서 제일 큰 규모였다.
서상집은 1894년 7월 27일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가 발족할 당시 총재 김홍집(金弘集), 부총재 박정양(朴定陽) 등과 더불어 18인의 회의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물론 그가 군국기무처의 핵심 인물이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상인인 그가 부호군(副護軍)으로서 군기처 회의원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상집이 어떻게 군기처 회의원이 될 수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그는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유길준과 가까운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국군기무처 발족 당시 유길준 역시 외무 참의(外務參議)로 회의원이 되었다. 이로 미루어 보면 혹시 유길준의 천거 내지 추천이 작용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만약 추측대로라면 유길준이 서상집을 끌어들인 까닭은 상업계나 재계 인사의 포섭과 이를 통한 정치 자금 조달 등에 목적을 두었던 때문이 아닐까 짐작된다.
서상집이 특히 관심을 두어 벌였던 사업은 선박을 이용한 해운이나 무역이었다. 1896년 11월 월미도 남쪽의 장탄지(張灘地)에 선박 조선소(船舶造船所)와 창고, 그리고 선박의 수보소(修補所)의 개설을 추진하기도 하였고, 1899년 7월에는 미국 금광 회사 소유의 기선을 비롯한 세 척의 선박을 고용하여 해운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는 이렇게 모은 자산을 토지의 매입에도 투입하였던 것 같다. 1896년 1월 각국의 조계(租界)에 편입된 토지를 보면 서상집 소유의 답(畓) 5두락(斗落)과 전 1경(頃)이 들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뿐 아니라 1902년 3월 15일 인천항 외축현에 있던 전답 5,630평을 일본 거류지에 기증하기도 하였다. 적지 않은 토지를 무엇 때문에 일본에 기증하였 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지만, 해운이나 무역 활동을 통하여 축적한 자본 가운데 일부를 상당한 규모의 토지 매입에 투입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상업계와 정계를 넘나들던 그는 1902년 7월 5일 인천항의 감리(監理)가 된다. 그의 감리 임명은 당시 인천 사회에서 천만 뜻밖의 일로 받아들일 만큼 파격적인 인사였다. 서상집이 어떻게 해서 인천항의 감리가 되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짐작해 볼 수 있는 단초는 있다. 그와 가까웠던 유길준은 1902년 당시 일본에 망명 중이었다. 일본에서 유길준은 황제를 시해하고 의친왕을 옹립한 다음 망명자 중심의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려는 거사를 꾸미고 있었다. 여기에는 일본 육군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청년 장교들도 관여되어 있었다. 유길준은 거사에 소요되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평소에 가까운 관계라고 여기고 있던 서상집에게 인편을 통하여 계획을 설명하고 공작금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서상집은 이 사실을 즉각 인천 감리 하상기(河相驥)에게 밀고하였고, 이어 하상기의 지시에 따라 서상규를 유길준에게 보내 거사 계획을 확인하게 하였다. 서상규는 인천으로 돌아와 서상집에게 모든 사실을 고하였고, 이로써 유길준의 거사 계획은 백일하에 드러나고 말았다. 1902년 6월에는 유길준과 접선하였던 국내의 일당이 체포되기에 이르렀다.
서상집이 인천항 감리로 임명된 것은 이 일이 있은 직후인 7월 5일이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미루어 보면 서상집의 감리 임명은 유길준의 거사를 미리 막은 공로에 대한 포상일 가능성이 높다. 감리로 임명된 지 불과 40여 일 만인 8월 17일에 해임되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 후 그의 활동이나 행적 가운데 뚜렷한 것은 별로 나타나지 않지만, 그의 부는 상당 기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광복 전의 어느 시기엔가 그의 부력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장위공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
이천시는 외교 협상가로서 장위공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徐熙) 선생의 숭고한 정신을 알리고자 서희 선생과 관련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역사 문화 축제를 연다.
글로벌 축제를 지향하며, 우리나라 주변에서 발생하는 여러 갈등 상황에 주목해 평화적 소통과 교류에 대한 방법을 찾아보고, ‘외교, 평화, 역사’를 테마로 사회적 공감대를 형성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효양산 은선사
효양산 은선사 (孝養山 隱仙寺)
경기도 이천시 부발읍 효양산(孝養山)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승려 의상이 창건한 사찰.
대한불교조계종 제2교구 본사인 용주사(龍珠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의상(義湘)이 부석사(浮石寺)를 창건한 뒤 이천지방에 16사찰을 지을 때 설봉산 영월암(映月庵)과 함께 창건하였다고 한다.
일설에는 효양산에 있는 서씨의 시조 서신일(徐神逸)의 묘와 관련시켜, 신라가 망하자 이 산속에 은거한 서씨가 지은 절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문인식(文仁植)이 중건하였으나 그 뒤 다시 폐허화된 것을 1764년(영조 40)에 읍민 김씨(金氏)가 선영을 위하여 중창하였다. 1937년에 주지 김상필(金商珌)이 광명전(光明殿)을 신축하였으나, 6·25 때 소실되어 완전히 폐사로 남았던 것을 1979년 봄에 주지 김영규(金榮奎)가 대웅전과 요사채를 신축하고 절 이름도 은선암에서 은선사로 바꾸었다. 이 절에는 창건 당시에 봉안하였다는 석불 1위가 있었다고 하는데, 6·25 때 절 부근에 살고 있던 신도들이 포격으로부터 불상을 보호하기 위하여 땅 속에 묻었다고 하나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희성당(希聖堂)
신라 52대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대부(阿干大夫)를 지낸 서신일(徐神逸)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신라의 국운이 기울자 벼슬에서 물러나 이천 효양산(孝養山)에 들어가 스스로 처사라 하고 희성당(希聖堂)을 짓고 후진교육에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그 후 후손들이 은거지인 이천을 본관으로 삼았다고 한다. 서신일은 80살이 넘도록 자식이 없다가 신령의 아들이 환생한 사슴을 구해주고 아들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그렇게 얻은 아들이 서희(徐熙) 장군의 아버지 정민공(貞敏公) 서필(徐弼)이다. 서필은 광종 때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으로 솔직한 간언으로 왕을 보필하여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서희 역시 고려의 이름난 외교가이며 문무를 겸비한 명신이었다. 서희는 거란의 침입을 탁월한 화술로 굴복시켜 물러가게 했으며 압록강을 국토의 경계로 확정짓는데 중요한 기틀을 마련하였다. 후손들 역시 고려 왕조의 충신으로 가문을 빛냈으며, 조선이 개국된 후에도 절개를 지켰다. 이천서씨는 인주(인천)이씨, 해주최씨, 남양홍씨와 더불어 고려시대 4대 명문가문으로 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