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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전라남도 서부지역 의병대장 이기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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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도로명과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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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라남도 서부지역 의병대장 이기손''' =
  
  
 
== 이야기 ==
 
== 이야기 ==
광주의 거리에는 그 지역을 빛낸 인물들의 이름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충장로|충장로(忠壯路)]]는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약한 [[김덕령|김덕령(金德齡)]]의 시호에서 유래하였고, 그의 스승 [[고경명|고경명(髙敬命)]]의 호에서 따온 [[제봉로|제봉로(霽峰路)]]와도 나란히 이어진다. 학문과 의병 활동의 양축을 대표하는 이들의 이름은 광주 도심을 관통하며, 지역 정체성을 구성하는 상징으로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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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손|이기손(李起巽, 1877~1957)]]은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말 의병장으로, 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운 [[한말_호남_의병|호남 의병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용진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항일 의병부대를 이끌었으며, [[용진산_전투|용진산 전투]]를 지휘하며 지역 의병의 결집을 주도하였다.
  
[[정충신|정충신(鄭忠信)]]의 군호에서 비롯된 [[금남로|금남로(錦南路)]] 역시 그러한 예다. 유교 학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김인후|김인후(金麟厚)]]의 호를 딴 [[하서로|하서로]], [[송순|송순(宋純)]]의 호를 따른 [[면앙로|면앙로]], [[정철|정철(鄭澈)]]의 문학적 별칭에서 유래한 [[송강로|송강로]] 등이 있다. 이처럼 이름과 도로가 연결된 구조는 한 인물의 정신이 장소와 결합하여 일상 공간 속에서 기억되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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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 세력이 확산되자 일제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감행해 호남 일대의 의병을 집중적으로 탄압하였고, 이기손은 부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의 항전이 어려워지자 그는 만주와 러시아로 이동하여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전통은 이어진다. 화가 [[오지호|오지호(吳之湖)]]를 기리는 [[지호로|지호로]], 서화가 [[허백련|허백련(許百鍊)]]의 호에서 유래한 [[의재로|의재로(毅齋路)]], 성악가 [[임방울|임방울(林芳蔚)]]의 이름을 딴 [[임방울대로|임방울대로]] 등이 그 예다. 외국인 의료선교사 [[서서평|서서평(Johanna E. Schepping)]]의 봉사를 기려 조성된 [[서서평길|서서평길]], 음악가 [[정율성|정율성(鄭律成)]]의 이름에서 유래한 [[정율성로|정율성로]] 또한 광주가 품은 다양한 인물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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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광주에는 의병장 금재 이기손의 이름이 도로명 [[금재로]]에 남아 있다. 금재로는 그의 호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지역민들이 그를 ‘호남의 의로움’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광주 [[송정공원]]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송정공원_이기손_장군_의적비|이기손 장군 의적비]]가 세워져 있다.
  
광주의 도로명은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닌, 그 지역이 기억하고자 하는 인물과 정신의 자취다. 도시의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레 그 위에 각인된 삶과 유산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곧 광주라는 도시가 쌓아온 문화와 역사의 층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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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손의 생애는 일제강점기 광주·호남 지역이 보여준 항일의식의 결정체로, 그의 흔적은 의병사와 지역사, 그리고 민중 저항의 서사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 스토리 그래프 ==
 
== 스토리 그래프 ==

2025년 11월 26일 (수) 14:52 기준 최신판

전라남도 서부지역 의병대장 이기손

이야기

이기손(李起巽, 1877~1957)은 전라남도와 광주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한말 의병장으로, 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서 싸운 호남 의병운동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용진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항일 의병부대를 이끌었으며, 용진산 전투를 지휘하며 지역 의병의 결집을 주도하였다.

의병 세력이 확산되자 일제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을 감행해 호남 일대의 의병을 집중적으로 탄압하였고, 이기손은 부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국내에서의 항전이 어려워지자 그는 만주와 러시아로 이동하여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오늘날 광주에는 의병장 금재 이기손의 이름이 도로명 금재로에 남아 있다. 금재로는 그의 호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지역민들이 그를 ‘호남의 의로움’을 상징하는 인물로 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광주 송정공원에는 그의 공적을 기리는 이기손 장군 의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기손의 생애는 일제강점기 광주·호남 지역이 보여준 항일의식의 결정체로, 그의 흔적은 의병사와 지역사, 그리고 민중 저항의 서사 속에 여전히 살아 있다.

스토리 그래프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