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貞和, 1923生, 비구니)
정화(貞和)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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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정화(貞和) |
법호 | 난곡(鑭梏) |
속명 | 이정화 |
출생 | 1923.02.06. |
출가 | 1956년 |
입적 | |
사찰 | 수원 정혜사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10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정화(貞和)스님은 법희스님을 은사로 충남 보덕사에서 출가하였으며 자기 성찰과 자비 실천의 화신인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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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 함북 경성군 출생 |
1942 | 동라 남여고 졸업, 교직생활 5년 |
1956 | 충남 보덕사에서 법희(法喜)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6 | 보덕사에서 소천(韶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소천스님(1). 소천스님(2)) |
해인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
1963~1988 의왕 | 백운사 주지 |
1988~1997 | 수원 정혜사 주지 |
2004 | 수원 정혜사 주지 |
문중 | 삼현(三賢)문중 |
수행지침 | 나는 수행인이다. 자기 성찰과 자비 실천 |
생활신조 | 가난한 사람들이 마음 편히 다닐 수 있는 사찰 만들기 |
저서 및 작품 | 불광(불교와의 만남), 빛의 샘(깨어있는 눈빛들) |
상훈 | 군부대 감사패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법공(法空)・지한(智閑)・지인(智印)・목윤(苜玧)・덕연・수현(首賢)・은공(恩工)・동현(東玹)・경민(庚愍) |
활동 및 공헌
출생
난곡(鑭秳) 정화(貞和)스님은 1923년 2월 6일 함경북도 주을에서 아버지 이경수와 어머니 최생금 사이에서 태어났고, 해방과 더불어 서울에 오게 되었다. 본관은 공주이며, 이름은 이정화이다.
소천(韶天)스님과의 인연
6·25전쟁 때 마산에 피난을 와서 우연히 ‘도덕초기회’라는 종교단체에 이끌려 다니다가 회의를 느끼던 차에 소천(韶天) 큰스님을 만나고 불법을 알게 되었다. 큰스님은 그 모임에서 『금강경』을 10일 동안 설하셨다. 정화스님은 경의 첫머리‘여시아문(如是我聞)’부터 마음에 와 닿기 시작하여 환희심으로 금강경 강의를 일언반구도 놓치지 않았다. 강의가 끝난 후 스님은 종교에 대한 새로운 눈뜨게 되었고, ‘내가 이 시점에서 참으로 올바른 종교를 선택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회 부흥회로 다니면서 설교를 듣는 등 여러 가지 길을 찾아 헤매던 정화스님은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확고한 판단이 서서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 법문을 듣고 큰스님께 무례한 질문도 많이 했지만, 오히려 큰스님은 답을 해주시면서 지혜로운 질문이라며 출가를 권유하셨다.
출가
그 인연으로 35세 되던 해 봄, 스님은 그 당시 비구니 선지식으로 덕망이 높으신 법희스님을 은사로 충남 덕숭산에 위치한 보덕사에 입산하여, 소천(韶天)스님을 계사로 모시고 수옥스님께서 계를 설해 주셨다. 입산하여 유년 시절을 더듬어 보니 확실히 모든 것이 인연법(因緣法)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열 살도 안된 어린 시절에, 밤에 자다가 소변이 마려워 요강에 앉으면 ‘이 소변보는 두발 달린 동물이 과연 무엇일까? 사람이 살다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하는 이런 생각에 잠을 설치는 일이 가끔 있었다. 또 어머니의 엄격한 자식 교육에 반항심이 생겨 화가 날 때는 ‘화난 내 얼굴이 불만하겠구나! 그러나 나는 너에게 지지 않을 거야!’ 하고는 어머니 장롱에 붙어 있는 작은 거울 앞에서 억지로 웃어 보면서 ‘옳지! 이제는 내가 이겼다.’하고 만족해하기도 했다.
여학교 시절 체육 시간에 학교 앞산을 오를 때였다. 산 정상에 올라 휴식 시간에 동무들은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스님은 혼자 앉아서 멀리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농촌 마을 여기 저기 초가집이 마치 조개껍질을 엎어놓은 듯했는데, 대자연에 비하여 너무 초라해 보였다. 그러면 ‘저 좁은 공간 속에서 사람들은 희비고락(喜悲苦樂)을 겪어가면서 산단 말인가? 인생이란 어떤 것인가?’하고 사색에 잠기곤 했다.
또 교직 생활을 할 때, 아직 불교에 대해 모르던 시절에 일본어로 된 성경책을 이리저리 뒤적이다가 마음에 드는 구절을 서투른 붓글씨로 화선지에 옮겨서 자취방 벽에 붙여 놓고 흐뭇해한 일도 있었다. ‘행복할 지어다. 마음이 가난한 자, 그 자신을 보리라.’하는 구절이었다. 불교를 알고 보니 바로 마음을 비우면 불성을 깨닫는다는 뜻과 일치되었다.
어느 때는 스님 자신이 어떤 껍질 속에 갇혀 있는 것만 같아 보이지 않는 껍질을 깨고 나와야 될 것만 같은 생각에 잠기기도 하였다. 이 모든 것이 불인연(佛因緣)으로 이어지는 숙세의 불종자(佛種子)였던 것이다.
백운사(白雲寺)에 주석
세월이 흘러 정화스님은 경기도 의왕시에 위치한 백운사(白雲寺)에서 살았다. 산 속이라 아주 조용하고 산골짜기에 물이 흐르는 그 곳의 생활은 여가 시간이 많아 부처님이 설하신 『금강경』과 『반야심경』을 탐독하면서 그 속의 참뜻을 탐구하였는데, 몇 년 끝에 확연히 문자 밖의 이치(理致)가 보였다.
또 한편으로 탄허 큰스님의 동양 사상에 심취되어 큰 스님을 많이 따라다녔다. 또 오대산 월정사에서 한 철을 날 때는 유교, 도교, 장자를 비롯하여 불교 전반에 걸친 공부와 화엄경 강의까지 들었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포교
점차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하자 불은(佛恩)을 갚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하여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일반 신도, 어린이, 청년 등을 상대로 법회를 하고 수원 정혜사에 옮겨와서는 세무대, 동남대, 한양대 등의 법회를 보면서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가끔씩 ‘내 자신을 깨닫지 못한 처지에서 무슨 말을 할까.’ 싶어 부끄러울 때가 있다고 한다.
스님은 ‘이 생을 마칠 때까지 게을리하지 않고 자기 성찰을 하면서 가슴 속에 하루하루 자비를 키우는데 전념을 다 하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스님의 수계 제자로 법공(法空)・지한(智閑)・지인(智印)・목윤(苜玧)・덕연・수현(首賢)・은공(恩工)・동현(東玹)・경민(庚愍)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462~465.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45.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186, 190.
- 다음카페, 정화스님 법문 https://m.cafe.daum.net/junghyesa
- 다음 블로그, 광덕 큰스님을 뵈올 때(정화스님의 글) https://blog.daum.net/buddhachitta/102
- 다음 블로그, 사물놀이 강습 https://blog.naver.com/jeota/22119540779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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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貞和)스님 | 본항목 | 정화스님(貞和, 1923~) | 貞和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화스님(貞和,_1923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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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스님(貞和) | 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 |
정화스님(貞和) | 법희스님(法喜) | ~의 수계제자이다 | |
정화스님(貞和) | 예산 보덕사 | ~에서 출가하다 | |
정화스님(貞和) | 소천스님(韶天)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정화스님(貞和)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정화스님(貞和) | 의왕 백운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정화스님(貞和) | 수원 정혜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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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수원 정혜사 :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10
주석
다른 비구니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