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원스님(性源, 1918生, 비구니)
성원(性源)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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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성원(性源) |
법호 | |
속명 | 신말연 |
출생 | 1918.12.15. |
출가 | 1950년 |
입적 | |
사찰 | 해인사 국일암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46(치인리 10)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성원(性源)스님은 백장청규의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생활신조로 삼고 무소유의 삶을 실천하였으며, 기도정진으로 고난 질병을 극복하셨으며, 특히 국일암 보수와 중창불사로 가람을 정비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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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 | 경남 마산 출생 |
1950 | 해인사 약수암에서 오전(伍田)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1 | 인곡(麟谷) 창수(昌洙)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0 | 해인사 국일암 주지, 국일암 가람 보수와 중창 불사 |
1961 | 통도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80 | 국일암 앞 요사채 불사 |
1983~1993 | 진주 월명암중창 불사 |
1984 | 국일암 삼성각 불사 |
1993 | 국일암 요사채 불사 |
1993~2004 | 국일암 주석 |
2012 | 입적 |
문중 | 청해(靑海)문중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법경(法炅)·지행(智行)·도공(道空)·유찬·각명·진조(眞照)·지광(智光)·지은(智恩)·명운(明雲)·명국·명법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회진(會眞, 4)→정은(正恩, 5)→재희(在喜, 6)→오전(伍田, 7)→성원(性源, 8)→법경(法炅, 9), 지행(智行, 9), 법룡(法龍, 9), 도공(道空, 9), 각명(覺明, 9), 진조(眞照, 9), 지광(智光, 9), 지은(智恩, 9), 명운(明雲, 9), 유법(有法, 9) |
활동 및 공헌
출가
성원(性源)스님은 1918년 12월 15일 경남 마산시 상남동에서 아버지 신평균의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평산이고, 이름은 신말연이다. 마산 성주사에서 성철 큰스님의 법문을 듣고 감화를 받아 1950년 해인사 약수암으로 출가를 하였으며, 평생 큰스님을 부처님처럼 공경하고 공부의 의지처로 삼고 살아왔다.
수계
모든 출가 수행자가 그 신심과 수행력을 인정할 정도로 성원스님은 열심히 정진해왔다. 사제인 장일스님과 함께 남해 보리암 앞에서 장좌 100일 기도를 하며 힘을 얻기도 하였다.
스님은 6·25전쟁 전에 출가를 하였지만 계는 늦게 받았다고 한다. 출가 첫 날에는 도량 청소부터 말끔히 하였다. 워낙 알뜰하게 일을 잘하는 스님인지라 아침이면 불씨도 자신의 것을 쓰지 않고 남에게 빌려서 밥을 하였다. 오후에는 밭에 가서 나물을 뜯었고, 깜깜한 밤이 되면 산에 가서 도토리를 주웠다. 먹을 것이 변변찮고 어려운 그 시절에 도토리로 묵을 만들어 먹기 위해서였다. 어떤 때는 하도 배가 고파서 덜 익어서 파란 도토리를 갈아서 죽을 끓여 먹기도 했다.
스님은 요즘 사람들이 건강하지 못한 것은 신심이 없어서라고 생각한다. 옛날에는 비록 배는 고팠지만 지극한 신심으로 지금보다 건강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였기 때문이다. 성원스님은 1950년 이전에는 약수암에서 살았고, 정화 전에는 진주 가는 길목에 있는 월명암에서 대중을 모아 선방을 하기도 하였다.
스님은 1951년 34세에 인곡선사에게 사미니계를 수지하였고, 1961년 44세에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율사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하였다. 옛날에는 큰 행사가 있을 때 계를 한꺼번에 수계하였는데, 그때 스님은 상좌와 함께 계를 받았다고 한다. 스님은 이 일을 두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하는데, '계를 받은 날이 상좌와 같으니 서로 도반인 셈' 이라는 것이다.
국일암과 진주 월명암 불사
처음 석남사에서 한 철을 나고, 진주 월명암에서는 대중들과 함께 하였다.
그 당시에는 정화된 곳이 석남사와 진주 월명암 두 군데 뿐이었다. 석남사 문중들과 같이 진주 월명암에서 정화 불사 하고 내려와서 살다가 영월스님이 국일암을 비워주어서 스님이 주지를 맡았다.
그런데 국일암은 도량이 세서 지내기가 몹시 힘들었다고 한다. 대중이 잘못 살면 팔다리가 부러지는 일도 발생하였는데, 아무나 살 수 있는 도량이 아니었던 것이다.
스님은 국일암 불사를 하며 여러 채의 건물을 지었고, 탁발을 해서 땅을 매입하여 진주 월명암을 새로 중건하였다. 탁발을 해서 불사를 하다 보니 힘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머리에 바람이 들어 겨울은 물론 한 여름에도 털모자를 쓰고 다니기도 했다.
성원스님은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나오는 ‘배슬(拜膝)이 여빙(如氷)이라도 무연화심(無戀火心)하며, 아장(餓腸)이 여절(如切)이라도 무구식염(無求食念)이니라.’ 라는 글귀를 염송하면서 무릎 연골이 다 닳을 정도로 기도 정진하였다.
10여 년에 걸쳐 어렵게 불사를 하고 국일암 상좌들이 합심하여 지은 진주 월명암을 성원스님은 공부하는 스님에게 내어 드렸다. 그 후 10년 만에 다시 진주 월명암으로 돌아와 보니 그 곳에서 공부하던 학인스님이 절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아서 도량정리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다. 이에 스님은 마지막 불사로 생각하고, 산에 가서 나무에 살고 있는 벌레를 다 잡아낸 후에 목재로 사용했다. 다리가 아프고 몸도 성치 않았지만 진주 월명암을 위해 여름 내내 불사를 하였다. 먹고 살기에도 빠듯한 나날이었으나 부처님의 은혜를 갚기 위해 불사를 계속했다고 한다.
기도 정진으로 고난 극복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성원스님으로부터 진주 월명암을 넘겨받았던 스님이 자신의 임의대로 상가를 다른 사람에게 주는 일이 발생했다. 문제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예전에는 땅을 구두(口頭)로 사고팔았는데, 그것이 문제가 된 것이다. 측량이 잘못된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법당 쪽과 산 쪽의 측량을 바로잡다 보니 자연히 일이 많아졌다. 이런 잘못된 일들을 바로 잡기 위해 성원스님은 국일암에서 진주 월명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스님은 한때 오대산에서 만공 큰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하면서 하루하루 힘있게 살았다. 예기치 못한 일이 생기면 단식을 하면서 장좌 기도를 하여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스님은 “요즘 스님들은 장시간 기도를 못하지만 예전에는 보통 2~3시간씩 신심이 날 정도로 기도를 했었습니다. 기도에는 보이지 않는 힘이 있습니다.”하며 후인들에게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스님은 윤필암, 다솔사, 진주 월명암, 국일암, 정취암, 극락전 등 제방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상기가 올라 남해 보리암 밑에 가서 기도를 할 때는, 먹지도 않고 잠도 안 자며 수련정진(修練精進)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정진할 힘이 없으면 쉬었다 해야 하지만 스님은 아픈 몸을 무릅쓰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끝까지 해냈다.
백장청규의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을 생활신조로 삼고 있는 스님은 게으른 수행자를 보면 호되게 꾸짖는 호랑이 스님이다. 스님의 신심과 정진의 힘은 뭇사람들이 감히 따라가기가 힘들 정도이다.
간혹 상좌들이 스님의 옷이 낡아 해드리면 '옷이 작으면 작은 대로 입고,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형편에 맞춰 살아야 한다.'고 하며 도리어 혼을 냈다. 스님의 생각은 항상 바르기 때문에 상좌들은 스님의 말씀이 곧 법이라고 생각한다. 상좌들뿐만 아니라 대중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국일암 선방 개원
성원스님은 백년암 뒤에 있는 나무들을 잘라 허물어져가는 국일암을 손수 새로 짓고 요사채 불사도 하였다. 국일암 불사가 이루어지자 큰 방에 다 앉지 못할 정도로 많은 대중들이 모여들었다. 이에 스님은 해인사에서 가장 먼저 비구니 선방을 개원하여 대중옹호에 힘썼다. 대중을 사랑하는 마음은 불보살님의 자비와도 같아 항상 손수 탁발을 해서 대중을 옹호하였다. 또 공부를 하는 중에도 비구니 선방을 개원하겠다는 대원력(大願力)을 세워 기도를 하였다.
국일암은 승병대장 국일선사를 위해 인조대왕이 희사한 절로서 지금도 국일선사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성원스님이 부임하기 전에는 비구스님의 처소였는데, 수행하기 힘들 정도로 환경이 열악하였다.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모두 성원스님의 원력 덕분이다.
병고를 물리친 기도공덕
스님은 30대 중반에 병명도 모르는 병이 든 적이 있었다. 배가 많이 나와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상태로 고생을 하였는데, 참다못해 병원에 갔더니 일본인 의사가 일본말로 '곧 죽을 것 같으니 먹을 것이나 잘 먹으세요.' 라고 말했다. 당시 의술로는 치료할 마땅한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스님은 '어떻게 승려가 병원에서 죽을 수 있겠는가.' 하며 법당에 가서 49일 동안 장좌불와 기도를 하였다. 기도를 하는 동안 아미타불 염송을 쉬지 않고 계속하였다.
49일째 되는 날 아침이었다. 비몽사몽간에 꿈을 꾸고 일어났는데 (신기하게도 대중 15명이 모두 똑같은 꿈을 꿨다.)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화장실에 갔더니 콩비지 같은 것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암덩어리 같은 게 남김없이 쏟아져 나오는 듯했다. 그러고 나자 그동안 꼼짝도 못했던 몸이 가뿐해지면서 속이 시원해졌다.
성원스님은 49일 동안 장좌불와로 신심을 내고 기도한 공덕으로 병고가 쾌차되었다고 믿고, 부처님의 가피에 보답하기 위해 월명암을 중건하였다.
고령의 65세에 10여 년에 걸쳐 월명암 불사를 한 뒤에 국일암으로 온 스님은 지장전을 비롯하여 여러 불사를 회향하였다. 성원스님이 이렇듯 꾸준히 불사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행하는 아미타불 염송과 경전을 독송하는 데서 오는 힘, 그리고 젊은 시절부터 끊임없이 정진 해온 힘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큰스님 시봉
성원스님은 성철 큰스님을 부처님처럼 믿고 의지하며, '큰스님 말씀은 곧 법' 이라고 생각하고 그 뜻을 따랐다. 그리고 옷과 음식, 간(소금) 없는 빈대떡을 만들어 보내기도 하고, 상좌들이 곶감을 깎아놓으면 일 년치 곶감을 미리 챙겨놓기도 하였다.
솜씨 좋은 비구니스님들께 부탁하여 큰스님의 옷을 해드리고, 아이들 속옷부터 어른들 옷까지 모두 손수 장만하였다. 외출복을 제외하고 스님이 할 수 있는 한 대중들과 큰스님의 옷을 직접 해 드릴 정도로 정성을 다하였다. 상좌들의 말에 의하면, 평소 스님은 하루에 경전 한 권을 다 읽는다고 한다. 그리고 젊은 시절에는 참선을 주로 하였는데, 지금은 아미타불 염송을 중점적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스님을 시봉하는 일이 힘들지 않도록 자신의 일을 남한테 시키는 법이 없다.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행자인 성원스님은 세수 아흔을 목전에 둔 고령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직접 빨래를 하고 밭을 매고 공양도 손수 다 하며 상좌의 시봉을 받지 않고 있다.
성원스님은 2004년 세수 87세로 국일암에서 수행 정진 중이다. 수계제자로는 법경(法炅)·지행(智行)·도공(道空)·유찬·각명·진조(眞照)·지광(智光)·지은(智恩)·명운(明雲)·명국·명법스님 등이 있다.
해인사 국일암
국일암의 창건 연대는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중건한 기록만이 있는데 부휴대사의 문하인 벽암 각성대사가 이곳에서 오래 주석하면서 인조 15년 곧 서기 1637년에 중건하였다고 전한다.
벽암스님은 일찍이 글씨와 군법에 능통한 스님으로, 조선조 인조임금 때에 남한산성을 축성한 공적으로 인조임금으로부터 원조국일대선사라는 시호를 받았는데, 국일암이라는 이름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그 뒤에 정인스님이 해방 전후에 두차례에 걸쳐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는 부휴스님, 고한스님, 벽암스님의 부도들이 모셔져 있다.
국일암 강원은 1918년 개원한 통도사 옥련암 비구니 강원보다 이른 시기인 1913년 경 개원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최초의 비구니 전계사인 정행 스님은 7세에 불문에 들어와 삼선암 성학 스님을 은사로 득도하여 비구니 강원인 국일암에서 비구니 강사 강유겸 스님에게 이력을 보았다고 하며(운문회보 5호, 1983년) 비구니 3대 강백 중 한 사람인 정암혜옥스님(1901~1969)이 국일암에서 사집과를 이수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또한 혜월성문(1893~1974) 스님은 “20세에 구족계를 수지하고 국일암에 계시던 타불 스님에게 대교과를 마쳤다.”(『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1. pp.51-52.) 국일암 홈페이지 https://gukilam.com/default/01/02.php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 뜨란출판사, 2007, pp. 126~132.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85.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333.
- 오마이뉴스, 사명당은 알면서 벽암 각성 스님은 왜 모를까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53748 (2012년)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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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性源)스님 | 본항목 | 성원스님(性源, 1918~) | 性源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원스님(性源,_1918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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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스님(性源) | 청해문중(靑海) | ~의 일원이다 | |
성원스님(性源) | 오전스님(伍田) | ~의 수계제자이다 | |
성원스님(性源) | 해인사 약수암 | ~에서 출가하다 | |
성원스님(性源) | 인곡스님(仁谷)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성원스님(性源)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성원스님(性源) | 해인사 국일암 | ~을(를) 중창하다 | |
성원스님(性源) | 진주 월명암 | ~을(를) 중창하다 | |
성원스님(性源) | 해인사 국일암선원 | ~을(를) 건립하다 | |
성원스님(性源)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문경 대승사 윤필암, 진주 월명암, 합천 해인사 국일암, 산청 정취암, 사천 다솔사 등 |
지도
- 해인사 국일암 :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리 46(치인리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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