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영춘스님(永春, 1894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4월 26일 (금) 08:23 판 (릴레이션 데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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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영춘(永春)스님은 통도사 보타암을 창건하고 불사를 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894 경남 창원 출생
1924 통도사 동운암에서 금룡(金龍)스님을 은사로 출가
1924 통도사에서 해담(海曇)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광은스님으로부터 사집[1] 수료
1925 금강산 법기암, 오대산 상원사, 지장암 등 안거 이래 20안거 성만, 통도사에서 해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29 통도사 강원에서 구하(九河)스님으로부터 능엄경 수료 및 “신오(信悟)”법호 받음
1959 도반 스님들과 탁발로 통도사 보타암 창건, 보타암 가람 불사
1993 통도사 보타암에서 입적 (세수 100세, 법납 70세)
문중 계민문중(戒珉)
수행지침 일념회광시(一念廻光時) 만업영소멸(萬業永消滅) 견성즉성불(見性卽成佛) 시위진참회(是爲眞懺悔)
수계제자 재근(在根)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219
사진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222

신오(信悟) 영춘(永春)스님은 1894년 5월 15일 경남 창원시 동면 무성리에서 아버지 이규헌과 어머니 김씨 사이의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며 이름은 이이내이다. 스님은 세수 31세 되던 해인 1924년 불연이 닿아 금룡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게 되었다. 영춘스님이 입적한 뒤 안타깝게도 행장을 모두 불태워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사미니계와 비구니계를 옛날 통도사에 주석하시던 율사 해담스님께 수지하였다고 한다.

수행

스님은 통도사 강원의 운허스님 문하에서 능엄경을 수료하고,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비구니 스님들이 수행할 때 여름을 나러 자주 갔으며, 한암 큰스님께서 오대산 지장암에 계실 적에 큰스님 회상에서 여름 한 철을 안거하신 적이 있다고 한다.

양반 집에서 태어나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스님한테는 여자라는 이유로 한자를 가르치지 않아 경전을 배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한글로 된 경전만 보았다고 한다.

통도사 보타암 창건

영춘스님은 세수 66세 되던 해인 1959년, 도반스님들과 탁발을 하여 현재의 보타암을 세웠다. 스님은 평소에 선의의 거짓말도 하지 않을 만큼 성격이 강직하여 남을 속일 줄을 몰랐고, 남에게 싫은 소리를 한 적도 없었으며, 올곧은 성격 만큼이나 정신 또한 맑았다. 아무리 피곤해도 누워 쉬는 법이 없었으며 항상 앉아서 정진을 하거나, 농사를 지을 때 밭에서 풀을 뽑으면서도 염불을 할 정도로 수행의 고삐를 잠시도 늦추지 않았다.

평소 스님은 아미타경을 하루 한번씩 독경하였으며, 연세가 많아진 후에는 염주를 돌리며 항상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였다. 스님은 기도와 정진이 일상생활의 전부였으며, 탁발을 하면 시주받은 쌀을 모두 골고루 섞어 부처님께 마지를 지어 올린 후 탁발을 해 주신 분들의 축원을 한 뒤에야 공양을 하였다.

대쪽같이 올곧은 성품

쌀이 귀하던 시절, 여름에 보리쌀이 들어오면 고루 섞어서 마지[2]를 지어 올렸다. 성격이 철두철미 하여서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룬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고, 한번 계획하여 정한 일은 짜여진 시간에 반드시 해야만 했다. 또한 부처님을 시봉하며 모시는데, 그 정성은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하다못해 시장에 가서 과일 한 개를 고르더라도 제일 좋은 것이나 큰 것만을 골라 부처님 전에 올렸는데, 물건 값을 절대 흥정하지 않고 상인이 달라는 대로 값을 다 주고 샀다.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고귀한 것에 값을 매겨 흥정을 하는 것은 정성이 아니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대쪽같이 강직한 성격의 스님은 자신이 나이가 많다거나 또는 스님이라 해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뭐든지 먹을 것이 생기면 대중을 전부 불러 모아 함께 똑같이 나눠 먹는 것을 철칙으로 하였으며, 혼자서 무엇을 먹는 일은 전혀 없었다. 스님의 상좌 재근스님이 어른을 조금 더 잘 모시고 싶은 마음에 그 해에 처음 나는 햇과일 등 귀한 것을 조금 사와서 스님께 드리기라도 하면, 대중과 함께 할 수 없을 정도의 양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스님의 이런 가르침은 전통이 되어 재근스님을 비롯하여 그 손상좌들에게까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효성이 지극했던 "효상좌"

스님께서는 은사스님을 시봉하고 그 뜻을 따르는데 효심이 남달리 깊었다. 은사 금룡(金龍)스님과는 나이가 3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지만, 은사스님이 말씀을 하실 적에는 고개도 들지 않았으며, 어찌나 효성이 지극하였던지 효상좌라는 말씀을 들을 정도였다.

중풍에서 회복하다

스님은 세수 65세 되시던 해인 1958년에 중풍을 앓았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후 힘을 얻고 정신력으로 버텨내시어 병이 발병한 그 다음해인 1959년 6월에 병석에서 일어나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 영춘스님이 갑자기 풍에 걸리자 상좌스님들은 좋다는 약을 모조리 다 구해다 드렸지만 차도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스님께서 쓰러진 지 3일째 되던 날, 부르지도 않은 의원이 찾아와 스님의 혈을 짚어 보고는 가루약과 침 네 대를 놓아주었다. 그로부터 20일 후에 스님은 비로소 몸을 움직이게 되었다. 이에 고무되어 그 의원을 찾으려 백방으로 수소문을 해 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스님은 그 분을 부처님의 화신이라 여기며 더 이상 찾지 말라고 하였다. 그 일을 계기로 용기를 얻은 스님은 정신력이 더욱 강해져 나중에는 왼쪽만 조금 불편할 뿐 몸이 거의 완쾌되었으며 스님의 세수 80세 때에는 서울과 부산을 왕래할 만큼 건강해졌다.

입적

스님은 입적하기 1년 전부터 “나는 우리 집에 갈 거다.”라는 말씀을 자주하였다. 이에 상좌 재근스님이 여쭈었다. “스님 집이 여긴데요.” “응, 여기 말고 또 있어. 보타암에 갈 거다.” “여기가 보타암인데요?” “아니야. 여기 말고 또 보타암이 있어. 내가 문 밖에 나가면 동자가 내 손을 잡고 홀짝홀짝 뛰어. 참 예뻐.” “동자가 몇 살인데요?” “한 여섯 살 쯤 돼. 내가 문 열고 들어오면 내 손을 놔 버려.” 당시 재근스님은 영춘스님이 연세가 높아서 헛소리를 하시는 줄 알았다.

영춘스님은 세수 100세 되던 해인 1993년 새벽 6시 50분에 입적하였다. 입적하기 1년 전, 보타암은 법당을 지었으나 미처 단청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자 영춘스님이 “단청은 언제 하노? 법당 짓기 전에는 나 안 간다.”하며 자꾸 채근하기에 재근스님은 서둘러 단청을 하였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낙성식은 언제 하노?”하고 물었다. 마음이 바빠진 재근스님이 낙성식 날짜를 받아 놓자 스님은 비로소 안도하시며 “이젠 가도 되겠네.” 하는 것이었다. 이에 재근스님은 영춘스님에게 말씀하였다. “스님, 백 살까지 사셔요.” “백 살까지 살면 귀신 된다.”

입적하기 전 스님께서는 자꾸 일어나 앉으려고 하였다. 스님이 입적 준비를 하려는 것인 줄도 모르고 재근스님은 게속 누워 계시라며 만류를 하였다.

영춘스님은 “나, 날 새면 간다. 어두울 때는 안 간다.”하며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하다가 혀가 말려 끝까지 다 못하고 오른쪽으로 얌전히 누우신 채 입적에 들었다. 스님이 가고 난 뒤 방안 전체에 향기가 진동을 하였다고 한다. 재근스님은 은사스님이 입적하시는 과정을 보고 ‘수행을 저렇게 잘 하셨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맏손상좌 성혜스님의 꿈

또 스님이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스님의 맏손상좌 성혜스님이 재근스님에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새벽 예불 드리고 꿈을 꾸었는데, 큰 법당이 있고, 스님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마주 보고 중좌를 치고 오늘 큰 스님이 오시는데 영접하려고 한다며 큰 상을 차려놓고 가사 장삼을 다 수했어요.”

이 말을 듣고 재근스님은 ‘가시는 어른이니까 그렇게 보였나 보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또 어떤 신도분에게 전화가 왔다. “스님, 노스님 가셨지요.?” “예. 보살님. 노스님 가셨어요.” “7시 전에 가셨지요? 제가 꿈을 꾸니 노스님이 가사 장삼을 입으시고 하늘을 날아가시던데요.”

스님이 입적한 지 6년이 지난 1999년, 재근스님은 성혜스님, 여러 손상좌스님들과 중국 여행을 갔다. 스님들은 중국의 구화산과 항주 등 여러 지역을 둘러보고, 보타산을 갔는데 ,거기에 보제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런데 성혜스님이 “스님, 여기가 우리 노스님 오신 곳이네요. 제가 꿈에 본 그 법당이고, 그 부처님이에요”하는 것이었다. 보제사는 방장스님과 많은 대중스님들이 사는 곳이기에 재근스님은 마음이 너무 좋았다. ‘여기가 우리 은사스님이 오신 곳이구나.’ 하는 생각에 참배하고 나오고, 나오는 길에 마침 길목에서 꽃을 팔기에 한 바구니를 사서 불전에 올렸다.

영춘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재근(在根)스님과 손상좌 성혜·혜륜·혜묵·성정·성범·법준·혜원·성수스님이 있다.

통도사 보타암

[보타암 사진]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109

통도사의 암자 중 유일하게 비구니스님들의 처소로 통도사 해장보각을 지나 왼쪽으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1927년,信悟堂(신오당) 永春(영춘)스님이 이전 불사하였다. 부도원 뒤편 동운암(東雲庵)을 경봉스님의 권유로 현 위치로 이전 불사하였으며 이전 당시 경봉스님께서 관음보살상 시주:현재 좌 협시로 봉안하였다. 영춘스님은 중창불사 직전(1993년8월 관음재일)에 향년 100세로 입적하였다.

경내에는 법당과 약사전, 요사채 2동 식당, 창고 등이 ㅁ자형으로 배치되었고 주위로 담장이 둘러져 있다. 법당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봉안하고 있으며, 건물 정면에는 일제강점기에 통도사 주지를 지낸 구하스님이 쓴‘보타암’ 현판이 걸려 있다. 약사전에는 약사보살과 산신, 나반존자가 함께 봉안되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영춘(永春)스님 본항목 영춘스님(永春, 1894~1993) 永春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영춘스님(永春,_189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영춘스님(永春) 계민문중(戒珉) ~의 일원이다
영춘스님(永春) 금룡스님(金龍) ~의 수계제자이다
영춘스님(永春) 통도사 보타암(동운암) ~에서 출가하다
영춘스님(永春) 해담스님(海曇)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영춘스님(永春) 통도사 보타암(동운암) ~을(를) 중창하다
영춘스님(永春) 안거 ~을(를) 성만하다 고성(고산) 유점사 법계암(금강산), 평창 상원사(오대산), 평창 월정사 지장암(오대산)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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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주석

  1. 선종에서 중시하는 것으로, 불교를 학습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네 가지 책. 곧 《서장(書狀)》, 《도서(都書)》, 《선요(禪要)》, 《절요(節要)》를 이른다.
  2. 부처에게 올리는 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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