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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27일 (토) 23:03 기준 최신판



정의

광옥(光玉)스님은 지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캐나다에 불광사를 창건하고 관악구 약수사를 중창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3 평북 평양 출생
1960 회암사에서 지호(智護)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1 조계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동학사 강원 입학
1967 동학사 사교[1] 수료
1968 범어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2 서울 관음사[2] 주지 역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졸업
1973 중앙 포교사
1976 국제포교사, (재)캐나다 불광사 창건
1980 (재)캐나다 홍법원 원장, 캐나다 토론토 세네카 칼리지 졸업
1994 서울 관악구 약수사 주지 취임
2001 제10기~12기 평화통일 자문위원
동국대학교 총동창회 부회장
2004 서울 관악구 봉덕사 주지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불교경영 최고위과정 졸업
전국비구니회 사회부장
2005 행자교육 갈마사, 불교신문 논설위원
불교 CEO 최고과정 수석부회장
대통령상 수상
2006 SOS 운영위원
문중 일엽문중(一葉)
수행지침 철저한 계율
상훈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상(1985, 해외 포교 공로상 수상)
캐나다 연방정부 공로상(1992) 대통령 표창
(12기 평화통일 자문위원)
수계제자 명훈·관송·정오·일우·청도·정일·혜원

활동 및 공헌

출가

[대통령 표창장을 받고]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43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44
[전국비구니회 회장 명성스님 서예전시회에서 임원진들과 함께 (2004)]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47
[전국비구니회관 문화강좌 수료식 후 다도, 꽃꽂이 선생님들과 함께]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 48

법성(法性) 광옥(光玉)스님은 1943년 평양에서 아버지 선종호와 어머니 박준주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보성이며, 이름은 선문자이다. 스님의 부모님은 해방되기 한 해 전에 월남을 하였고, 스님은 2세 때부터 남쪽에서 성장하였다.

1959년 스님의 나이 17세 때의 일이다. 하루는 어머니와 함께 큰 이모가 주지스님으로 있는 회암사를 찾아갔다. 절을 향해 산을 오르는 중에 멀리서 산사의 종소리가 들려왔고, 순간 스님의 가슴에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졌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축대를 타고 올라가 절에 들어서자 예불을 끝내고 내려오는 선방스님들이 눈에 보였다. 가사 장삼을 수하고 나란히 내려오는 모습이 어린 마음에도 매우 아름답게 비쳐졌다.
주지스님은 스님을 무척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러면서 전날 밤 꿈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주지스님의 꿈에 청담스님이 가사 장삼을 수하시고 육환장을 짚고 축대에 올라오시기에 합장 인사를 드렸더니 뒤쪽을 가리키며 ‘이 애를 잘 돌봐라.’라고 하셨다. 청담스님의 뒤를 보니 네다섯 살 정도 되는 꼬마 스님이 목에 염주를 걸고 행전을 예쁘게 하고 올라오고 있었다. 꿈에서 깬 주지스님은 누군가 찾아올 것 같은 예감에 하루 종일 기다렸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 실망하던 차에 속가의 동생이 딸을 데리고 눈앞에 나타난 것이었다. 주지스님은 조카를 곁에 두고 스님으로 키우고 싶은 마음에 속가 동생과 상의를 하였고, 그렇게 하여 광옥스님은 회암사에서 기거하게 되었다. 집을 떠나 절에서 살게 된 광옥스님은 『천수경』, 『반야심경』, 약찬게 등 주지스님이 외우라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 하루 만에 다 외워 다음날이면 강을 마치곤 하였다. 그리고 관음시식까지 모두 외워서 어른스님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이듬해 광옥스님은 해제를 하고 나서 곧바로 지호스님을 은사로 삭발을 하였고, 고된 행자 생활이 시작되었다. 행자 시절, 한번은 아버지가 회암사에 오셨다. 절에서 하룻밤을 묵은 아버지는 다음날 스님이 새벽종송 하는 것을 듣고 부엌으로 스님을 찾아오셨다.
"이왕 하려면 어른스님께 잘 배워서 제대로 하여라. 너는 꼭 노래를 부르는 것 같구나.”
부처님께 귀의한 딸이 올바른 정진을 통해 훌륭한 스님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진심어린 말씀이었다. 1961년, 어느 공병부대가 회암사 아래에 천막을 치고 훈련을 하게 되었다. 훈련 기간 동안 대대장이 새벽 예불에 참석하기도 했는데, 낮이면 군인들이 ‘예쁜 스님’이 있다며 회암사를 드나들곤 하였다. 그 때문에 광옥스님은 늘 방에 들어가 있어야 했다. 어른스님들은 직접 공양 준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등 젊은 스님을 지키려고 무척 애를 쓰셨다. 그러던 중 스님은 은사스님을 따라 장곡사로 가게 되었고, 곧이어 다시 동학사 강원으로 보내졌다.

동학사 강원에 가다

동학사의 살림은 매우 어려워서 방학 때가 되면 학인들은 각자 먹을 양식을 벌어 와야 했고, 그것으로 다음 한 학기를 지내곤 하였다. 동학사 강원 시절을 돌아보면 비록 배고프고 힘들었지만 재미있는 추억도 많다.
어느 날 밤, 한 스님이 광의 문이 열려 있으니 동치미를 가져다 먹자고 제안을 하자 모두들 좋아하며 의기투합을 하였다. 그런데 아무도 앞장을 서지 못하고 망설이고만 있었다. 그러자 평소 담이 컸던 한 스님이 선뜻 자원을 하며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동치미를 가지러 간 스님은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스님들이 광에 나가 보니 그 사이 밖에서 문을 잠궈 그만 광 안에 갇혀버린 것이었다. 학인스님들은 광에 갇힌 스님을 구출하기 위해 계획을 세웠는데, 네 명의 스님들이 작전에 동참했다. 두 명이 도감스님 방으로 가서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는 사이 광옥스님은 벽에 걸린 열쇠를 가져오고, 나머지 한 명은 광에 가서 문을 열고 그 스님을 구해내는 것이었다.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광에서 빠져나온 스님은 그 와중에 동치미를 그릇에 퍼 와서 반 스님 모두가 가슴을 졸이며 맛있게 나눠 먹었다고 한다.

가을이 오면 곶감을 만들기 위해 감을 깎아 새끼줄로 엮어 숭모전에 매달아 두곤 하였다.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마다 하나씩 곶감을 빼먹는 바람에 나중에는 새끼줄만 남아 있게 되었다. 총무 스님은 학인스님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에 곶감을 먹지 않은 사람만 손을 들라고 하였다. 학인스님들 가운데 곶감에 손을 대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곶감 하나 빼먹은 벌로 3일간 공양주를 살아야 했는데, 그래도 그때 먹은 곶감은 무척 달고 맛있었다고 한다.

『금강경』을 배울 때였다. 한번은 한참 독송을 하고 있는데 경전 위에 피가 후두둑 떨어졌다. 손에 붙은 모기를 무의식적으로 때려서 그 피가 경전에까지 튀었던 것이다. 순간 놀라운 생각이 스쳐 갔다.
‘수행자가 되겠다는 사람이 이렇게 악할 수가 있는가. 모기는 살기 위하여 내 피를 빨러 온 것인데, 그것을 이토록 모질게 죽여버리다니......’

스님은 그날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고, 이후 모기를 죽이지 않도록 조심했으며, 모기에 물리면 슬슬 긁고 말뿐 죽이지는 않았다. 그때 모기의 피가 튀었던 『금강경』은 지금까지도 보관하고 있다.
1967년 대교과 때의 일이다. 초파일 방학을 맞아 학비를 벌기 위해 서울로 가는 기차를 탔다. 기차 안에서 학생 두 명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불교 이야기는 함께 나눠도 다른 세상 사는 이야기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었다. 스님은 세상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얼마 후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학원에 등록을 하였다. 은사스님과 상의도 없이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다. 은사스님은 모든 것을 믿어주리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

광옥스님은 1년 동안 시험을 준비하였고, 드디어 1968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에 입학하였다. 동기 중에서 비구니는 스님 혼자뿐이었고, 비구스님들 틈에서 생활하기란 무척 조심스러웠다. 음악, 미술 등 예술 방면에 취미가 있던 스님은 동기들과 차 한 잔도 함께 마시지 못하는 대신 홀로 음악감상실에 가서 좋아하는 노래들을 신청해서 듣곤 하였다.

포교사 1호 스님이 되다

정화 이후 불교계는 사찰 불사에 모든 힘을 집중하였다. 그러다 보니 일반인을 위한 포교활동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고, 종단에서는 상임법사 6명을 선발하여 보시를 주며 포교를 하였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종단 차원에서 중앙포교사 제도를 만들게 되었고, 포교사를 교육하여 배출하기 시작하였다. 광옥스님은 1973년 포교사 1호 스님이 되었다.

캐나다에 불광사를 창건

1976년 동학사 시절 광옥스님은 식량을 탁발하러 다니다가 한 신도를 알게 되었다. 그 신도는 캐나다로 이민을 갔고, 그때의 인연으로 스님 또한 캐나다로 가서 불광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스님은 캐나다에서 월세집을 얻어 한국에서 모셔간 부처님, 범종, 경전 등으로 절을 꾸몄다. 절을 만들기는 하였지만 마땅히 사람들에게 알릴 방법이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캐나다판 한국일보에 작은 난을 얻어 글과 사진을 연재하게 되었고, 불광사는 교민들 사이에 차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977년 세계일주를 하던 서정주 시인이 불광사를 방문하였다. 그리고 한동안 절에 머물며 글을 썼는데, 이때 동국대학교 동문들이 찾아와 후원회가 결성되면서 사찰의 이름이 더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한국에 있을 때는 무엇이든 앞서 나갔기 때문에 광옥스님은 스스로 꽤 재주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말도 모르고 글도 모른 채 외국에 혼자 떨어져 살게 되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자 마치 장애인이 된 듯한 무기력함에 빠졌다. 스님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경전을 독송하는 것뿐이었다. 매일 경전 독송을 하다 보니 나중에는 『화엄경』을 외울 정도가 되었다.

불광사 근처에는 세계 5대 호수 중의 하나인 온타리오호가 있었다. 스님은 호수 주변에서 빵집을 운영하는 한 교포를 알게 되었다. 광옥스님은 매일 저녁 팔다 남은 빵을 얻어 새 모이를 주고 호숫가에 앉아 정진을 해나갔다. 스님은 멀리 보는 연습, 멀리 듣는 연습, 가슴을 크게 우주적으로 넓히는 연습을 하였다. 그렇게 18년을 하루 같이 수행 정진하는 삶을 살다 보니 언젠가는 신문사에서 취재를 나와 인터뷰를 해가기도 하였다.
광옥스님은 한때 영양실조로 신장 하나를 떼어내는 수술을 하였다. 그때 스님은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부처님께서는 각을 이루시고, 원효스님은 포교를 하고, 누군가는 교도소에서 한 세상을 보낸다. 나는 왜 고국을 떠나 먼 캐나다까지 와서 지금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가.’ 하는 의문을 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지내던 스님은 육체에 대해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점차 심안으로 육체를 바라보게 되었다. 어느 날 스님은 두통 때문에 머릿속을 바라보는 연습을 하였다. 그런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머릿속을 훤히 볼 수 있게 되었고, 뇌의 구조와 그 속에 일어나는 화학반응까지 간파하게 되었다고 한다.

세계적인 조각가 존 필리오와의 인연

하루는 세계적인 조각가 존 필리오가 불광사를 찾아왔다. 그는 지난 13년 동안 스승을 찾아 헤맸다고 하면서, 석광옥 스님에 관한 소문을 듣고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광옥스님을 만나려면 먼저 108배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서투른 자세로 하루에 몇 배씩 나누어 며칠 동안 절하는 연습을 하였고, 마침내 온전히 108배를 마치고 스님을 찾아온 길이었다. 그 정성에 탄복한 스님은 그에게 참선을 가르쳤다. 한국어로 『천수경』을 가르치기도 하였는데, 부처님 법을 많이 전하여 나중에는 불광사의 보배가 되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는 다른 외국인들에게 불교 교리를 가르치거나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 등에 존 필리오가 큰 도움을 주었고, 모든 면에서 든든한 힘이 되어 준 것이다. 지금도 불광사에는 그의 작품 3점이 전시되어 있다.

불광사는 점차 캐나다 교포 사회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래서 불법체류자, 취직을 하지 못한 한국인, 갈 곳 없는 교포 문제 등을 해결해주었고, 개인적으로 여행을 온 사람들은 승속을 막론하고 안내를 해주기도 하였다. 덕분에 스님은 나이아가라 폭포를 천 번 이상 방문하였다.

캐나다에서 공로훈장을 받다

1992년에는 캐나다 건국 125주년을 맞아 25년에 한 번씩 주는 125개의 공로 훈장 가운데 하나를 받는 영예를 얻었다. 스님은 토론토 시장의 추천으로 교포 전체를 대표하여 받은 훈장이라고 생각하여 그 훈장을 불광사에 전시해놓았다. 광옥스님은 캐나다에서 돌아온 후 신림동 약수사를 맡게 되었다.

그때가 1994년의 일이다. 약수사를 맡기 전에 먼저 김포 금정사와 인연을 맺었는데, 58,000여 평의 대지에 조그마한 대웅전은 무너지고 요사채만 남은 사찰이었다. 어느 날 월탄 총무원장 스님께서 금정사에 가보라고 말씀하셔서 찾아갔더니 전날 밤 꿈에 보았던 바로 그 절이었다. 스님은 전생의 절로 여겨 사형 정념 스님에게 주지를 맡겼다. 정념스님은 오랫동안 성심을 다해 금정사에서 수행 정진하다가 입적을 하셨고, 이후에는 상좌 명훈스님에게 주지를 맡겼다. 그 후 5,000평만 남기고 53,000평을 중앙승가대학교에 내놓았다. 이때 캐나다에서 돌아오면 답례로 절을 하나 받기로 하였고, 스님은 귀국하자마자 약수사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귀국 후 약수사 주지를 맡다

광옥스님은 12,000평의 약수사를 맡아 대웅전 석가래 보수공사를 하고, 무량수전 불사를 시작하였다. 당시 스님은 67평에 해당하는 건축 허가를 받았는데, 약수사가 그린벨트 지역에 묶인 것도 모른 채 공사를 진행하여 결국 300평 건물로 완공하였다.

스님은 8년 동안 약수사 주지로서 불사와 대중 외호에 진력하였다. 약수사에는 매일 20~30명의 청년들이 물병을 들고 물을 받으러 절을 찾아왔다. 또 법당에서 혼자 절을 하는 청년도 있었다. 사연을 알아보니, 약수사 일대가 고시촌으로 형성되어 있어서 고시생들이 운동을 겸하여 약수를 뜨러 오거나 기도를 하러 절에 오는 것이었다.

광옥스님은 법을 공부하는 젊은이들을 불자로 키울 생각을 하고 청년법회를 열었다. 법회가 시작되자 100여 명의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약수사 도량에는 늘 명상의 말씀이나 법문이 흘러나왔다. 절을 찾은 고시생들이 잠시라도 마음을 쉬어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었다. 그들에 대한 작은 배려가 나중에는 무량수전을 짓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법을 잘 아는 고시생들이 건축 허가 등의 여러 가지 행정적인 문제들을 해결해준 것이다. 그때의 인연으로 9명이 출가를 하였고, 현재 봉암사, 해인사, 통도사, 법주사 등에서 열심히 수행 정진하고 있다.

전국비구니회 등 사회단체에 참여하다

출가 이후 오랫동안 외국에서 살아온 스님은 한국 불교계의 발전에 작은 힘이나마 보태기 위해 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스님은 전국비구니회 사회부장을 맡아 비구니회관의 운영과 발전을 위해 헌신하고, 평화통일자문위원, SOS(긴급구조단체) 사회봉사 등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데 아낌없는 노력하였다. 광옥스님은 세수 60세를 넘기면서 지난날을 회고해 보았다. 그러자 허망한 생각이 엄습했다. 살아온 세월을 따져보니 인생의 20여 년을 잠자면서 보내고, 하루 세끼의 식사에 간식 양까지 모아두면 관악산만큼 거대한 무더기가 될 것 같았다.

“그때 모든 애착을 놓고 남은 삶을 열심히 살자고 다짐하였습니다. 이생에서 이 육체를 받았을 때 이루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그래서 낮에는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열심히 봉사활동을 하고, 밤에는 앉는 연습으로 열심히 정진하려고 합니다. 잠은 육체가 필요로 할 때 잠깐 자는 것으로 만족하고 열심히 살려고 합니다. 춘하추동 사계절에 비유하면, 좋은 시절은 다 가고 어느덧 겨울의 초입에 들어선 나이가 되었으나 종단에도 큰 보탬이 되지 못했고, 후학들에게 도움이 된 것도 없으며, 나 자신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제 남은 시간은 척추를 곧게 세워 정진하여 마음자리 열심히 찾도록 노력하려고 합니다.”

광옥스님은 21세기 과학과 컴퓨터시대를 맞아 수행도 서로 머리를 맞대고 연구하고 의논하여 현대에 맞게 행해야 한다고 본다. 스님은 선조들의 복덕으로 오늘날까지 잘 살아왔지만, 앞으로 후배들의 교육은 종지를 유지하는 한편 시대에 맞는 기술과 포교 방법으로 사찰 운영과 대중 외호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인터넷 상의 사이버 포교를 활성화시키는 것도 그 방법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또한 과거에 비해 출가자 수가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후학들이 좀더 좋은 환경 속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계제자로는 명훈·관송·정오·일우·청도·정일·혜원스님 등이 있다.

서울 관악구 약수사

[관악구 약수사 전경]
사진출처:티스토리, https://gotemplestay.tistory.com/411

《봉은본말사지》에 따르면 세종대왕 3년(1421년) 무명대사가 창건하여, 임진왜란때 소실되었었던 것을 어느 때인지는 모르나 김처사(金處士)라는 사람이 초가삼간을 짓고 수도하던 것이 절의 시작이라고 한다. 그후 1880년(고종 17)에 명성황후가 법당을 건립하면서 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명성왕후가 이곳에 법당을 건립하였던 연유는 아마도 당시 개화파와 수구파의 대립속에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기도처로 삼은 듯하다. 이는 1880년 법당 건립 후 8년 후인 1888년(고종 25)에 약수암에서 멀지 않은 관악산 연주암에 일만오천냥을 시주하여 극락전과 용화전, 그리고 괘불을 조성하였던 데서도 그러한 일면을 엿 볼 수 있다.

1923년 무렵 화재로 초가집이 완전히 타고 법당은 반쯤 남게 되자 주지 최영원(崔永源)스님이 중건했고, 1934년 칠성각을 중건했다. 1969년에는 혜초(慧草)스님이 대웅전 석가모니 후불탱과 법당을 보수하여 그 맥을 이어갔다. 이어 1970년대 초에 주지 [[묘희스님(妙喜, 1937生, 비구니)|이묘희(李妙喜)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면서 잠시 승가대 소속의 비구니 사찰로서 운영되었다. 1995년 광옥(光玉)스님에 의해 설법전 중창 불사를 다시 시작해서 1998년에 회향(回向), 다시 조계종 직할 사찰이 되었으며, 당시 칠성탱을 비롯해 독성탱이 조성되었다.

현재의 도량은 1995년 시작된 중창불사의 노력으로 1998년 대웅전을 비롯한 삼성각, 그리고 무량수전이 보수ㆍ중창되어, 신림동 일대의 신심 깊은 불자들의 기도도량으로서 또는 시민선방으로서 기틀을 마련하였다. 2005년 주지로 부임한 범운(梵雲) 주지스님의 포교활동으로 기도,수행도량으로서의 면모와 휴일 관악산을 찾는 불자들에게도 편안한 휴식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관련문헌]
『太古寺寺法』
'在京畿道始興郡東面(今康城府上道町)冠岳山 大本寺奉恩寺末寺'
『奉恩寺本末志』
'其初也 有金處士者 建茅屋三間而修道 朝鮮高宗十七年(庚辰)明成皇建法堂 一九二三年頃 失火 草葺全燒 法堂半焚 住持催永源 重建 一九三四年(甲戌)重建七星閣'

참고문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광옥(光玉)스님 본항목 광옥스님(光玉, 1943~) 光玉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광옥스님(光玉,_1943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광옥스님(光玉) 일엽문중(一葉) ~의 일원이다
광옥스님(光玉) 지호스님(智護) ~의 수계제자이다
광옥스님(光玉) 양주 회암사 ~에서 출가하다
광옥스님(光玉)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광옥스님(光玉)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광옥스님(光玉) 토론토(캐나다) 불광사 ~을(를) 창건하다
광옥스님(光玉) 캐나다 홍법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원장
광옥스님(光玉) 세네카칼리지(토론토) ~을(를) 졸업하다
광옥스님(光玉) 서울 관음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광옥스님(光玉) 서울 약수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광옥스님(光玉) 서울 봉덕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광옥스님(光玉) 불교신문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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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정혜사(구 봉덕사) : 서울특별시 관악구 신림동 698-1(난곡동)



주석

  1. 여러 설이 있으나 보통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의 4과목을 강원에서는 4교라고 한다.
  2. 서울 관악구 승방1길 109-80(남현동 5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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