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성우스님(惺牛, 1918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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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19일 (금) 19:50 판



정의

성우(惺牛)스님은 평생 참선수행 정진과 후학 양성에 매진한 근세에 손꼽을 만한 진정한 납자이며, 1954년에 일어난 불교 정화운동에 시종일관 큰 역할을 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18 경북 김천 출생
1931 김천초등학교 졸업
1945 동학사 미타암에서 인정(仁貞)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6 동화사에서 무불(無佛)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47 견성암에서 3년 안거 및 채공, 공양주 소임
1953 범어사에서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4~1955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1954~1955 제2회 임시 종회 시 종회의원, 비구니 교무부장 역임
1967~1968 내원사 주지
1969 석남사에서 최초 3년 결사 결성
1975 석남사 선원장 취임
1976 지리산 칠불암 하안거 성만
1976~1990 석남사 안거 성만
1992 금련선원 선원장
2004 현재 금련선원 주석

기타사항

문중 삼현(三賢)문중
수계제자 도용(道蓉)·진욱(眞旭)·청조(淸照)·적조(寂照)·도선(道宣)·벽안(碧眼)·정운(淨雲)·명안(明岸)·칠엽(七葉)·일봉(一棒)·원행(圓行)

활동 및 공헌

출가

성우惺牛스님은 1918년 1월 15일 경북 김천출생으로 본관은 경주이며, 속명은 이윤금이다. 스님은 1944년 28세의 나이에 동학사 미타암에서 인정仁貞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교육

수덕사 견성암에 첫 방부를 들고 3년간 공양주, 채공 등 대중을 시봉하면서 용맹정진했다.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上, p.603

불교정화운동 참가

평생 참선수행의 정진에 몰두하였던 성우스님은 1954년에 일어난 불교정화운동에도 큰 역할을 했다. 같은 해 11월 3일 비구니로서 임시종회에 참여하여 크게 활약하였고, 1955년 8월의 '전국승려 대회'에서 준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당시 여기에 참여한 비구니 스님으로서는 정금광, 정수옥, 이인홍, 이연진, 안혜운, 강자호, 배묘전, 배묘찬, 유혜춘, 이성우 스님 등이다. 그 중 끝까지 애를 쓴 분으로는 정수옥, 이인홍, 이성우 스님이다.

수행

'출가에 선후는 있지만 깨달음에는 차서가 없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명심하고 더욱 분발하여 정진했다. 스님은 희양산 봉암사에 성철 큰스님이 계셔서 윤필암에 들어가 성철스님의 경책을 받아가며 한 철 안거를 지냈다. 성철스님께서 마산 성주사로 거처를 옮기시자 도반 열두 명이 모여 성주사 위에 마을 집을 사서 '멸빈암' 이라하고 안거에 들어갔다. 성철스님의 경책은 혹독했다. 한 철 먹을 양식을 탁발해두고 하루에 나무 한 짐씩을 꼭 해야 되며, 네 시간 이상 자면 안 되고, 목돈으로 시주를 받아서도 안 되었으며, 새벽 3시에 기상하여 밤 11시까지 화두삼매에 들어야 했다. 이따금씩 해시(밤 9시~11시)가 지나면 이따금 “송장들 자나?” 하는 벽력같은 고함에, 수행자는 공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었다. 성철스님께 “공부를 어떻게 지어야 합니까?” 하고 물으면 언구(言句)로 일러주시기보다는 늘 경책의 방망이(棒)를 내려주셨다. 수행자는 때리는 도리를 알아야 하는데 말로써 가르쳐주면 그것을 모르기때문에 화두가 약해진다는 것이었다. “너거들 스스로 분발심을 내야지 하늘 천 따지 하듯이 하면 공부하는 데 별 진전이 없다.” 하며 정녕히 제접했다. 어느 날은 성철스님께서 엄동설한에 멸빈암 앞에 있는 웅덩이에 모두 밀어 넣고 “공부 안 하면 소가 된다." 하며 서슬퍼런 칼날 같은 가르침을 주셨다. 스님이 입고 있던 누비옷에 얼음이 달라붙은 채로 철길을 왔다 갔다 하며 옷이 마를 때까지 정진했다고 한다.

1968년 석남사에서 3년 결사를 할 때 스님은 입승소임을 맡았다. 당시 인홍스님이 췌장이 곪아 수술을 하게 되었는데 석남사 대중 모두가 일치단결하여 기도를 했다. 입승을 살던 성우스님은 기도를 마치고 선방에 앉으면 온 도량에서 '지심귀명례'하는 소리가 울려펴지는 것을 들었다. 이와 관련하여 불필스님 회고록 『영원에서 영원으로』 해당부분을 링크한다. 당시 구도의 길을 걷던 비구니스님들의 존경스러운 면모와 상좌가 은사를 대하는 애틋한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上, p.604

후학양성

스님은 잠시 내원사와 김룡사의 주지를 지내기도 했다. 내원사 주지 임명장을 받아 놓고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고 고심하다가 마지못해 겨우 소임을 받았었다. 그러나 성우스님은 참선 정진이 골수에 맺혀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밤에 걸망을 꾸렸다.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인홍스님, 철마스님 등 두 도반스님과 함께 반야봉을 마주하고 결가부좌할 때의 마음속 환희심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컸다고 한다. 그 후 석남사에서 간절한 발심으로 칠일 문수기도 끝에 비구니 삼년 결사를 최초로 열어 선풍을 진작시켰으며, 오래도록 석남사에 주석하며 선원장을 지냈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중이 공부를 안 하면 소가 된다는데, 본래 고정적으로 사람이 사람은 아니다. 시주네 쌀 한 톨이 수미산과 같으니 용심(用心)을 잘해야 한다. 공부를 안 하면 방울 물도 녹이기 어렵다고 했는데, 그 빚을 언제 갚을 것인가? 공부하는 가운데 소임을 살아가며 정진을 해야 해태 심이 나지 않는다.' 하며 수행 정진할 것을 당부했다. 성우스님은 후학들에게 '오직 뼈를 깎는 정진을 할 때에만이 성불의 그날이 온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고 강조했다. 작은 견처만 보여도 할 일을 마친 양 제 살림살이의 깊이를 가늠해보지도 않고 자신을 자랑삼아 드러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성우스님은 한 평생 오롯이 포단을 여의지 않고 난행을 달게 여기며, 묵묵히 소걸음을 걸었다.

출처: 한국비구니수행담록 上, p.604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601~605)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279)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74912)

  • 나무위키, ‘소가 된 게으름뱅이’

(https://namu.wiki/w/%EC%86%8C%EA%B0%80%20%EB%90%9C%20%EA%B2%8C%EC%9C%BC%EB%A6%84%EB%B1%85%EC%9D%B4)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성우(惺牛)스님 본항목 성우스님(惺牛, 1918~) 惺牛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우스님(惺牛,_1918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성우(惺牛)스님 삼현(三賢)문중 ~의 일원이다
성우스님(惺牛, 1918生, 비구니) 인정(仁貞)스님 ~의 수계제자이다
성우스님(惺牛, 1918生, 비구니) 동학사 미타암 ~에서 출가하다
성우스님(惺牛, 1918生, 비구니) 무불(無佛)스님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성우스님(惺牛, 1918生, 비구니) 동산(東山)스님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성우스님(惺牛, 1918生, 비구니) 내원사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성우스님(惺牛, 1918生, 비구니) 석남사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
성우스님(惺牛, 1918生, 비구니) 금련선원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
성우스님(惺牛, 1918生, 비구니) 김룡사 ~의 감원(주지)을 역임하다

주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