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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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ref>재주 있고 총명한 사람</ref>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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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ref>괴각(乖覺); 재주 있고 총명한 사람을 뜻한다.</ref>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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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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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402,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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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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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음정사'''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 '''관음정사'''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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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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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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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 비구니스님]]
==다른 비구니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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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9월 18일 (수) 07:28 기준 최신판



정의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여러 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고, 여러 사찰에서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문경 관음정사를 창건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4 경기 이천 출생
1967 청도 운문사에서 묘전(妙典)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7~1970 운문사 강원에서 사교과 수료
1968 석남사에서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0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0~1972 석남사, 내원사, 양진암 선원 안거 성만
1974 금산 보석사 주지 (4년)
1978 음성 광명사 주지 (2년)
1980 태백산 유일사 주지 (2년)
1982 지리산 문수암 안거 성만
1983 문경 혜국사 주지 취임, 진입로 공사(3.5km)
1985~1986 요사채 40평 불사
1986~1995 대웅전 20평 불사 회향
1995 삼성각, 축담공사, 전기공사 등 불사 회향
2000 혜국사 주지 및 주석
2003 관음정사 창건 및 주지 취임
2004 관음정사 주지
문중 수정문중(水晶)
수행지침 팔정도(八正道)를 수행지침으로 삼는다.
생활신조 스님답게 살자.
상 훈 조계종 총무원장 표창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태용(泰容, 6)→선진(善眞, 7)→월혜(月慧, 8)묘전(妙典, 9)성총(聖叢, 10)

활동 및 공헌

출생

벽산(碧山) 성총(聖叢)스님은 1944년 3월 20일 경기도 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에서 아버지 이득재와 어머니 김차경 사이의 3남 6녀 중 일곱 번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이며, 이름은 이명희이다.

청담스님과의 인연

사회 전반적인 모든 상황이 평등하지 않다는 사실에 부당함을 느끼던 스님은 불교의 평등사상을 좇아 출가하게 되었다.

성총스님은 경기도 이천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우연히 책을 보다가 불교의 평등사상에 감화를 받고 당시 총무원장으로 재직 중이시던 청담 큰스님을 찾아가 뵙기를 청했다.

‘불교란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화두로 갖고 찾아온 성총스님을 총무원장 스님은 기꺼이 만나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성총스님을 도선사로 데려갔다. 그리고 일정한 요일과 시간을 정해 놓고 그동안 스님이 궁금하게 여기던 모든 것에 답변해주셨다. 청담 큰스님은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두 달 동안 이어진 면담을 통하여 스님을 개화시켰다. 스님이 아는 청담 큰스님은 대단히 자비로운 분이셨다.

도선사 석불전에서 삼천배를 1주일 하고 나자 큰스님은 편지를 써주시며 운문사로 가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스님은 곧바로 운문사로 향했다.

운문사에 출가

운문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성총스님의 귀에는 학인들의 글 읽는 소리가 개구리 울음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마치 운문사 경내 전체가 개구리 운동장 같았다. 첫 인상에서 받은 느낌을 묘하게 여기며 스님은 운문사에 머물게 되었는데, 이때가 1967년의 일이다.

성총스님은 강원에서 삭발을 했다. 행자 생활과 강원 생활을 동시에 시작한 것이다. 스님은 1967년 강원에서 지금의 은사이신 묘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다음해 석남사에서 자운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했다.

출가와 함께 행자 생활을 시작할 때에는 어른 스님들의 말씀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며 살아갔다.

스님은 당시 운문사 주지스님이자 은사이신 묘전스님에게 출가자의 면목을 익히면서 은사스님의 사상을 볼 수 있었다. 묘전스님은 강원에서 학인들을 대할 때 자신의 상좌라고 특별히 보살피지 않고 모두를 하나같이 평등하게 대하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그런 모습을 보고 더욱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은사스님을 그대로 따르게 되었다. 은사스님은 오직 대중을 위해서 희생하여 당신 자신을 버리는 삶을 사셨다.

스님은 은사스님의 시자로 사느라 도반들과 편하게 어울릴 여유는 없었지만 본래 놀기를 좋아하고 성격이 활달하여 도반들과 잘 지내면서 간간히 자유로움을 즐겼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만 해도 교단이 보수적이고 개방적이지 않았는데 개혁을 좀 일으키자는 스님의 주장 때문에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운문사에 칠판을 만들어 걸고 학인들에게 일어를 가르쳐달라,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다.’는 건의를 했을 때 어른 스님들에게 꾸중을 많이 들었다. 어른 스님들의 입장이 아닌,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방식을 시도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정도로 스님은 유별났다.

동아리 활동

스님으로 인해 절집의 학인들은 최초로 동아리 활동을 시작했다. 스님은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공부도 진전 있게 하고, 칠판도 사용하면서 교육하고, 경전 외에 외전 과목도 공부하여 구태의연한 체계에서 벗어나 앞으로 좀 더 발전적인 일을 해 나가자며 앞장서서 문제제기를 했다. 당시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외전이라면 곁눈을 파는 것으로 금기시하던 때였던 터라 어른스님들 눈에 곱게 비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스님은 동학사, 보문사 강원에 편지를 보내 어른 스님들께 자신들의 이런 뜻을 간곡히 밝히기도 했다. 그때 만든 동아리는 후배 양성 및 공부를 열심히 하기 위한 결의로 시작한 것인 데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동아리 활동을 하는 데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몰래 시작했다가 나중에 들키는 바람에 무엇을 하는 짓이냐고 어른스님에게 꾸지람을 잔뜩 듣기도 했고, 심지어는 내쫓기기까지 하며 참회를 해야만 했다. 현재 동학사의 일연스님과 청암사의 지형스님이 그 당시 모임의 일원이며 지금도 가끔 모임을 갖고 있다.

어른스님들은 이해를 해주지 않으시고 경비도 없다 보니 도반들끼리 모여 할 수 있는 일에 여러모로 한계가 있었다. 또한 스님과 뜻이 맞는 이들도 그다지 많지 않았다. 뜻은 컸지만 모든 것이 시기상조였다.

수학 및 수행

강원에서 공부를 하다 보니 학인들의 교육 수준이 천차만별이었다. 다들 학벌이 달라서 교육 수준이 제각각이었다. 그래서 어려운 경전을 접할 때 교육 수준이 낮은 스님들을 위해 성총스님은 책을 구입해 법당 뒤에서 일부 스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같이 공부하던 스님들마저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을 정도로 스님은 도반들을 위해 열의를 보였다.

한번은 영어 공부를 위해 신문 등을 학습 자료삼아 공부를 가르치다가 들통난 적도 있었다. 이런 식의 일들이 반복되다 보니까 스님은 본의 아니게 물의를 많이 일으키고 괴각[1]으로 낙인찍히기도 했다. 스님 때문에 분위기가 흐려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는 너무 속상하고 지내기가 힘들었다. 감내하면서 가만히 있어야 하는 현실이 괴로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스님을 중심으로 생활하던 강원 시절은 무척 재미가 있었다. 그때는 책이 귀해서 한 과목을 마치고 나면 손으로 일일이 옮겨 적었으며 중간에 영인본이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편안하게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스님은 운문사 강원에서 묘엄(妙嚴)스님에게 치문을 배웠고, 1970년 『화엄경』을 보다가 나왔다.

그 후 1970~1972년에 이르는 3년 동안 석남사에서 1년, 내원사에서 1년, 양진암(하안거)에서 1년, 그렇게 한 철씩 돌아가면서 안거를 성만했다.

주지 소임

그리고 1974년부터 1978년까지 금산 보덕사에서 주지로 재직한 뒤 1978년부터 1980년까지 음성 광명사 주지를 거쳐 1980년부터 1982년까지 태백산 유일사에서 주지를 맡았다.

그 뒤 지리산 문수암에서 1년 동안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1983년 직지사 주지인 녹원스님의 부탁으로 직지사 말사인 혜국사에 주지로 부임했다.

스님이 혜국사에 처음 도착했을 때 절은 폐사나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1984년부터 불사를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가고 있다. 처음에는 길조차 제대로 나 있지 않아 통행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진입로부터 먼저 확보했고, 그 다음으로 무너져가는 전각을 하나씩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

스님은 1985년 봄부터 1986년 겨울까지 요사채 40평을 완공했고, 20평짜리 법당을 마무리 지었다. 이밖에도 10평 정도의 삼성각을 신축하며 축대와 담쌓기를 비롯하여 전기공사에 이르기까지 1995년에 모두 완공했다.

또한 그동안 논으로 사용하던 망실 재산을 되찾았고, 1985년부터 등기부 등본을 열람해 자칫 잃어버릴 뻔한 사찰 토지 2,000여 평을 찾아 불사를 했다.

스님은 늘 후학들에게 지속적으로 공부를 하라고 권한다. ‘젊고 유능한 스님들을 많이 배양해서 불교의 힘을 길러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스님들의 노후 복지

한편 스님들의 노후 복지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스님들이 노후를 위해 사설 사암을 운영 하는 것을 비난하기보다는 총무원이나 본사 차원에서 일정한 주거 사찰을 정해서 편안한 여생을 마칠 수 있도록 방법을 마련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대책이 마련되면 성직자로서 스님들의 모습도 여법해질 뿐 아니라 노후의 삶도 즐거울 것이다. “신문지상에 이름을 알리고 유명세를 타는 복지보다도 우리 주변에 계시는 노스님들을 잘 모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런 뜻을 꾸준히 건의해왔지만 잘 받아들여지지 않더군요. 앞으로 이러한 문제를 차근차근 준비해나갈 생각입니다.”

스님은 복지 시설 또한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아파트 식의 개인 주거가 아니라 노스님들이 수도를 하면서 쉴 수도 있고 단체생활을 할 수 있는 대중 수도장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그래야만 개인주의가 심화되고 있는 승가를 더불어 사는 승가로 되돌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번듯하고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해 승려가 된 것이 아니기에 모름지기 수행자나 성직자는 청렴해야 하고 생이 끝날 때까지 수행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스님은 강조한다. 그러면서 개개인의 역량은 뛰어난지 몰라도 단체의 힘은 미약한 종단의 현재 실정에 대해 안타까워한다. “어른스님들이 열심히 살아오신 덕분에 우리까지는 잘 살았는데 앞으로 후배들은 어디에 발붙이고 살지 걱정이에요. 또 우리 비구니들은 여러 방면에서 비구스님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며 함께 발전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비구니스님들도 열심히 공부하여 박사도 되고, 여러 면에서 분발하여 능력을 키워야 되겠죠. 비구·비구니가 승가로서 화합하고 잘 삶으로써 종단이 안정 되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스님은 전 세계 여성 수도자들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승가의 규모를 이루며 생활하는 곳으로 대만 비구니 단체를 꼽는다. 대만 비구니들의 철저한 자급자족 원칙이 부럽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대만 자제공덕회가 병원을 지어 세계 인류를 위하여 봉사하는 것을 좋은 본보기로 삼고 있다.

“앞으로 우리 비구니스님들도 자신의 소유물을 희사하여 모두를 위한 봉사에 마음을 합쳐야 한다고 봅니다.” 종단의 역량을 결집하고 강화하기 위해 모두가 열심히 분발하자는 성총스님은 수행 정진하는 틈틈이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고 한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현법(玄法)·현서(玄西)·현담(玄淡)·현문(玄門)·현무(玄無)스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 뜨란출판사, 2007, pp. 378~383.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97.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p. 402, 40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성총(聖叢)스님 본항목 성총스님(聖叢, 1944~) 聖叢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성총스님(聖叢,_194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성총스님(聖叢) 수정문중(水晶) ~의 일원이다
성총스님(聖叢) 묘전스님(妙典) ~의 수계제자이다
성총스님(聖叢) 청도 운문사 ~에서 출가하다
성총스님(聖叢)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성총스님(聖叢) 월하스님(月下)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성총스님(聖叢) 문경 혜국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성총스님(聖叢) 문경 관음정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성총스님(聖叢) 금산 보석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성총스님(聖叢) 음성 광명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성총스님(聖叢) 태백 유일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성총스님(聖叢) 문경 혜국사 ~을(를) 중창하다
성총스님(聖叢) 문경 관음정사 ~을(를) 창건하다
성총스님(聖叢) 안거 ~을(를) 성만하다 울주 석남사, 양산 내원사, 대구 동화사 양진암(도학동), 산청 문수암(지리산)

지도

  • 관음정사 : 경상북도 문경시 문경읍 관음리 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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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괴각(乖覺); 재주 있고 총명한 사람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