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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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5월 1일 (수) 10:19 기준 최신판



정의

정행(淨行)스님은 동학사에 비구니전문강원을 설립하고 조계종 사상 첫 비구니 전계사를 역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2 경남 함안 출생
1910 삼선암에서 성학(性學)스님을 은사로 출가
1911 회광(晦光)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22 해인사에서 용성(龍城)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23 국일암(비구니)강원 졸업
1923~2000 금강산, 오대산, 삼선암 등에서 안거 수행 정진
1954 한국불교 승단 정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
1959~1963 동학사 주지
1982 삼선암에서 3년 결사 성만
1982~1993 조계종 제 3・4・5・6・8・9・10・11・13・16・19회 단일계단비구니 별소계단의 단주, 전계대화상 역임
2000.4.15. 삼선암에서 입적(세납 99세, 법납 90세)
문중 삼현문중(三賢)
수행지침 삼취정계(三聚淨戒)로서 선(禪), 교(敎)를 병행함
생활신조 인욕(忍辱), 하심(下心)
수계제자 혜운(慧雲)・혜일(慧日)・혜안(慧眼)・혜연(慧蓮)・혜정(慧晶)・영헌(暎憲)・혜성(慧性)・혜명(慧明)・혜공(慧空)・혜선(慧善)・혜등(慧燈)

활동 및 공헌

출가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28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29
[화엄경 수료 증서]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30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 131

보월당(寶月堂) 정행(淨行)스님은 1902년 2월 3일 경상남도 함안군 대산면에서 아버지 정현오 거사와 어머니 묘법화 보살의 딸로 태어났다. 본관은 지양이고, 이름은 정정행이며, 어릴 때의 이름은 끝순이다.

아버지는 ‘법장’이란 법명을 지녔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며, 어머니도 이름이 아닌 법명이 전해올 만큼 스님의 속가는 돈독한 불교 집안이었다. 그렇게 신심 돈독한 불가의 자애로운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스님은, 애석하게도 나이 겨우 세 살 때 부모를 한꺼번에 잃는 불운을 맞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웠던 것은 집안 권속들이 일찍이 출가해 불문(佛門)에 들어와 있었다는 점이다.

유아 시절을 그렇게 권속들의 품 안에서 자란 스님은 아홉 살이 되던 해인 1910년, 이모이신 비구니 수만스님과 이종사촌인 비구니 오전스님을 따라 해인사 삼선암으로 입산하기에 이른다. 이 삼선암에는 속가 친언니인 성문(性文, 1895〜1974)스님이 이미 출가해 수행정진하고 계셨다.

이 곳에서 비구니 성학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정행스님은 1911년 당시 해인사 주지였던 비구 이회광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은사 성학스님은 비구니 염평 스님을 제 1조로 하여 그 계맥을 계승해 오고 있는 삼현문중 제7세로서, 일찍이 삼선암에서 선풍을 드날리고 계셨다.

정행스님은 비록 나이가 어렸으나, 천성이 유순하고 선하기 그지없었다. 삼선암에서의 생활은 일거수일투족 근실무위(勤實無爲)하여 여느 대중의 법도를 뛰어넘었다. 은사 성학스님과 지종 노스님의 시봉에 정성과 효성을 다하면서도 불전법요 절차와 송주의식을 모두 익히고, 절 안에서 수지해야 할 모든 예의범절에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으니, 가히 ‘법문의 보배 구슬’이라는 칭송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구족계를 받다

스님의 나이 21세 되던 1922년, 해인사에 금강계단이 설단 되었다. 천불의 보살대계와 대비구니 구족계를 품수하는 자리였다. 계사는 백용성 대종사셨다. 스님이 보단 위에 올라 보살계와 비구니계를 수지하니, 한량없는 신심과 환희심은 천하를 감싸고도 남았다. 그날 밤 부처님 전에 무수배례하며 대원력을 발하니 출가의 큰 뜻이 비로소 마음을 채우기에 이른다.

스님은 평소 “나는 본시 서방의 한 남자인데 어쩌다가 이 국토에 여인 몸을 받았는고? 그러나 다행히 불법을 다시 만났으니, 일심으로 배우고 닦아 익혀서 불퇴전을 증득하리라. 세세생생에 불도를 이룩하리라”라는 말씀을 자주 하였다.

이와 같이 스님께서는 언제나 신심과 원력이 충만했으니 숙세 선근의 소치라고 말씀하였다. 꿈을 꾸면 단정한 승상(僧相)을 보았고, 해마다 봄철이 되면 몽중(夢中)에 큰 상을 받고 사람들이 절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는 분명 ‘전생의 그림자’임이 분명했다.

구족계를 수지한 그 다음 해 해인사 강원에서 일대시교를 수학해 마치고, 화엄경 81권과 법화경 7권을 독송하면서 원문을 해석하고 붓글씨로 전부 사경을 하였다. 또한 시봉하던 노스님들이 모두 입적에 들어 이전보다는 자유롭게 명산대찰의 선지식을 찾아 친문정법하고 참선수행의 길을 재촉하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이때였다.

10년간의 만행

스님은 ‘내게 있어 수행의 큰 전환점이 된 것은 10년간의 만행이다’고 말하였는데, 해인사 암자부터 시작하여 큰스님 회상을 중심으로 남선 일대를 두 바퀴나 돌았다. 공양주가 없는 사찰이면 공양주가 올 때까지 살았고, 부전이 없는 절이면 목탁을 잡으면서 밭일까지 하였다. 만행을 하되 기한을 정해놓지 않고 인연 따라 한없이 살았다.

어느 때는 방사가 하나 밖에 없는 비구 처소에 발길이 닿은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몸이 아파서 기독교병원에서 3개월 동안 치료를 받아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전혀 개의치 않았고, 치료 받는 동안 병원 안 예배당에 모셔진 성인 예수님께 예를 드렸다고 한다.

은사스님을 시봉

1940년부터 1950년에 이르기까지 은사스님을 시봉할 때에는 어느 효상좌도 스님을 능가할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지극정성을 다했고, 힘들다는 소리 한번 내지 않고 어른을 모셨다.

수선안거

스님이 해인사 국일암에서 해인사 강사 김보운(金寶雲)스님의 수제자인 강유겸 강사스님께 이력을 보실 때의 일이다. 스님은 후래 사람들을 위해 손수 화엄경과 법화경의 해석을 써두었다. 하루는 스님 생각에 그것들을 한 장 한 장 찢어 주먹밥을 싸서 물고기를 주면 물고기가 화엄경이 적힌 밥을 먹고 이고득락(離苦得樂)할 것 같아 어부식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상좌들이 스님께서 쓴 화엄경과 법화경을 보존하기 위해 극구 만류해서 하지 못했는데, 스님은 그 일을 못내 아쉬워 하였다.

금강산 마하연 만공 큰스님 회상에서 수선안거에 들고, 오대산 청량선원 적멸보궁 한암선사 회상에서 정진을 거듭하는 등 입적하시는 날까지 하안거를 성만하는 용맹정진에 돌입하였다. 그것은 법희선열의 기쁨과 즐거움 속에 머무는 당체이기도 하였다.

그 때마다 스님께서는 옛 조사의 노래를 즐겨 읊으셨다.


          백 년 삼만 육천 일이
          불급승가 반일한이라
          황금 백벽이 귀할 소냐!
          가사입고 사는 것이 가장 소중한 일이로다.

          청산림 깊은 굴에 일간토굴 지어놓고
          송문을 반개하고 석경에 배회하니
          녹양춘 삼월에 춘풍이 건 듯 불어
          정전에 백종화는 처처에 피었는데
          풍경도 좋거니와 물색이 더욱 좋다

정행스님은 천진무구로서 모든 사람들을 제접하였다. 또한 평생 효로써 어른을 섬기는 일에 어긋남이 없는 자비원력의 화신이었으며, 수행과 자비원력의 덕화(德化)였다.

동학사에 비구니전문강원을 설립

스님은 교단 정화 후인 1959년 세수 58세 때 계룡산 동학사에 비구니전문강원을 설립하고 초대 원장 및 주지로 부임하여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스님은 그곳의 비구니 학인들에게 계·정·혜(戒·定·慧) 삼학의 실천을 강조하며 후학육성에 열정을 불살랐다.

스님이 40여 년에 걸친 운수행각(雲水行脚)을 거두고, 출가에서 입적에 이르기까지 지중한 인연처가 된 해인사 삼선암에 방부를 들여 전국 비구니들의 정신적 지주로 우뚝 서기 시작한 것은 1962년이다.

비구니계 수계의식을 주도

스님의 연세 81세인 1982년 10월부터 1993년 11월까지 조계종 제1회부터 11회까지 그리고 13회‧ 16회‧ 19회 전국 단일계단 비구니 구족계 이부승 수계 별소계단의 단주. 전계대화상을 역임하는 등 비구니계 수계의식을 주도하며 수많은 초발심의 출가자를 배출하였다. 그것은 조계종 사상 첫 비구니 전계사의 탄생을 의미했다.

또한 상좌 혜운스님과 혜안스님 등의 원력으로 1957년 요사 확장과 1961년 인법당 중수, 1963년 칠성각 중창에 이어 1981년에는 선원 증축과 선불장 건립 그리고 1995년에 이르러 후원요사 건립 등 큰 선방을 건립하였다.

평소 작설과 커피를 즐겨 마시고 여행을 즐겼던 스님은 조석 예불을 거르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구순을 넘긴 만년에도 칠백배 참회정진을 하며 선방의 자리를 지켰다. 젊은 대중에 결코 뒤지지 않았던 정진력과 사자후는 가야산 골짜기를 수놓은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입적

스님은 98세가 되면서 차차 노쇠현상을 보이며 자주 와선삼매에 들었다. 와선삼매에 들기 시작한 지 1년 여 쯤 지난 어느 날, 상좌 혜안의 손을 잡고 미소를 짓더니 게송을 읊는 것이었다.


          여시래여시거혜 (如是來如是去兮)
          백년생애찰나간 (百年生涯刹那間)
          만리장천일양색 (萬里長天一樣色)
          청산부동백운류 (靑山不動白雲流)

그것은 스님의 임종게(臨終偈)요, 열반송(涅槃頌)이었다. 2000년 4월 15일(음력 3월 11일) 오후 1시 20분, 정행스님은 그렇게 이 사바세계를 마감하였으니 세납 99세요, 법랍 90세였다.

수계 제자로 혜운(慧雲)·혜일(慧日)·혜안(慧眼)·혜연(慧蓮)·혜정(慧晶)·영헌(暎憲)·혜성(慧性)·혜명(慧明)·혜공(慧空)·혜선(慧善)·혜등(慧燈)스님, 손상좌, 경인·경범·경주·경심·경준·경희·경봉·경덕·경식·경수·경완·도원·정우·초의·경오·경선·경율·경도·경현·경옥·경훈·경윤·경욱·경관·경각·경진·경문·경담·경호·경재·보광·경진·재각·민광·경수·경진·재호·경산·경해·인덕·정원·경각·일광·법진스님 등이 스님의 선지를 드날리고 있다.

해인사 삼선암

삼선암(三仙庵)은 해인사 산내암자로 가야산 삼선봉 밑에 자리 잡고 있다. 원래는 학사대 서쪽 해인사 강원의 운동장 북편 채전(菜田)자리에 자홍(慈洪)스님이 최초로 창건하였으나 큰절 뒤쪽이라는 이유로 1893년에 현 위치로 옮기고, 삼선봉 밑에 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삼선암으로 지었다.

1905년 보찬(普讚), 지승(智崇)스님이 확장하였으며, 1955년 혜안(慧眼)스님이 도감에 취임하여 1957년 요사채를 80평으로 확장했다. 1961년에 인법당을 중수하고, 1963년에 칠성각을 중창했으며, 1981년에는 선원 15평을 42평으로 증축하였다. 그리고 1995년에 선불장과 후원 요시를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선암 반야선원(般若禪院)은 1945년 정성문 스님이 개원하였으며, 한국전쟁 당시 많은 비구니스님들이 이 선방에서 참선에 들었다고 한다.

  • 출처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뜨란출판사, 2007, pp. 108~111.

동학사

[동학사 대웅전] 사진출처 : 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gotemplestay/360

마곡사의 말사로 724년(성덕왕 23) 상원조사(上願祖師)가 암자를 지은 곳에 회의화상(懷義和尙)이 절을 창건해 상원사(上願寺)라 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유거달(柳車達)이 이곳에 와 신라의 시조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절을 지으니 승려들이 모여들어 사찰이 커지면서 이름을 동학사로 바꾸었다.

1394년(태조 3) 고려의 유신 길재가 고려 태조와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고, 1457년(세조 3)에는 김시습(金時習)이 사육신의 초혼제를 지내고 단종의 제단을 증설했는데, 다음해 이곳에 들른 세조가 단종을 비롯해 세조찬위 때 억울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한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과 토지 등을 하사했으며 동학사라고 사액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728년(영조 4)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모두 소실된 것을 1814년(순조 14) 월인선사(月印禪師)가 예조에 상소하여 중건했고, 1864년(고종 1) 보선국사(普善國師)가 옛 건물을 모두 헐고 건물 40칸과 초혼각 2칸을 지었다. 1904년 초혼각을 숙모전(肅慕殿)이라고 개칭했다. 6·25전쟁 때 거의 파괴된 것을 1975년 개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대웅전·무량수각·삼은각·숙모전·범종각·동학사·동학강원 등이 있는데 동학강원은 운문사의 강원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비구니수련도량으로 유명하다.


정행스님은 어린시절 삼선암에서 공부하셨다. 젊어서는 외부로 행각을 많이 하셨지만, 노후 70세 이후부터는 삼선암에서 수행을 이어갔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정행(淨行)스님 본항목 정행스님(淨行, 19~19) 淨行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행스님(淨行,_190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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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행스님(淨行)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정행스님(淨行) 성학스님(性學) ~의 수계제자이다
정행스님(淨行) 해인사 삼선암 ~에서 출가하다
정행스님(淨行) 회광스님(晦光)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정행스님(淨行) 용성스님(龍城)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정행스님(淨行) 공주 동학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정행스님(淨行) 동학사 강원(승가대학) ~을(를) 건립하다
정행스님(淨行) 전계화상 ~의 직임을 수행하다 비구니 최초
정행스님(淨行) 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단일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의 단주, 전계대화상(1-6회, 8-11회, 13회, 16회, 19회)
정행스님(淨行) 안거 ~을(를) 성만하다 금강산, 오대산, 합천 해인사 삼선암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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