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법형스님(法衡, 1921生, 비구니)"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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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학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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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형스님은 후학들에게 “설사 큰스님 회상에서 내가 듣고 배운 것이 있다 할지라도 돌아보면 부끄러운 것이 더 많고, 오직 불법이 좋다는 것 하나로 뭉친 신심, 오직 이 도리, 참으로 이 도리로써 오직 정진 또 정진밖에 할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법형스님은 후학들에게 “설사 큰스님 회상에서 내가 듣고 배운 것이 있다 할지라도 돌아보면 부끄러운 것이 더 많고, 오직 불법이 좋다는 것 하나로 뭉친 신심, 오직 이 도리, 참으로 이 도리로써 오직 정진 또 정진밖에 할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1999년 68세의 스님은 투병 중에도 경주 금련선원에서 하안거를 보내기도 했다. '정진도 제 대로 못하면서 복수용(福受用) 하는 것이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다.'는 스님은 삼동三冬에도 내 원사에 결제를 하려고 방부까지 들였으나 병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그러면서 '대중처소에 공부하러 가는 것은, 공부도 공부지만 대중과 함께 동수고락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며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요즈음의 풍토를 걱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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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68세의 스님은 투병 중에도 경주 금련선원에서 하안거를 보내기도 했다. '정진도 제 대로 못하면서 복수용(福受用) 하는 것이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다.'는 스님은 삼동(三冬)에도 내 원사에 결제를 하려고 방부까지 들였으나 병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그러면서 '대중처소에 공부하러 가는 것은, 공부도 공부지만 대중과 함께 동수고락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며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요즈음의 풍토를 걱정했다.  
 
스님은 대중에서 공양주 소임을 한 철 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12년 동안 은사스님의 간병을 하느라 대중 소임을 제대로 못살았다. 그래서 소임도 때가 있으니 만약 소임이 주어지거든 최선을 다해 살라.' 고 후학들에게 당부했다.  
 
스님은 대중에서 공양주 소임을 한 철 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12년 동안 은사스님의 간병을 하느라 대중 소임을 제대로 못살았다. 그래서 소임도 때가 있으니 만약 소임이 주어지거든 최선을 다해 살라.' 고 후학들에게 당부했다.  
또 '강원에 있다고 해서 다 학인이 아니며, 선방에 있다고 해서 다 수좌가 아니다. 견성성불은 퇴전치 않으면 언젠가는 이루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승의 사상이 확고해야 한다. 비록 나는 부족하고 잘못 살아와서 무엇을 내놓고 전하고 할 것이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젊은이들에게 바라노니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서 불법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고 말했다. 특히 요즈음 젊은이들은 시대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고들 하지만,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바뀌어도 이 마음은 세세생생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니 참으로 발심하여 머리를 깎고 대장부의 옷을 입었거든 승려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가진 연후에 참선, 포교 등을 시대에 순응해서 해야 하고, 배울 것은 배우면서 자 기에게는 극악 극독으로 공부하며, 타인에게는 최대의 자비와 자선을 베푸는, 나 하나만의 삶이 아닌 일체 중생을 구원하는 대 수행인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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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강원에 있다고 해서 다 학인이 아니며, 선방에 있다고 해서 다 수좌가 아니다. 견성성불은 퇴전치 않으면 언젠가는 이루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승의 사상이 확고해야 한다. 비록 나는 부족하고 잘못 살아와서 무엇을 내놓고 전하고 할 것이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젊은이들에게 바라노니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서 불법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고 말했다. 특히 요즈음 젊은이들은 시대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고들 하지만,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바뀌어도 이 마음은 세세생생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니 참으로 발심하여 머리를 깎고 대장부의 옷을 입었거든 승려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가진 연후에 참선, 포교 등을 시대에 순응해서 해야 하고, 배울 것은 배우면서 자 기에게는 극악 극독으로 공부하며, 타인에게는 최대의 자비와 자선을 베푸는, 나 하나만의 삶이 아닌 일체 중생을 구원하는 대 수행인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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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g> '''■ [[한국비구니 | 대한민국 주요 비구니 스님]] '''</big>

2024년 4월 26일 (금) 09:12 기준 최신판



정의

법형(法衡) 스님은 수덕사 견성암 등에서 철저히 수행정진하며 평생을 수좌로서 수행과 후학양성에 노력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21 충남 온양 출생
1938 수덕사 견성암에서 지선(智禪)스님을 은사로 출가
1942 만공(滿空) 월면(月面)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52~1984 30년간 제방 선원 안거 성만
1993 경주 불탑사 주석,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4, 5회 존증아사리)
2001 불탑사에서 입적(세수 81세, 법랍 64세)
문중 수정문중(水晶)
수계제자 철진(哲辰)·보안(保安)·철안(哲眼)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법형스님의 모습]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442
[법형스님의 모습]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권 p443

법형(法衡)스님은 1921년 충남 온양에서 아버지 윤형철과 어머니 최극락화 보살 사이에서 태어 났다. 본관은 파평이며, 이름은 윤귀순이다. 스님은 18세 되던 1938년에 수덕사 견성암에서 지선스님을 은사로, 만공스님을 계사로 모시 고 출가했다. 온양과 수덕사는 백여 리의 지척이라 불법에 귀한 인연이 닿아서 출가를 하게 되었고, 불법을 만나고 보니 인생의 정도(正道)를 찾았다는 환희심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만공스님과의 인연

1952년 21세 되던 해, 은사스님의 병환으로 꼬박 3년에 걸쳐 극진한 간병을 했다. 그 뒤 1953년부터는 수덕사 견성암, 개심사, 내원사, 대성암 등에서 30여 년에 이르는 동안 주로 대중처소에서 생활하며 평생 수좌로서 수행하다가 62세 되던 해인 1993년 경주 불탑사로 오게 되었다. 법형스님은 한때 근세의 도인으로 잘 알려진 덕숭산 만공 큰스님 회상에서 수행을 다지기도 했다. 만공 큰스님께서는 스님들의 모습을 보면 다가와서 법문을 해주며 격려하곤 하셨다. 그 당시에는 스님들마다 각자 울력을 하는 지게가 있었는데 혹 지나가다가 일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임금의 용포 속에서는 삼악도(三惡道)를 익히지만 스님의 지게는 위성도업(爲成道業)이라. 오직 임금의 용포보다 지나는 최상의 해탈 복이니라.” 이 뜻은 일을 하는 한편 열심히 수행하여 해탈해서 부처를 이룬다면 어찌 임금의 용포에 비기겠냐는 말씀으로, '일일부작이면 일일불식' 이라는 백장청규와도 통하는 유명한 지게 법문이다. 후원을 지나시는 일이 있으면, “큰방에 앉아서 수행하는 스님이 바로 생불(生佛)과 같으니라. 대중 스님이 바로 생불인 줄 알고 생불에게 공양 올리는 마음으로 지극히 하라.”고 하셨다. 또한 '짚신을 삼을 때는 짚신의 날을 잘 꼬아야 신이 튼튼하듯이, 도(道)를 배우는 일도 초발심(初發心)이 견고해야 여일 할 수 있다.' 고 비유해주셨다. 또한 수계식에서 계를 설하실 때는 “삼천대천세계에 진금탑을 가득 조성해 공양할지라도 자식을 하나 출가시킨 공덕만 같지 못하다 하였으니, 어찌 출가한 뒤에 헛되이 날을 보내며 방일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셨다.

후학 양성

법형스님은 후학들에게 “설사 큰스님 회상에서 내가 듣고 배운 것이 있다 할지라도 돌아보면 부끄러운 것이 더 많고, 오직 불법이 좋다는 것 하나로 뭉친 신심, 오직 이 도리, 참으로 이 도리로써 오직 정진 또 정진밖에 할 것이 없다.”고 강조했다. 1999년 68세의 스님은 투병 중에도 경주 금련선원에서 하안거를 보내기도 했다. '정진도 제 대로 못하면서 복수용(福受用) 하는 것이 바늘방석에 앉은 듯 불안하다.'는 스님은 삼동(三冬)에도 내 원사에 결제를 하려고 방부까지 들였으나 병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가지 못했다. 그러면서 '대중처소에 공부하러 가는 것은, 공부도 공부지만 대중과 함께 동수고락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며 개인주의가 심화되는 요즈음의 풍토를 걱정했다. 스님은 대중에서 공양주 소임을 한 철 살기를 간절히 원했지만, 12년 동안 은사스님의 간병을 하느라 대중 소임을 제대로 못살았다. 그래서 소임도 때가 있으니 만약 소임이 주어지거든 최선을 다해 살라.' 고 후학들에게 당부했다. 또 '강원에 있다고 해서 다 학인이 아니며, 선방에 있다고 해서 다 수좌가 아니다. 견성성불은 퇴전치 않으면 언젠가는 이루니 시간이 문제가 아니라 승의 사상이 확고해야 한다. 비록 나는 부족하고 잘못 살아와서 무엇을 내놓고 전하고 할 것이 없는 부끄러운 사람이지만 젊은이들에게 바라노니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서 불법이 끊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고 말했다. 특히 요즈음 젊은이들은 시대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고들 하지만, 시대가 아무리 변하고 바뀌어도 이 마음은 세세생생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이니 참으로 발심하여 머리를 깎고 대장부의 옷을 입었거든 승려의 마음가짐을 바르게 가진 연후에 참선, 포교 등을 시대에 순응해서 해야 하고, 배울 것은 배우면서 자 기에게는 극악 극독으로 공부하며, 타인에게는 최대의 자비와 자선을 베푸는, 나 하나만의 삶이 아닌 일체 중생을 구원하는 대 수행인이 되어 주기를 간절히 당부했다.

입적

스님은 불치병으로 알려진 췌장암으로 5년 넘게 투병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방사선 치료를 받았지만, 모두가 가망이 없다고 하는 극한상황까지 갔었다. 그러나 스님은 생사가 둘이 아님을 알고 항상 여여한 마음으로 몸을 바꿔야겠다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그러던 중 기적인지 강한 정신력으로 다져진 수행의 가피인지 스님은 다소 몸이 회복되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2001년 불탑사에서 세수 81세, 법랍 64세로 세연을 다했다. 수계제자로는 철진(哲辰)·보안(保安)·철안(哲眼)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440~444.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193.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법형(法衡)스님 본항목 법형스님(法衡, 1921~2001) 法衡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형스님(法衡,_1921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법형스님(法衡) 수정문중(水晶) ~의 일원이다
법형스님(法衡) 지선스님(智禪) ~의 수계제자이다
법형스님(法衡) 수덕사 견성암 ~에서 출가하다
법형스님(法衡) 만공스님(滿空)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법형스님(法衡)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법형스님(法衡) 계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4-5회 존증아사리)
법형스님(法衡) 안거 ~을(를) 성만하다 제방선원(諸房禪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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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불탑사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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