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응현(崔應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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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28년(세종 10)∼1507년(중종 2) = 80세]. 조선 초기 성종·중종 때의 문신. 행직은 대사헌(大司憲)이다. 본관은 강릉(江陵)이고, 주거지도 강릉이다. 자는 보신(寶臣)이고, 호는 수재(睡齋)이다. 증조부는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지내고 이조 참의(參議)에 추증된 최원량(崔元亮)이고, 조부는 증 병조 참판최안린(崔安麟)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최치운(崔致雲)이다. 어머니 정부인(貞夫人) 강릉함씨(江陵咸氏)는 현령(縣令)함화(咸華)의 딸이고, 삼사 좌윤함승우(咸承祐)의 손녀이다.

세종~세조 시대의 활동

1440년(세종 22) 13세 때에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최치운은 집현전(集賢殿) 학사(學士) 출신으로 세종의 촉망을 받다가, 52세의 나이로 죽었다. 1448년(세종 30) 나이 21세 때 진사(進士)·생원(生員) 두 시험에 합격하였다.(『율곡전서(栗谷全書)』 권17 형조참판 최공응현 신도비명(刑曹參判崔公應賢神道碑銘) 참고. 이하 「비명」 약칭.) 1454년(단종 2) 23세 때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에 3위로 급제하여(『방목』 참고)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다.

1455년(세조 1) 12월 세조가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세조실록(世祖實錄)』 참고.) 관례에 따라 홍문관(弘文館)저작(著作)이 되었다. 성균관(成均館)으로 옮겨서 박사(博士)·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으나,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敎授)에 보임되기를 희망하여 강릉훈도(江陵訓導)가 되어 강릉의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1462년(세조 8)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에 임명되었는데, 1466년(세조 12) 윤3월 세조가 강릉에 행차하여, 말다리(末叱橋)를 건너다가 사고가 날 뻔 하는 바람에, 찰방과 함께 하옥되었다가 석방되었다.(『세조실록』 참고.) 어머니를 봉양하려고, 자청하여 강원도고성군수(高城郡守)과 영월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하였다. 두 고을에서 선정(善政)을 많이 펼쳤으므로 영월의 백성들이 1년간 더 유임해줄 것을 조정에 청하였으나, 임기가 차자 고향 강릉으로 돌아왔다. 또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비명」 참고.)

성종 시대의 활동

1471년(성종 2) 2월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최항(崔恒)이 조정의 젊은 관료 중에서 문사(文辭)가 훌륭한 자로서 최응현·임사홍(任士洪) 등 6명을 뽑아 아뢰자, 성종이 우대하여 서용하도록 하였다.(『성종실록(成宗實錄)』 참고.) 1480년(성종 11) 어머니 상을 당하여 강릉에서 3년 동안 시묘(侍墓) 살이를 하였는데, 한 번도 움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고 지나치게 슬퍼하고 소식(素食)하다가 거의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그의 효행이 널리 알려지자, 대신들이 그를 천거하였고, 성종도 그를 효자·충신으로 생각하였다. 1483년(성종 14) 4월 상복을 벗자,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에 임명되었으나, 그가 굳이 사양하자, 성균관 사성으로 바꾸어 임명하였다. 그해 8월 성종이 그를 몰래 경상도 안동(安東)으로 보내어 수령들의 불법을 적발하고 지방 학교를 살펴보도록 하였다.(『성종실록』 참고.) 조정에서 다시 집의에 임명하였다가, 1484년(성종 15) 7월 송도(松都)에 의심쩍은 옥사가 오래도록 결판이 나지 않자, 특별히 그를 보내어 심문하도록 하였다. 그가 명쾌하게 분석하여 판결을 내리자, 성종이 가상히 여겨 안장이 갖추어진 말을 하사하였다.(「비명」 참고.) 1484년(성종 15) 12월 성종이 몰래 최응현을 안성(安城)에 보내어, 수령(守令)만호(萬戶) 등의 불법(不法)을 적발하게 하였다.(『성종실록』 참고.)

1485년(성종 16) 5월 예빈시(禮賓寺)정(正)이 되어 세조의 왕후 정희왕후(貞熹王后)를 부묘(祔廟)할 때 집례(執禮)하니, 성종이 비단 한 필을 하사하였다. 1486년(성종 17) 5월 성종이 봉상시(奉常寺) 정최응현 등 5인을 불러서 윤대(輪對)하였다.(『성종실록』 참고.) 그해 12월 동부승지(同副承旨)이칙(李則)이 아뢰기를, “근래 전라도에 수적(水賊)이 점점 성하여 여러 섬에 사는 백성이 하나도 없습니다.” 하니, 성종이 봉상시 정최응현을 보내어 수군 절도사(水軍節度使)와 나주목사(羅州牧使)를 국문(鞫問)하게 하였다.(『성종실록』 참고.) 그때 그는 호남 지방에서 해적(海賊) 90여 명을 붙잡아서 그 죄를 다스렸다. 이듬해 1488년(성종 19) 2월 호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성종이 곧바로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하였다. 예조 참의로 전직되었다가 10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임명되었다. 1489년(성종 20) 대사헌에 임명되었고 1491년(성종 22) 7월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가 전임되었으며 9월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다가,(『성종실록』 참고) 1494년(성종 25)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이 되었다.(「비명」 참고.)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정월 오위 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官)을 겸임하다가, 6월 대사헌이 되었다.(『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참고.) 1497년(연산군 3)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1498년(연산군 4) 연산군의 뜻을 거역하였다고 파직당하여 고향 강릉으로 돌아갔다. 1499년(연산군 5) 3월 성균관 동지사로 임명되자, 최응현은 나이가 많다고 하여 사양하였다.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경은 사유(師儒)에 적합하므로 그 청을 들어줄 수 없다.” 하였다.(『연산군일기』 참고.) 1500년(연산군 6) 11월 천기(天氣)가 불순하여, 임금이 구언(求言)하였다. 이에 성균관 동지사최응현이 진언(進言)하기를, “천둥과 번개의 천변을 없애려면, ①경연(經筵)에 부지런히 나오고, ②옥사(獄事)와 송사(訟事)의 결단에 힘쓰며, ③군대의 여(旅) 이외의 정병(正兵)은 폐지하며, ④장성(長城)을 쌓지 마소서.” 하니, 연산군이 전교하기를, “쓸 데 없는 짓이다.” 하였다.(『연산군일기』 참고.) 1502년(연산군 8) 12월 한성부좌윤이 되었고(「비명」 참고) 1504년(연산군 10) 5월 공조 참판이 되었다가, 1505년(연산군 11) 1월 병조 참판으로 옮겼다.(『연산군일기』 참고.) 1507년(중종 2) 윤정월 5일 병이 나 서울의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80세였다.

성품과 일화

최응현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바탕이 아름답고 찬란하였다. 태어나자 총명하여 일찍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고, 놀이를 좋아하지 않아 보통아이들보다 달리 우뚝 뛰어났다. 집안에서 효도와 우애를 극진히 하고, 일에 임해서는 청렴과 검소로 자신을 가다듬었다. 어머니를 섬길 적에 잠시도 차마 곁을 떠나지 못하였고, 맛있는 음식을 반드시 손수 장만하여 봉양하였다.(「비명」 참고.)

1484년(성종 15) 7월 성종 때 개성부(開城府)에 사는 사비(私婢) 종지(柊知)가 가산(家産)을 지아비 장지(張知)의 여동생 용금(龍今)의 집에 맡겨 두었는데, 마침 용금이 죽자 용금의 딸 봉금(奉今)의 아들 김영우(金永祐) 등이 종지의 재물을 모두 훔쳐서 자기들의 것으로 만들고, 재물울 도둑맞았다고 속여서 말하였으므로, 종지가 본부(本府)에 정소(呈訴)하였다. 봉금 등은 말이 궁색해지자, 도망하여 서울에 와서 송사가 부정하다고 임금에게 상언(上言)하였다. 성종이 황해도관찰사에게 송사를 맡아서 추국(推鞫)하라고 명하였다. 관찰사가 추국을 끝마치기도 전에 봉금 등이 또 임금에게 추국이 정당함을 잃었다고 상언하니, 성종이 성균관 사성최응현을 보내어 추국하였다. 최응현이 엄하게 형벌하여 사건의 진상을 캐내자,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다 승복하였다. 그러나 봉금은 도망하여 숨어서 나타나지 않고, 또 임금에게 상언하기를, “최응현이 부정하게 형문(刑問)합니다.”고 하소연하였다. 즉시 성종이 성균관 사예(司藝)홍자아(洪自阿)에게 명하여 최응형이 부정하게 형문한 까닭을 추국하게 하였다.(『성종실록』 참고.) 마침내 최응현이 <봉금의 옥사(獄事)>를 엄격하게 추국하여 실정을 밝혀냈다. 그해 11월 성종이 성균관 사성최응현에게 말 한 필을 내리고, 전교하기를, “최응현을 내가 장차 크게 쓰려고 하지만, 지금 포장(褒奬)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강원도 강릉 북쪽 조산(助山)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율곡(栗谷)이이(李珥)가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강릉의 향현사우(鄕賢祠宇)에 제향되었다.(『율곡전서(栗谷全書)』 권17 형조참판 최공응현 신도비명(刑曹參判崔公應賢神道碑銘).)

부인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성균관 생원 남과(南薖)의 딸인데, 자녀는 5남 6녀를 두었다. 큰아들 최세충(崔世忠)은 현령이고, 둘째 아들 최세효(崔世孝)는 생원이며, 셋째 아들 최세절(崔世節)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호조 참판(參判)을 지냈다. 넷째 아들 최세덕(崔世德)은 현감(縣監)이고, 다섯째아들 최세도(崔世道)생원(生員)이며 여성째 아들은 최효량(崔孝良)이다. 첫째딸은 생원 이사온(李思溫)의 처이고, 둘째딸은 중추부 첨지사(僉知事)신돈의(愼敦義)의 처이며, 셋째딸은 참봉(參奉)이언(李漹)의 처이다. 넷째딸은 참군(參軍)신수례(申守禮)의 처이고, 다섯째딸은 장(直長)유세경(柳世卿)의 처이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율곡전서(栗谷全書)』
  • 『동문선(東文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점필재집(佔畢齋集)』
  • 『해동역사(海東繹史)』
  • 『해동잡록(海東雜錄)』
  • 『물재집(勿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