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거(薦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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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추천받은 자를 간단한 시험을 거쳐 관료로 임용하던 인사제도.

개설

조선시대의 관료 선발 방법은 크게 과거제와 음서제 2가지로 나뉘었다. 천거는 이 중에서 음서제에 포함되었다. 고위 관료의 추천에 의하여 일정한 시험을 거쳐 등용하는 이 제도는 보거제(保擧制)가 일반적이었다. 이외에 유일(遺逸) 천거, 효행(孝行) 천거, 성균관 공천(成均館公薦) 등이 시행되었다. 보거제에 의한 천거 대상은 전직 관리와 생원·진사·유학 등 양반 유생을 아울렀다. 천거를 받아 등용된 피천자가 장오죄(贓汚罪) 등을 범하였으면 천거한 천주(薦主)는 연좌되어 처벌을 받았다.

제정 경위 및 목적

천거는 대체로 2가지 방향에서 실시되었다. 하나는 인재 등용이요, 다른 하나는 정부의 교화 정책(敎化政策)에 부응하는 모범자에 대한 국가의 포상이었다. 조선건국 직후에는 국가의 체제와 문물 정비가 시급하였으므로 문무와 이임(吏任), 잡학 등 전 분야에 걸쳐 인재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그리하여 비정기적으로 필요에 따라 인재를 선발하는 방식이 요구되었으니, 그것이 천거제였다. 이는 역사적이면서 전통적인 인재 선발 방식으로써 법규에 의거한 정기 천거와 왕명에 의한 특별 천거가 주로 시행되었다.

내용

천거는 조선시대에 관료를 선발하는 인사제도의 하나였다. 추천 자격은 경외의 동서반 3품 이상에게 주어졌다. 이들은 3년마다 정월에 각각 3명을 추천하였다. 그 대상은 3품부터 무직까지였다. 또 매년 정월에는 동반 3품 이상과 서반 2품 이상이 각각 수령과 만호(萬戶)를 감당할 만한 자를 추천하는데, 모두 3명을 넘지 못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추천으로 임용된 자가 만약 장오(贓汚)·패상(敗常)의 죄를 범하였으면, 추천자인 거주(擧主)도 연좌되어 처벌받았다. 관찰사와 절도사도 매년 정월에 의정부와 육조 당상관 및 사헌부·사간원 관원이 추천하였으며, 충훈부에서는 공신의 자손 중 이임(吏任)을 감당할 만한 재능이 있는 자를 추천하였다. 이렇게 천거된 자는 시험을 거쳐 임용되었다. 시험 면제 대상은 일찍이 시재(試才)를 거쳤거나 이미 6품 이상의 현관(顯官)을 지낸 자였으며, 그 외에는 사서(四書) 중 1서와 오경(五經) 중 1경을 자원(自願)에 따라 시험하였다.

의정부의 추천은 그 후 확대되어, 문반으로는 이조(吏曹)·병조(兵曹)·호조(戶曹)의 판서, 개성·강화 양도(兩都)의 유수(留守), 평안·함경 양계(兩界)의 관찰사, 광주유수, 의주부윤, 수원유수, 동래부사도 추천하였으며 무반으로는 양국(兩局) 대장, 수어사(守禦使), 총융사(摠戎使), 통제사(統制使), 함경북도·평안도의 병사(兵使) 등도 추천하였다. 현임 의정(議政)이 유고(有故)면, 전임 의정에게 천거권을 부여하였다. 후에는 금위대장과 제주목사, 회령부사, 강계부사도 그에 포함시켰다.

천거 대상은 각 도의 전직 관리와 유생을 아울렀다. 각 도 전직 관리·생원·진사·유학(幼學) 중 재행(才行)이 현저한 자를 식년마다 세수(歲首)에 한 고을의 사람들이 수령에게 보거(保擧)하고, 수령은 이것을 관찰사에게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면 관찰사는 이들을 초록하여 추천하는데, 하삼도(下三道)인 충청도·경상도·전라도는 3명, 상오도(上五道)인 강원도·경기도·평안도·함경도·황해도는 2명을 넘지 못하도록 하여 피천자 수를 제한하였다. 명단의 이름 아래에는 그 재행을 기록하였다.

생원과 진사는 나이가 30세 이상, 유학은 40세 이상이며, 전직 관리는 나이에 구애하지 않았다. 만약 추천된 사람의 명실(名實)이 부합하지 않거나 나이를 함부로 기록한 자는 논죄하였는데 그 고을의 보거인은 인재가 아닌 사람을 추천한 율로 논하고 관찰사와 수령은 파직하였다. 그리고 서울 사람이 향곡(鄕曲)을 왕래하면서 연줄로 해서 함부로 피천된 자는 보거자와 함께 같은 죄로 논하였다.

수령의 천거는 보다(조금 더) 신중하였다. 수령으로 그 재행이 합당한데도 추천되지 못한 자는 이조당상관이 추천하도록 하였다. 십고십상(十考十上)과 오고오상(五考五上)인 자는 추천이 없더라도 모두 추천되었으며, 피천되어야 할 자가 추천되지 않았으면 해조(該曹)에서 조사하여 추천하였다. 여기서 십고십상이란 10번의 고과(考課)를 치르는 가운데 10번 모두 상등(上等)을 받은 것이고, 오고오상이란 5번의 고과 중 5번 모두 상등을 받은 것을 말하였다. 이렇게 추천으로 수령에 제수된 자가 장오죄(贓汚罪)를 범하였으면 그를 추천하였던 천주(薦主)를 파직하고, 그 죄가 중(重)하면 삭직(削職)하였다.

변천

천거제도는 1392년(태조 1) 도평의사사에서 건의한 것이 채택되며 시행되었다. 천목(薦目)은 문(文)·무(武)·이임(吏任)·잡학(雜學)이 모두 포함되어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의 7과(科)와 유사하였다. 이 같은 천거제도는 조선건국 이후 관료 체제를 재편하고 부족한 관료 수요를 원활하게 공급하며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필요하였다. 이 천거법은 『경제육전(經濟六典)』에 수록되어 문반 6품 서반 4품 이상의 관리들이 3년마다 과(科)마다 각 1명씩을 천거하도록 하였다.

천거는 왕명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주로 고위 관료가 천거하였다. 대간과 육조·의정부·이조·병조 등이 천주가 되고 피천자는 보통 산관 3품 이하부터 6품 이상을 대상으로 하였다. 1404년(태종 4)에는 의정부에 명한 전교를 정식화하고(『태종실록』 12년 1월 26일), 이듬해에는 무관의 보거법을 제정하였다.

그렇지만 이러한 천거제도는 제도상의 여러 미비점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1406년(태종 6)에 서울과 지방의 대소관이 천거한 인재는 직품(職品)을 종류별로 나누어 일일이 기록하여 책을 만들고, 매번 전주(銓注)할 때 직품에 따라서 계문하여 제수하되 3년에 한 차례 시행하는 것을 정식으로 삼았다. 만약 재주를 지니고도 초야에 은거하는 선비가 있을 경우에는 연한에 구애없이 실봉(實封)하여 특별히 천거하게 하였다(『태종실록』 6년 2월 7일). 천거제는 3년마다 한 번 행해지는 정기 인사제도였으며, 초야에 묻힌 선비를 천거하는 유일(遺逸)에 대해서는 예외 규정을 두었던 것이다. 보거자(保擧者)는 현관 6품 이상이며, 피천 대상은 산관 3품 이하로서 18세 이상으로 정하였다. 피천자는 이조에서 서예·산학·율학의 능력을 시험하였다.

『경제육전』의 천거 조항은 그 후 거듭 강조되었다(『태종실록』 8년 11월 16일). 이전에는 거주의 처벌이 합당하지 않은 자를 천거한 자라고 하여 그 문구가 애매하였으나, 1412년(태종 12)에는 이를 구체화하여 피천자가 강상(綱常)을 허물어뜨리거나 탐오(貪汚)하여 장죄(贓罪)를 저지른 것만 아니면 거주를 연좌하지 않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2년 1월 26일). 거주의 책임을 덜어 줌과 동시에 천거의 활성화를 꾀하고자 한 것이었다. 1417년(태종 17)에는 『원전(元典)』에 수록된 갑사의 천거법을 강화하기도 하였다.

1423년(세종 5)부터는 삼과(三科) 천거를 시행하였다(『세종실록』 5년 11월 25일). 삼과는 변장·수령·이임 등 세 과목을 가리켰다. 동반 6품과 서반 4품 이상이 매년 한 번씩 천거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그 피천 대상을 외방 대소 사신과 수령으로 확대하였다. 세종은 무반직의 천거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져, 즉위 직후에 천호·만호가 될 만한 자를 천거하도록 한 바 있으며 1426년(세종 8)에는 무재(武才)의 천거를 3년마다 하던 것을 삼과의 예에 따라 매년 하도록 고쳤다. 이것을 1447년(세종 29)에는 ‘천기칠과(薦其七科)’라 하였는데, 이로써 『경제육전』의 천목(薦目)을 회복하였다.

이러한 보거법은 약간의 손질 과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규정되었다. 보거제는 주로 현직 관리들의 전보(轉補)를 목적으로 시행되었는데, 차츰 무직자들이 처음 관직에 들어오는 관문으로써 그 기능이 확대되었다. 보거 없이도 생원과 진사를 천거하도록 한 제도는 『전록통고(典錄通考)』에 규정되었으며, 중종 연간에는 청백리 자손의 천거를 시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선조 연간에는 염근리(廉謹吏)의 천거가 시행되었다. 이 제도는 숙종·영조대로 이어져 천주를 2품 이상으로 상향 조정하고, 각각 아는 바를 들어서 서장(書狀)을 의정부에 보내고, 의정부에서 회의하여 초계(抄啓)하도록 하였다.

천거제는 보거제 외에도 유일 천거, 효행 천거, 성균관 공천 등이 시행되었다. 유일은 『경제육전』에 수록된 천목(薦目) 모두를 아우르는 ‘숨어 있는 인재’라는 의미로 주로 쓰이다가, 사림 정치가 시작되면서 특정 정치 세력의 지도자를 나타내는 정치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중종 연간에는 참상직으로 제수된 유일이 많은 수를 차지하였는데, 그것은 사림 세력이 피천자를 6품 혹은 수령직에 초서(超叙)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건의한 데 따른 것이었다. 천거과(薦擧科)를 실시하기 직전의 피천자가 처음 벼슬을 시작할 때의 관직을 살펴보면, 대간(장령·지평)과 육조의 낭관·현감 등에 두드러지게 진출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것은 사림 세력이 득세하였을 때의 우월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필요에 의하여 시행되었는데, 사화로 사림의 기세가 꺾이면서 유일 천거는 중단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다가 중종 말에 가서야 유일 천거가 재개되었다. 유일로 피천된 인물에 대한 종6품직 제수는 점차 관행처럼 되어, 유일이 가장 많이 천거된 선조대에도 거의 종6품직을 제수하였다. 출신과 출처(出處)를 함께하는 유일을 자신들이 천시해 온 음관(蔭官)과 동렬에 위치 지울 수 없었던 사림들은 유일과 음관을 차별화 하고자 하였다. 광해군과 인조대에는 유일 고유의 관직을 별도로 설치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유일과 음관의 차별은 사림의 정치의식의 산물일 뿐, 유일 스스로 음관이라 자처하는 사례가 보이고 있다는 사실에서 유일은 음관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효행 천거는 유교를 정치 이념으로 내세운 조선에서 유교 윤리의 보급과 장려를 위하여 충신·효자·절부(節婦) 등을 천거해 포상하는 정책으로써 건국 초기부터 실시하였다. 그에 따라 효행 천거도 인재 등용의 한 방법으로 인식되어 무직자에게는 처음 관직에 나가는 통로로 기능하였다. 이들 피천자들은 주로 종8품 내지 종9품의 속아문(屬衙門) 관직 및 상급 서리인 녹사(錄事)나 토관직(土官職)에 등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는 자리가 없어 산관직을 제수하거나, 동반직을 감당할 능력이 없어 서반직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며, 아예 등용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것이 『경국대전』에 이르러서는 상으로 관직이나 물품을 주며 특이한 자에게는 정문(旌門)을 세워 주고 복호(復戶)하여 준다는 내용으로 규정되었다. 여기서 정문은 모범이 되는 사람이 사는 마을 입구나 집 문 앞에 붉은 문을 세우던 것을 말하며, 복호는 국가가 호(戶)에 부과하는 요역(徭役) 부담을 감면하거나 면제해 주던 것을 말하였다. 효행자들은 무직자가 70% 이상을 차지하였으며, 전·현직 관리가 약 20%였다. 무직자 가운데에는 생원·진사·유학·학생·교생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효행 천거제도는 소과 합격자와 유생이 처음 관직에 나가도록 하는 기능을 아울러 가지고 있었다. 상으로 관직을 주는 경우에 무직자에게는 종9품직을 제수하였으며 원래 관직이 있던 자는 한 자급을 올려 주었다.

세종 이후 유명무실해졌던 효행 천거는 명종·선조대에 들어서서 다시 활발하게 행해졌다. 명종은 특히 1554년(명종 9)에 ‘경외의 사족 가운데 효행이 뛰어난 자가 많이 있다고 하니, 그들을 상당직(相當職)에 제수하는 일을 이조에 알리도록 하라.’ 하여 많은 효행자에게 상직(賞職)으로 등용되는 특전을 베풀었다. 그 후에도 여러 차례에 걸쳐 피천자의 상당직 제수가 이루어졌다. 선조대에도 효행자의 천거와 포상이 여전히 이루어졌지만, 상직의 사례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반면에 정문이나 복호가 크게 증가하였다.

성균관 공천제는 성균관에서 수년 동안 머물면서 늙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한 자를 예조(禮曹)의 월강분수(月講分數)와 원점(圓點)의 다소를 상고하여 경관(京官)에 서용하는 제도로서, 『속전등록(續典謄錄)』에 규정되어 조선초부터 시행되었다. 이것이 『경국대전』에 “여러 해 성균관에 머물고 학문이 깊으며 행실이 뛰어난 자로서 나이가 50세에 이른 자, 성균관의 일강과 순과 및 예조의 월강을 통고하여 성적이 우수한 자, 여러 해 문과에 응시하여 관시 한성시에 7번 입격하고 나이가 50세에 이른 자는 왕에게 아뢰어 등용한다.”라고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다.

이 규정에서 피천자의 연령은 단종대의 40세가 『경국대전』에서는 50세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런데 이 하한 연령은 성균관 유생 중 50세 이상 된 자가 없어 천거의 실효가 없다는 주장으로 인하여 다시 40세로 낮추어졌다. 그래도 여전히 같은 이유로 천거는 부진하여 조선초기에 거관유생(居館儒生) 또는 누차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자에 대한 성균관 공천 사례는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으므로 제도의 실효성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1524년(중종 19)에 공천을 논하면서 신묘 임진년 간에 안양생(安良生)이 성균관 유생으로 참봉을 제수받았다는 내용이 있었다. 이 신묘 임진년 간은 곧 성종대를 가리키는 듯하였다. 중종대에 정계 진출이 활발해진 사림은 성균관 공천을 사림 세력의 정계 진출을 위한 발판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던 것 같다. 이에 대하여 “지난번 젊은 무리들은 자기들이 아는 유생이면 거관하는 자가 아니더라도 6품의 벼슬을 제수하였으므로 그 폐단이 매우 컸다. 그들은 자기 편 인물을 발탁하여 3·4년이 되지 않아 문득 당상관에 승진시켰으니, 매우 잘못된 일이다(『중종실록』 19년 5월 29일).” 하여 일부의 반발을 보이면서 그 이후에도 공천은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1575년(선조 8)에 왕에 의하여 성균관 공천은 폐지되고 말았는데, 이때의 선조의 뜻은 “학생을 공천하는 것이 대전의 법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뒷날에 폐단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그러한 것이다.”라고 한 데 있었다. 그러나 공천제도는 『경국대전』에 실려 있었으며, 이때의 폐지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에 이 공천제는 없어지지 않고 계속 시행되어 조선후기까지 이어져 나갔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전록통고(典錄通考)』
  •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 임민혁, 『조선시대 음관(蔭官) 연구』, 한성대학교출판부, 2002.
  • 정구선, 『조선시대 천거제도 연구』, 초록배,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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