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선전(奉先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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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7대 국왕인 세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진전.

개설

1469년(예종 1)에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尹氏)가 세조의 능인 광릉(光陵) 옆에 있는 봉선사(奉先寺)를 능침사(陵寢寺)로 정하고 봉선사 동쪽에 숭은전(崇恩殿)을 지어 세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이후 숭은전은 봉선전(奉先殿)으로 개칭되었다. 봉선사 봉선전은 사찰 경내에 진전(眞展)을 설치하던 고려시대의 전통을 계승한 유일한 건축물이다.

연원

진전은 진(眞)이라 불리는 초상화를 봉안하고 제사를 지내는 건물이다. 이러한 진전은 종묘 외에 따로 세운 원묘(原廟)로, 중국 한나라 때부터 건립되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는 불교를 수용한 삼국시대부터 이미 진전을 건립했을 가능성이 높으며, 고려시대에 진전이 크게 유행하였다.

고려의 원묘 제도는 진전사원과 궁궐 내의 경령전(景靈殿)이 함께 운영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이는 불교와 유교가 결합된 특수한 형식이다. 고려시대에 진전의 건립은 크게 3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나라를 세웠거나 큰 공이 있는 왕을 기리기 위한 진전은 왕의 탄생지,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문 거처인 잠저(潛邸), 전쟁에서 승리한 전승지(戰勝地), 사후 묘역인 능소(陵所) 등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에 세웠다. 둘째, 궁궐 안에 왕실 가묘(家廟)의 성격을 지닌 진전을 세웠다. 궁궐 내 진전은 여러 위(位)를 함께 봉안함으로써 종묘처럼 일정한 묘제(廟制)를 지니고 있었으며 선조(先祖)가 살아 있을 때처럼 예를 행하였다. 셋째, 왕실 일원의 명복과 안녕을 빌기 위한 진전은 불교 사찰에 건립되었다.

내용 및 변천

(1) 조선초의 원묘 제도

조선초기에는 아직 유교적 절차가 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원묘 제도는 고려시대의 전통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먼저 조선의 건국주인 태조의 진전을 5개 건립하였다. 함경도 영흥에 준원전(濬源殿)을 비롯하여 경상도 경주에 집경전(集慶殿), 평안도 평양에 영숭전(永崇殿), 전라도 전주에 경기전(慶基殿), 황해도 개성에 목청전(穆淸殿)을 건립하였는데, 이들이 위치한 곳은 모두 태조의 행적과 관련이 있거나 정치적으로 중요한 곳이다.

궁궐 안에는 신의왕후의 혼전(魂殿)인 인소전(仁昭殿)을 지었는데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내부에 영정을 봉안하였다. 태종은 1406년(태종 6) 창덕궁 북쪽에 인소전을 새로 건립하고 그 옆에 불당을 세웠는데 인소전은 1408년(태종 8) 태조의 혼전으로 사용하면서 태조 영정을 봉안하고 문소전(文昭殿)으로 개명하였다.

불교 사찰에 진전이 건립된 예는 1396년(태조 5)에 신덕왕후의 정릉(貞陵) 옆에 왕실 원당(願堂)흥천사(興天寺)를 창건하였는데, 이곳에는 태조의 아버지 환왕의 진전이 있었다. 환왕의 진전은 1400년(정종 2)에 계성전(啓聖殿)으로 개명하였다. 환왕은 조선 건국주의 아버지로써 추존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진전 건립은 조선전기 유교 제도가 도입되기 전인 고려의 예를 따른 것이다. 1424년(세종 6) 유교 예제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면서, 원묘 제도에는 추존왕의 진전은 없었다는 이유로 환왕의 진전은 폐지되었다.

(2) 봉선사 봉선전

조선시대 왕의 진전이 사찰에 건립된 경우는 세조가 유일하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진전이 고례(古禮)가 아닌 불교 및 도교의 습속이라 하여 부정적인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세조가 세상을 떠난 후 왕비인 정희왕후는 광릉 옆의 사찰인 운악사(雲岳寺)를 세조의 명복을 비는 능침사로 정하였다. 1468년(예종 즉위) 예종은 운악사에 직접 봉선사라는 편액을 내려 사액(賜額)하였으며 89칸의 대규모 중창 불사를 하면서 세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숭은전을 사찰 동쪽에 지었다. 이후 1472년(성종 3) 숭은전은 봉선전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이미 유교식으로 국가 의례가 정비된 상황에서 세조의 진전인 봉선전만을 사찰에 지은 이유는 『증보문헌비고』 영전(影殿)의 기록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기록에는 한(漢)나라 때 국가 차원에서 영구히 위패를 모시는 세실(世室)의 신주는 대상이 끝나면 지방의 군(郡)과 제후국에 따로 사당을 설립하여 모신 뜻을 따라 영전을 건립하였는데, 세조의 어진을 봉선전에 모신 것은 세조 또한 세실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사후 종묘와 사직을 안정시킨 것으로 평을 받는 세조가 세실 즉 불천위(不遷位)로 인정받으면서 불심이 깊었던 그의 성향을 고려해 사찰에 진전을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1469년(예종 1) 세조 사후 1주기인 9월 3일 소상(小祥) 때 영정을 봉안하였는데 이는 고려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또한 봉선전에서는 술을 올리지 않고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성종은 재임 기간 중 1477년(성종 8), 1482년(성종 13), 1489년(성종 20), 1491년(성종 22) 4차례나 광릉과 봉선전에 행차하여 참배하였다. 성종이 광릉에 행차할 때마다 사찰 경내에서 식사를 한다는 이유로 관료들이 이의를 제기하기도 했다. 이후 연산군, 중종, 명종 또한 광릉을 참배한 후 봉선전에서 다례를 거행하였다.

임진왜란 때 봉선사는 왜군이 점령하고 있었는데, 1593년(선조 26) 퇴각하면서 저지른 방화로 봉선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전각이 소실되었다. 당시 봉선전에 모셨던 세조 초상화는 승려 삼행(三行)이 지켜 광릉 참봉(參奉)이이첨(李爾瞻)과 함께 의주 행재소로 모시고 갔기 때문에 보존될 수 있었다. 병자호란 때인 1636년(인조 14) 이후 중창된 봉선사에는 봉선전 대신 어실각이 설치되어 세조와 정희왕후의 위패가 봉안되었다.

(3) 강화도 봉선전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전란의 염려가 있자 1618년(광해군 10) 세조의 초상화를 한두달 동안만 잠정 개성부에 봉안하라고 명하여 평안북도 연변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 별전에 봉안하였다. 다음해에 남별전(南別殿)을 지어 태조·세조의 초상화를 함께 봉안하였다. 그러나 3년 후에는 북쪽의 전란을 염려한 광해군이 강화도에 영숭전(永崇殿)과 봉선전을 지어 태조의 초상화는 영숭전으로, 세조의 초상화는 봉선전으로 다시 옮겼다.

당시 지어졌던 봉선전은 이후 1637년(인조 15)에 불에 타 버렸으며 세조의 초상화는 약간 파손되기는 하였으나 서울로 돌아와 원종의 초상화를 봉안했던 숭은전에 함께 봉안했다가 이후 열성어진과 함께 영희전(永禧殿)에 봉안하였다.

형태

광해군대 지어진 봉선전은 아니지만 후대에 다시 복원된 강화도 봉선전의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가 현재 남아 있다. 1881년(고종 18)에 제작된 「강화부궁전도(江華府宮殿圖)」로서, 현재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강화도 행궁과 제묘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세부 건물의 규모를 그림으로 기록하여 보수 공사를 완료한 후 국왕에게 진상하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이 그림에 나오는 봉선전은 1858년(철종 9) 유수유장환(兪章煥)에 의해 복건(復建)된 것이다. 그림에서는 봉선전과 영조의 초상화를 봉안한 만녕전(萬寧殿)이 한 담장 내에 있으며 만녕전 동쪽에 봉선전이 자리하고 있다. 봉선전은 만녕전에 비해 높고 화려한 건물로 그려져 있는데 봉선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다포계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에는 제례 때 활짝 열 수 있는 분합문을 달았다. 그림에 나오는 봉선전은 1866년(고종 3) 병인양요 때 소실되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식우집(拭疣集)』
  • 허흥식, 『고려 불교사 연구』, 일조각, 1986.
  • 안선호, 「조선시대 진전 건축 연구」,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 정은주, 「강화부궁전도의 제작배경과 화풍」, 『문화역사지리』21권,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 2009.
  • 조선미, 「조선왕조 시대에 있어서의 진전의 발달:문헌상에 나타난 기록을 중심으로」, 『고고미술』165, 한국미술사학회,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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