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현사(普賢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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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등을 보관했던 묘향산의 절.

개설

보현사(普賢寺)는 평안북도 영변군 북신현면의 묘향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초기 창건 당시에는 매우 작은 사찰이었다고 한다. 1028년(고려 현종 19) 이후부터는 탐밀(探密)과 굉확(宏廓)이 243칸의 건물을 이룩하여 묘향산의 대표적인 가람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국왕의 초상화인 어진(御眞)을 보관하기도 했으며, 『조선왕조실록』 등 각종 귀중한 기록들을 보관하기도 하였다. 또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청허휴정은 경상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에 보관되어 있던 석가여래사리를 보현사에 봉안하기도 하였다.

내용 및 특징

보현사는 고려초기인 968년(고려 광종 19)에 창건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매우 작은 규모였지만, 고승(高僧)으로부터 화엄교관(華嚴敎觀)을 전해 받은 탐밀과 그의 제자 굉확이 모여드는 학승(學僧)을 수용하기 위해 기존의 보현사 동남쪽 100여 보 되는 장소에 250여 칸의 여러 전각을 계속 증축하면서 묘향산의 대표적인 수행도량이 되었다. 그 후 고려의 역대 왕들이 전답을 시납하였으며, 조선후기에 이르기까지 약 6차례의 중창이 이루어졌다. 이규보(李奎報)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보현사가 북쪽 지방에서는 유명한 절이며, 고상한 인물들이나 승려 등 세속을 떠나서 진리를 탐구하는 자들의 집결지라고 하였다.

변천

조선전기에 보현사는 200여 명의 승려가 사는 큰 절이었다. 1492년(성종 23) 경연(經筵)에서 특진관(特進官)김백겸(金伯謙)이, 자신이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어 보현사에 사는 중 200여 인을 보니 도첩(度牒)이 없는 자가 절반이나 되었는데 이들을 군보로 충당하면 유익하지 않겠느냐고 하였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않았다(『성종실록』 23년 2월 21일).

보현사는 서북 묘향산에 위치하여 급난을 피할 수 있는 요지로 인식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사명유정은 양산 통도사에 보관되어 있던 석가여래 진신사리가 왜적에게 침탈될까 염려하여, 이를 꺼내 두 함으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금강산에 보관하고 또 하나는 묘향산의 휴정에게 보내 보관하도록 하였다. 휴정은 묘향산 보현사에 이를 봉안하고 이 사실을 비를 세워 기록하였다. 그리고 유정이 보관하던 것은 침탈의 대상이 된다고 생각했던 사리를 담은 금은보화를 없애고 사리만 다시 통도사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이런 인식에 따라 보현사는 임진왜란 때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보호하는 사찰이 되었다. 1597년 9월에는 강화(江華)에 보관하던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영변(寧邊)묘향산 보현사 별전(別殿)에 옮겨 안치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인 1599년(선조 32) 선조는 보현사에 보관해 둔 각종 문서를 다시 도성으로 가지고 올라오게 하였다(『선조실록』 32년 7월 8일).

보현사는 1634년(인조 12) 화재로 건물들이 불타자 명조(明照)와 각성(覺性)이 중창하였으며, 1761년(영조 37) 9월에 다시 실화로 절이 모두 불타버리자 4년에 걸쳐 남파(南坡)·향악(香岳) 등이 여섯 번째로 중창하였다. 또한 1818년(순조 18)에는개금불사(改金佛事)가 이루어졌다. 당시 이곳에 있던 석가여래상과 양대보살상(兩大菩薩像)·십육나한상(十六羅漢像)의 채색이 모두 퇴색되어, 미타존상(彌陀尊像)과 대웅전의 석가여래상·양대보살상을 개금(改金)하고 십육나한상에는 채색을 다시 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임하필기(林下筆記)』
  • 『지산집(芝山集)』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 이능화, 『조선불교통사』, 신문관, 1918.
  • 한우근, 『유교정치와 불교』, 일조각, 1993.
  • 이정 편저, 『한국불교사찰사전』, 불교시대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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