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수(沈光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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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8년(선조 31)∼1662년(현종 3) = 65세]. 조선 중기 인조(仁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중추부(中樞府) 첨지부사(僉知府事), 공조 참의(參議)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희성(希聖), 호는 노연(魯淵)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判書)심액(沈詻)이며,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병조 판서에 증직된 권징(權徵)의 딸이다. 친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심우준(沈友俊)이고, 양할아버지는 심우준의 동생으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낸 심우승(沈友勝)이다.

인조 시대의 활동

1627년(인조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갔다. 이듬해인 1628년(인조 6) 이귀(李貴)와 최명길(崔鳴吉)을 중심으로 인조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을 임금으로 추존하려는 논의가 일어나면서, 이와 관련된 논의는 몇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6년 3월 8일, 인조 8년 8월 24일, 인조 8년 9월 9일, 인조 8년 12월 4일] 그런 가운데 1631년(인조 9) 인조는 대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정원군 추숭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고, 이어 명(明)나라 황제에게 주청을 하겠다고 주장하였다.[『인조실록』인조 9년 4월 20일] 이에 대신들을 비롯하여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 홍문관(弘文館), 예조 등에서 정원군의 추숭을 적극 반대하였고, 심광수 또한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한(漢)나라 이래로 생부를 추숭한 적은 없었다며 적극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인조실록』인조 9년 5월 2일, 『미수기언(眉叟記言)』 별집 권20 「노연심공묘갈명(魯淵沈公墓碣銘)」 이하 「노연심공묘갈명」로 약칭]

1635년(인조 13)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 : 효종(孝宗))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이때 봉림대군이 구우(瞿佑 : 명나라 초기의 유학자)의 『전등신화(剪燈新話)』에 대하여 묻자 심광수(沈光洙)가 “학문의 요점은 의리를 밝게 강론하여 밝히고 덕성을 양성하는 데 있습니다. 음탕하고 불경한 글은 사람의 지려(志慮)를 좀먹는 것이니, 이와 같은 글에 총명을 소모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노연심공묘갈명」]

한편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심광수는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파천(播遷)하는 인조를 호종(扈從)하였다. 이후 적의 기세가 강성하여 성안에 포위되어 있었는데, 이때 적으로부터 왕세자의 인질 요구가 있었다. 그러자 심광수는 세자가 인질로 나갈 수 없는 의(義)를 말하고, 강력한 척화론(斥和論)을 주장하며 화의론자(和議論者)인 최명길(崔鳴吉)을 참형할 것을 요구하였다.[『인조실록』인조 14년 12월 18일,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25 「인조조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그러나 얼마 후 조선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심광수는 춘천으로 퇴거(退去)하여 거실 이름을 ‘졸락(拙樂)’이라 짓고 스스로를 노연(魯淵)이라 하며 은거하였다.[「노연심공묘갈명」] 그런 가운데 1647년(인조 25) 사헌부 지평(持平)을 제수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인조실록』인조 25년 8월 18일]

효종 시대의 활동

1649년(효종 즉위년) 산림은일(山林隱逸) 우대 정책에 의해 대폭적인 산림 수용이 이루어지면서 심광수는 사헌부 지평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진선(進善) 등에 임명되었으나, 이번에도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효종실록(孝宗實錄)』효종 즉위년 10월 17일, 효종 즉위년 11월 22일, 「노연심공묘갈명」] 대신 사직소를 통하여 인조의 뜻에 거슬려 처벌을 받았던 이경여(李敬輿)와 홍무적(洪茂績), 그리고 이응시(李應蓍) 등의 사면을 주장하였다.[『효종실록』효종 즉위년 12월 3일] 그러다가 1650년(효종 1) 심광수는 사헌부 장령(掌令)에 임명되면서 관직에 나아갔다.[『효종실록』효종 1년 10월 21일] 당시 인조의 국상기간임에도 불구하고 공주의 길례(吉禮)를 거행하려 하자, 심광수는 예문(禮文)에 “당사자와 주혼자(主婚者)가 기년(朞年) 이상의 상이 없어야 혼인을 할 수 있다”고 한 것을 들며 예에 어그러짐을 논하였다.[『효종실록』효종 1년 11월 5일]

한편 심광수는 남인(南人)으로서 이이(李珥)와 성혼(成渾)을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자는 서인(西人)들의 논의를 적극 반대하였다.[『효종실록』 효종 1년 11월 18일] 이이와 성혼을 문묘에 종사하자는 상소와 이에 대한 논쟁은 인조 대부터 끊이지 않았는데, 영남(嶺南)에서 이에 대한 거짓 비답이 전파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관련자는 자살을 하였고, 사헌부 집의(執義)조형(趙珩) 등은 이 문제를 대역죄로 논하였으며, 의금부에서는 국문(鞫問)할 것을 청하는 등 일이 크게 번지려 하자 심광수는 대역으로 다스리는 것이 옳지 않다고 주장하며 힘써 변론하였다.[『효종실록』효종 1년 윤11월 5일] 그 결과 역모와는 다른 성격의 사건이므로 죄인들을 서울로 데려와서 처벌하는 대신에 가둔 곳에서 주벌을 하는 것으로 사건이 매듭지어 졌다.[『효종실록』효종 1년 윤11월 5일, 「노연심공묘갈명」]

1652년(효종 3)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된 심광수는 치도팔조(治道八條)를 올렸다.[『효종실록』효종 3년 2월 8일, 「노연심공묘갈명」] 치도팔조에는 사물의 본체와 그 쓰임을 밝히고[明體用], 학교를 일으키며[興學校], 내외법을 엄하게 하고[嚴內外], 예양을 숭상하며[崇禮讓], 자신의 허물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好聞過], 헛된 이름을 버리고[去虛名], 실제 혜택을 추진하며[推實惠], 형제를 설치[設形制]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노연심공묘갈명」] 그러나 이후 이응시가 탄핵되는 과정에서 홀로 정계(停啓)하였다가, 이것이 문제가 되어 체직되었다.[『효종실록』효종 3년 12월 4일, 효종 3년 12월 5일, 효종 3년 12월 7일]

이듬해인 1653년(효종 4) 영의정이경석(李景奭)은 그 인품을 위에서도 이미 알고 있다며 심광수를 추천하였고, 이후 심광수는 장악원(掌樂院)정(正)을 거쳐 1654년(효종 5) 상의원(尙衣院) 정과 사복시(司僕寺) 정으로 임명되었다.[『효종실록』효종 3년 2월 8일, 효종 4년 윤7월 11일, 「노연심공묘갈명」] 그해 여름에 홍수가 나자 효종이 자책하며 구언(求言)하였는데, 심광수가 상소하여 “재변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을 잘못하여 일어난다.”고 하니, 효종이 “공의 격언은 사람으로 하여금 공경심이 일어나도록 한다.”고 하였다.[「노연심공묘갈명」] 그리고 이해 6월 경연에 참가하여 유배당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세 아들들에 대한 선처를 건의하는 등 심광수는 당시 일반 사류들의 의견을 대변하기도 하였다.[『효종실록』효종 5년 6월16일] 이 해 11월에 다시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으나 부모의 상으로 인하여 벼슬에서 물러나 상중(喪中)에 있으면서 『가례보해(家禮補解)』를 제작하였다.[『효종실록』효종 5년 11월 9일, 「노연심공묘갈명」] 그는 상을 마친 후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가 1658년(효종 9) 11월에 승정원 승지에 특제(特除)되었으며, 송시열(宋時烈)과 더불어 경연에 참가하여 효종을 보좌하였다.[『효종실록』효종 9년 10월 16일, 효종 9년 11월 27일, 「노연심공묘갈명」] 이듬해인 1659년(효종 10)에는 중추부(中樞府) 첨지부사(僉知府使)로 경연에 참가하였으며, 많은 응지소(應旨疏)를 올렸다.[『효종실록』효종 10년 윤3월 30일]

현종 시대의 활동

1659년(현종 즉위년) 현종이 즉위한 후 선왕이 높여 썼던 신하라 하여 경연관으로 대우하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노연심공묘갈명」] 그러나 이듬해인 1660년(현종 1)에 다시 공조 참의를 제수하자, 심광수는 포용하는 도량과 과단성 있는 실천을 정치의 요체로 들며 치도(治道)에 관하여 상소하였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1년 2월 21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1년 1월 28일, 현종 1년 3월 22일, 현종 1년 11월 6일]

한편 이 해에 효종에 대한 자의대비(慈懿大妃)의 상복 문제를 결정하는 논의에서 송시열과 송준길(宋浚吉)이, 효종이 대통을 이은 것은 장남으로 이은 것이 아닌 까닭에 대왕대비의 복제(服制)를 1년으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큰 논쟁이 일어났다. 심광수는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그 논의가 예를 잃었으며 가(家)에서의 상례(喪禮)는 임금에게까지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종통(宗統)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3년설을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숙종실록』숙종 1년 5월 2일, 「노연심공묘갈명」] 이후 심광수는 승정원 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다.[『현종실록』현종 1년 11월 6일, 「노연심공묘갈명」] 그리고 그는 교외에서 문밖 출입을 하지 않고 3년을 지내다가 1662년(현종 3) 5월 2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나이 65세였다.[「노연심공묘갈명」]

한편 1675년(숙종 1) 숙종(肅宗)은 심광수의 예론을 높이며 포장할 것을 주장한 윤휴(尹鑴)의 건의에 따라 이듬해인 1676년(숙종 2) 그를 이조 참판으로 증직하였다.[『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숙종 2년 1월 2일]

성품과 일화

심광수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총명, 박학하였으며 반드시 미리 실천한 다음 말을 하였고, 평생토록 명예를 위한 행동이나 바른 도리를 벗어난 칭찬을 싫어했다. 또 성품이 한결같아 다른 사람을 권면할 때는 스스로 힘쓰도록 격려하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자기 몸을 잘 지켰다.[「노연심공묘갈명」] 아울러 성격이 과격하지도 않고 남 하자는 대로도 않고 꿋꿋이 자기 길을 걸어 군자들의 사모 대상이었으며, 높은 자리에 있다고 아랫사람들에게 자신을 과시하지 않았다. 남의 위태로움을 자신의 이로움으로 삼는 일을 부끄러워하였다.[『백호전서(白湖全書)』 권18 「제노연심승지광수문(祭魯淵沈承旨光洙文)」]

또한 그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즐기며 독서와 수행을 하였고, 점차 성장하면서 경서에 더욱 관심을 기울였다. 광해군(光海君) 시기에 아버지 심액이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절역(絶域)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는데, 동해 들판을 옮겨 다닐 때에 그의 나이가 16세였음에도 먼길에서 아버지와 함께 고생을 같이하였다. 이때 이명준(李命俊)도 바닷가로 유배되었는데, 심광수가 이명준을 늘 따라다니며 『주역(周易)』과 『시전(詩傳)』을 전수 받아 공부하였다고 전해진다.[「노연심공묘갈명」]

묘소와 후손

심광수는 수춘(壽春 : 현재의 춘천(春川))에서 1662년(효종 3) 5월 21일 사망하였다. 그 해 9월 12일 광주(廣州) 퇴촌에 안장했는데 현재의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행양방(杏楊坊)이다. 부인 안동 권씨(安東權氏)와 합장하였다.

부인 안동 권씨는 가산군수(嘉山郡守)권경남(權慶男)의 손녀이자, 사산감역관(四山監役官)권부길(權復吉)의 딸이며, 자녀는 1녀를 두었다. 아들이 없어 조카인 심백(沈栢)을 양자로 삼았다. 딸은 이진규(李震奎)와 혼인하였다.[「노연심공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호전서(白湖全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아름다운 날,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