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탁(尹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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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2년(성종 3)∼1534년(중종 29) = 53세.] 조선 중기 연산군~중종 때의 문신.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자(字)는 명중(明仲)또는 언명(彦明)이고, 호는 평와(平窩)이다. 본관(本貫)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윤사은(尹師殷)이고, 어머니 운봉 박씨(雲峰朴氏)는 운성부원군(雲城府院君)박종우(朴從愚)의 딸이다. 박종우는 태종의 서출 왕녀 정혜옹주(貞惠翁主)와 혼인하여 태종의 부마인데, 윤사은이 박종우의 얼서(孼壻)라고도 한다.(『성종실록』 성종 14년 7월 6일) 아버지 윤사은과 세종의 부마 윤사로(尹師路)는 사촌이다. 김종직(金宗直)과 김굉필(金宏弼)의 문인(門人)인 주계군(朱溪君)이심원(李深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96년(연산군 2) 사마시(司馬試)의 생원(生員)과 진사(進仕)의 양 과(科)에 모두 합격하였다. 6년 뒤인 1501년(연산군 7) 30세의 나이에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성균관에 소속되어 전적(典籍)을 역임하였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때에 삭녕(朔寧)으로 유배되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4 「대사성 윤선생탁 신도비명(大司成尹先生倬神道碑銘)」]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다시 등용되었는데, 1508년(중종 3)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을 거쳐서, 1509년(중종 4) 예조 좌랑(佐郞)이 되었다.(『중종실록』 중종 4년 2월7일) 이후 성균관 직강(直講)을 거쳐, 사예(司藝)가 되었고, 1518년(중종 13) 8월 성균관 대사성에 임명되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별직(別職)으로 옥사(獄事)를 맡게 되자, 사직하였다.[『송자대전』 권154 「대사성 윤선생탁 신도비명」]

1525년(중종 20) 대사성의 직임을 맡았던 그가 신병 때문에 왕에게 사직할 것을 청하자, 균관 동지사(同知事)로 임명하였으며, 1527년(중종 22)에는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중종실록』중종 20년 2월 14일 · 8월 8일 · 9월 12일 · 9월 27일, 중종 22년 12월 15일] 1528년(중종 23) 개성부 유수(開城府留守)로 임명되자, 그해 5월 이행(李荇)이 건의하기를, “윤탁은 성균관 동지사였다가 지금 개성 유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실학(實學)에 정숙(精熟)한 사람인데, 외방(外方)으로 나가도록 한다면 교훈을 전담할 사람이 없게 됩니다. 윤탁은 항시 병이 있기 때문에 사무를 보는 자리에는 차임(差任)하지 않고 성균관에서 교훈하는 일을 전담하게 했는데, 더러 병 때문에 사진(仕進)하지 않는 때가 있더라도 유생(儒生)들이 그의 집으로 가서 수업(受業)을 하였고, 조관(朝官)들도 찾아가서 의심나는 것을 질정(質正)했었습니다. 관작의 임명에 관한 일은 말하기가 어렵기는 하지만, 유수(留守)는 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할 만한 사람이 있지만 교훈하는 일은 윤탁이 아니면 할 수 없으니, 유수를 체직하고 그대로 유임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중종이 “윤탁이 유수로 나가는 일에 대하여 나도 헤아려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사람은 항시 병이 있는데, 성균관은 부지런히 사진해야 하는 소임이고 개성부는 한가한 자리이기 때문에 낙점(落點)한 것이나, 지금 아뢰는 말을 들어보건대 과연 지당하니 체직하라.” 하며 성균관 동지사를 유임시켰다.[『중종실록』중종 23년 5월 14일]

1529년(중종 24) 성균관 동지사인 그가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에 임명되었다, 그러자 그는 “한성부는 업무가 많은 곳인데 신은 성균관 동지사를 겸하고 있어 자주 사진(仕進)할 수 없습니다. 겸임하기가 미안하여 감히 사직합니다.”하였다. 이에 중종은 “전에 여론(輿論)을 들었다. 성균관 동지사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유생들이 전에 윤탁이 사유(師儒)로 합당하다는 상소가 있었다. 사장(師長)은 임무가 매우 중하니 좌윤의 직은 체직시키라.”고 하여, 성균관 동지사의 직임만 맡도록 하였다.(『중종실록』 중종 24년 9월 17일)

그는 관직에 임명된 이후, 홍문관과 예조에 잠깐 있었을 뿐, 거의 성균관에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는데, 그의 학문이 높아서 조광조(趙光祖) 등 여러 대신들에게 도학(道學)을 가르쳤고, 송인수(宋麟壽) · 이황(李滉)등에게도 강론을 하였는데, 영의정을 지낸 홍섬(洪暹)이나 판서(判書)를 지낸 원혼(元混)도 작위(爵位)를 불문하고 끝까지 제자(弟子)의 예절을 다하였다고 한다. 1534년(중종 29) 다시 개성부 유수로 나갔으나 1534년(중종 29) 11월 28일 세상을 떠났다.[『송자대전』 권154 「대사성 윤선생탁 신도비명」]

일화

윤탁과 관련되어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송자대전』 권154 「대사성 윤선생탁 신도비명」] 성균관 뜰에는 윤탁이 손수 심은 은행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그는 매번 배우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뿌리가 단단하면 그 지엽(枝葉)이 반드시 무성하다.” 하였는데, 500여년이 지난 오늘날 까지도 그 은행나무가 성균관에 살아남아서 그의 뜻을 잇고 있다.

1519년(중종 14) 7월 중종이 승지(承旨)한충(韓忠)을 보내 성균관에 어찬(御饌)을 내려 사생(師生)들을 접대하므로 이튿날 모든 사생이 입궐하여 사은(謝恩)하였다. 중종이 정전(正殿)에 나와서 윤탁을 인견하므로, 그가 정암(靜庵)조광조, 대사성김식(金湜)과 함께 물음에 답하고 나서 제생들을 거느리고 어전(御前)에서 글을 강(講)하였다. 9월에 는 중종이 문묘(文廟) 참배(參拜)를 마치고 명륜당(明倫堂)에 이르자, 제현(諸賢)들이 물음에 답하고 나서 제생들과 함께 『상서(尙書)』 · 『주역(周易)』 등의 글을 강론하였는데, 이 일은 그 당시 성대한 일로 전해졌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동쪽 기곡리(基谷里)에 있고,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신도비명(神道碑銘)과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54 「대사성 윤선생탁 신도비명(大司成尹先生倬神道碑銘)」, 『송자대전(宋子大全)』 권189 「대사성 윤선생탁 묘표(大司成尹先生倬墓表)」] 첫째 부인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현령(縣令)한사신(韓士信)의 딸이다. 자녀는 1남을 낳았는데, 1남 윤선지(尹先智)는 병마사(兵馬使)이다. 둘째 부인 고성 이씨(固城李氏)는 대사헌(大司憲)이맥(李陌)의 딸이다. 자녀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2남 윤선철(尹先哲)은 부정(副正)이고, 3남은 윤선정(尹先正)이다. 사위는 허주(許鑄)·허명(許明)으로 모두 음직(蔭職)을 받았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중종실록)』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조야집요(朝野輯要)』
  • 『국조보감(國朝寶鑑)』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동각잡기(東閣雜記)』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음집(淸陰集)』
  • 『퇴계집(退溪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