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문(朴好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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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3년(단종 1) = ?]. 조선 초기 세종(世宗)~단종(端宗) 때의 무신. 공조 참판(參判)과 함길도병마도절제사(咸吉道兵馬都節制使) 등을 지냈고,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에 추증되었다.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이징옥(李澄玉)의 난> 때 이징옥에게 살해되었다.

세종~단종 시대 활동

1419년(세종 1) 3월 무과(武科)에 장원급제하였다.[『세종실록(世宗實錄)』세종 1년 3월 26일] 1430년(세종 12) 사복시(司僕寺) 소윤(少尹)이 되었다가, 그 해 10월 장계를 잘못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직첩을 삭탈되었으나, 1433년(세종 15) 1월 직첩이 환급되었다.[『세종실록』세종 12년 6월 4일, 세종 12년 10월 29일, 세종 15년 1월 16일] 그 해 2월 호군(護軍)박원무(朴原茂)와 함께 서북면 변경에 출몰하는 야인 추장 이만주(李滿住) 등이 있는 곳에 가서 그들이 도둑질하는 진위(眞僞)와 그 종류를 비롯하여 파저강(婆猪江) 일대의 지형과 마을의 위치를 살피고 돌아왔다.[『세종실록』세종 15년 2월 10일, 세종 15년 3월 21일] 그리고 평안도도절제사(平安道都節制使)최윤덕(崔潤德)의 부장으로 출정하여 파저강 일대의 야인을 정발하였다.[『세종실록』세종 15년 5월 7일] 이어 6월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 봉상시(奉常寺) 윤(尹)이 되었고, 8월에는 대호군(大護軍)을 지냈다.[『세종실록』세종 15년 6월 3일, 세종 15년 8월 14일] 1434년(세종 16) 5월에는 상호군(上護軍)으로서 겸 사복시(司僕寺) 윤이 되었다.[『세종실록』세종 16년 5월 16일]

1436년(세종 18) 윤6월 중추원(中樞院)첨지사(僉知事)가 되었고, 그 해 11월 함길도회령절제사(咸吉道會寧節制使)가 되었으며, 다음 달인 12월에는 회령도호부판사(會寧都護府判使)가 되어 야인의 변경 침입에 대비하였다.[『세종실록』세종 18년 윤6월 24일, 세종 18년 11월 27일, 세종 18년 12월 3일] 그런데 그가 함길도회령절제사였을 때 야인과 교결하여 형제로 호칭하면서 군신 간을 이간시키는 것 등이 문제가 되었다.[『세종실록』세종 22년 7월 13일] 게다가 야인이 부동(浮動)하였을 때에, 변고에 대처할 일은 조금도 조치하지 않고 해임되기만을 바라서 병을 앓는다고 하여 의원을 보내도록 계청(啓請)하기도 하고, 의원에게 후한 뇌물을 주어서 거짓으로 병이 중하다고 아뢰도록 하여 해임되었다며 탄핵을 받았다. 이 죄는 참형(斬刑)에 해당되었다.[『세종실록』세종 22년 8월 8일] 그러나 그가 파저강에서 공을 세운 데다가, 오랫동안 북쪽 변경을 진수(鎭守)한 일 등 덕분에 특별히 사형이 면제되었다.[『세종실록』세종 22년 8월 24일] 대신 1440년(세종 22) 8월 장(杖) 1백 대에 처해진 후 여연(閭延)으로 유배(流配)되었다.[『세종실록』세종 22년 8월 26일] 그러다가 1447년(세종 29) 11월 삭천절제사(朔川節制使)가 되었다.[『세종실록』세종 29년 11월 1일]

1450년(문종 즉위년) 7월 중추원 부사(副使)가 되었고, 그 해 9월 공조 참판을 거쳐, 진하사(進賀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명(明)나라의 서울인 북경(北京)에 갔다.[『문종실록(文宗實錄)』문종 즉위년 7월 6일, 문종 즉위년 9월 2일, 문종 즉위년 9월 21일] 그리고 이듬해인 1451년(문종 1) 1월 진하사일성위(日城尉)정효전(鄭孝全) 등과 함께 돌아왔다.[『문종실록』문종 1년 1월 6일] 1452년(문종 2) 3월 의주목판사(義州牧判使)가 되었다.[『문종실록』문종 2년 3월 28일]

1452년(단종 즉위년) 10월 평안좌도도절제사(平安左道都節制使)가 되었고, 그 해 12월 평안우도도절제사(平安右道都節制使)가 되었다.[『단종실록(端宗實錄)』단종 즉위년 10월 22일, 단종 즉위년 12월 29일] 1453년(단종 1) 10월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였고, <계유정란(癸酉靖難)>으로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정권을 잡으면서 김종서(金宗瑞)의 심복이라는 이유로 파면된 함길도도절제사(咸吉道都節制使)이징옥(李澄玉)을 대신하여 함길도병마도절제사가 되었다.[『단종실록』단종 1년 10월 11일] 그러나 얼마 후 불만을 품은 이징옥이 난을 일어나면서 이징옥에게 살해되었다.[『단종실록』단종 1년 10월 25일, 『해동야언(海東野言)』 권2 「세조(世祖)」 ]

성품과 일화

박호문(朴好問)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활을 좀 잘 쏘고 또 총명하며 영리하였다.[『세종실록』세종 22년 7월 13일]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본래 경박한 사람이라는 평도 있다.[『세종실록』세종 22년 1월 19일]

시호와 후손

시호는 정무(貞武)이다. 1454년(단종 2) 1월 의정부 우찬성으로 추증되었고, 1455년(세조 1) 12월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었다.[『단종실록』단종 2년 1월 13일, 『세조실록(世祖實錄)』세조 1년 12월 27일]

아들은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박철손(朴哲孫)이다. 손자는 이조 참판박수종(朴壽宗)이며, 손자며느리는 양녕대군(讓寧大君)의 딸이다.[『미수기언(眉叟記言)』 권20 「朴]松堂先生碣銘(박송당선생갈명)」]

참고문헌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해동야언(海東野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