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몽(朴弼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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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68년(현종 9)~1728년(영조 4) = 61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영조(英祖) 때의 문신. 이조 참의(參議)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 등을 지냈다. 자는 양경(良卿)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광주(廣州)이다. 아버지는 박태진(朴泰進)이고,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는 김덕승(金德承)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박세환(朴世桓)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을 지낸 박황(朴潢)이다. <이인좌(李麟佐)의 난(亂)> 때 반란군에 참여하려다가 잡혀 능지처참 당했다.

숙종~경종 시대 활동

1710년(숙종 36)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방목(榜目)』] 그 해 10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36년 10월 27일] 1713년(숙종 39) 윤5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가 되었고, 그 해 7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714년(숙종 40) 2월 다시 세자시강원 사서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39년 윤5월 28일, 숙종 39년 7월 28일, 숙종 40년 2월 22일] 1716년(숙종 42) 6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는데, 그 해 <병신처분(丙申處分)>으로 소론(少論)노론(老論)에 의하여 밀려나면서 사헌부 지평에서 경성판관(鏡城判官)으로 좌천되었다.[『숙종실록』숙종 42년 6월 19일, 숙종 42년 7월 2일] 그 뒤 소론 중의 준소계열(峻少系列)의 주요 인물로 활약하였다.

1721년(경종 1) 12월 김일경(金一鏡) · 이진유(李眞儒) · 윤성시(尹聖時) · 정해(鄭揩) · 서종하(徐宗厦) · 이명의(李明誼) 등과 함께 상소하여, 왕세제(王世弟:후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김창집(金昌集) · 이이명(李頤命) · 조태채(趙泰采) · 이건명(李健命) 등의 노론 사 대신의 죄를 성토함으로써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일으켰다.[『경종실록(景宗實錄)』경종 1년 12월 6일] 그리고 얼마 후 사헌부 지평이 되었으며, 1722년(경종 2) 4월 홍문관(弘文館)부교리(副校理)가 되었다.[『경종실록』경종 1년 12월 6일, 경종 2년 4월 29일] 그 해 5월 사간원 헌납(獻納)과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고, 6월에는 광주부윤(廣州府尹)을 거쳐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경종실록』경종 2년 5월 19일, 경종 2년 5월 28일, 경종 2년 6월 18일, 경종 2년 6월 29일] 이어 그 해 8월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이 되었으며, 9월에는 승정원 승지(承旨)가 되었다가 10월에 다시 홍문관 부제학과 승정원 승지를 거쳐,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경종실록』경종 2년 8월 2일, 경종 2년 9월 18일, 경종 2년 10월 8일, 경종 2년 10월 14일, 경종 2년 10월 24일] 1723년(경종 3) 2월에는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이조 참의가 되었고, 그 해 6월 승정원 승지가 되었다.[『경종실록』경종 3년 2월 23일, 경종 3년 2월 28일, 경종 3년 6월 2일] 이어 10월에는 강화유수(江華留守)가 되었는데, 이듬해인 1724년(경종 4) 2월 왕이 특별히 실시하는 무과 시험인 관무재(觀武才) 제도를 부활할 것을 건의하여 윤허를 얻었다.[『경종실록』경종 3년 10월 17일, 경종 4년 2월 30일] 그 해 7월 다시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경종실록』경종 4년 7월 7일]

영조 시대 활동

1724년(영조 즉위년) 9월 참찬관(參贊官)을 겸하였고, 그 해 10월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으며, 11월에는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영조실록(英祖實錄)』영조 즉위년 9월 29일, 영조 즉위년 10월 13일, 영조 즉위년 11월 16일] 1725년(영조 1) 1월 1724년에 역적 김일경의 소하(疏下)에 들었다는 노론의 공격을 받고 제주(濟州)로 귀양을 갔다.[『영조실록』영조 1년 1월 2일] 1727년(영조 3) 10월 중추부(中樞府) 영사(領事)이광좌(李光佐)와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심수현(沈壽賢), 이조 판서(判書)오명항(吳命恒) 등이 임금께 아뢴 덕분에 육지로 나와 무장(茂長)으로 이배(移配)되었다.[『영조실록』영조 1년 1월 25일]

그런 가운데 1728년(영조 4) 3월 소론의 급진파인 이인좌가 청주(淸州)에서 <이인좌의 난>을 일으켰다.[『영조실록』영조 4년 3월 14일] 박필몽(朴弼夢)은 이 틈을 타서 승정원 도승지로 소명(召命)이 있었음을 청탁하고 교자(轎子)를 탔다. 그리고 칼을 차고 말을 탄 23명의 장사(壯士)를 거느리고 곧바로 반란에 가담한 종제(從弟) 태인현감(泰仁縣監)박필현(朴弼顯)의 진(陳)으로 달려갔다. 본현(本縣)에 이르러 박필현의 군사가 궤멸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교자를 버리고 가동(家僮)을 거느리고 도망을 쳐서 죽도(竹島)에 숨었다가 무장현감(茂長縣監)김몽좌(金夢佐)에게 붙잡혀 현옥(縣獄)에 갇혔다.[『영조실록』영조 4년 3월 26일, 영조 4년 3월 29일] 이후 서울로 압송되어 그 해 4월 6일 목이 베여 죽었으니, 그의 나이는 61세이었다.[『영조실록』영조 4년 4월 6일] 한편 1908년(순종 1)에 그의 관작이 회복되었다.[『순종실록(純宗實錄)』 순종 1년 4월 30일]

후손

부인은 이순장(李淳長)의 딸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남은 박사관(朴師寬)이고 차남은 박사침(朴師沈)이다. 박사관 또한 이인좌의 난 때 처형되었다.[『영조실록』영조 4년 4월 14일]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순종실록(純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