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선(朴仲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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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35년(세종 17)~1481년(성종 12) = 47세]. 조선 전기 세조·예종·성종 때에 활동한 무신. 행직(行職)은 병조 판서(判書)이고, 증직(贈職)우의정(右議政)이다. 자는 자숙(子淑)이다. 본관은 순천(順天)인데, 아버지는 돈녕부(敦寧府) 부지사(副知事)박거소(朴去疎)이다. 어머니 청송심씨(靑松沈氏)는 소헌왕후(昭憲王后)의 아우로 안효공(安孝公)심온(沈溫)의 딸이다. 증조부는 우의정(右議政)박가흥(朴可興)이고, 조부는 평양부원군(平陽府院君)의정부(議政府)지사(知事)박석명(朴錫命)이다. 중종비(中宗妃) 장경왕후(章敬王后)윤씨(尹氏)의 외조부이다.

세조 · 예종 시대 활동

음보(蔭補)로 충의위(忠義衛)에 들어갔다가 몇 번의 승진을 거쳐 부호군(副護軍)선전관(宣傳官)에 이르렀다. 1460년(세조 6) 7월에 무과(武科) 1등으로 급제하여 훈련원(訓鍊院) 부사(副使)를 제수받았고, 얼마 안 되어 지사(知事)가 되었다. 이 해 겨울에 예빈시(禮賓寺) 소윤(少尹)이 되어 선전관을 겸임하였다. 1461년(세조 7)에 한명회(韓明澮)가 서북 양계 체찰사(西北兩界體察使)로 나갈 때 보좌관이 되었다. 1462년(세조 8)에 통례원(通禮院) 부지사가 되었다가 군기감(軍器監)판사(判事)가 되었고, 이어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

1463년(세조 9) 3월에 병조 참의(參議)가 되었다. 1466년(세조 12) 3월에 병조 참판(參判)이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品階)를 받았다. 이듬해인 1467년(세조 13) 여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구성군(龜城君)이준(李浚) 휘하의 평로장군(平虜將軍)으로서 황해도 관군 500명을 인솔하여 난을 진압하였는데, 이 해 9월에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으로 병조 판서(判書)에 제수되고, 평양군(平陽君)에 봉해졌다. 1468년(세조 14) 8월에 평안도 절도사(平安道節度使)가 되었다가 다시 조정으로 들어와서 병조 판서가 되었다. 이 해(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獄事)>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3등이 되고,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으며, 1469년(예종 1) 10월에는 전라도 포도주장(全羅道捕盜主將)이 되었다.

성종 시대 활동

1469년(성종 즉위) 11월 말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왔다. 1471년(성종 2) 3월에 좌리 3등 공신(佐理三等功臣)이 되었다. 이 해 4월에 영안북도 절도사(永安北道節度使)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사직(辭職)하였다. 1476년(성종 7) 3월에 중추부 판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 명(明)나라 북경에 갔다가 같은 해 7월에 돌아왔다. 1477년(성종 8) 윤2월에 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가 되었다가 1478년(성종 9) 10월에 이조 판서가 되었다. 1479년(성종 10)에 돈녕부 판사가 되어 훈련원 지사를 겸임하였다. 그 뒤 3년째 되던 해인 1481년(성종 12) 8월에 병이 나서 그 달 27일 4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조정에서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우의정으로 증직하고 소양(昭襄)의 시호를 내렸다.

성품과 일화

박중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릴 때에 아버지를 여의었으나 스스로 스승을 찾아가 글을 읽어 대의(大義)에 통달하였다. 항상 군대를 거느릴 것이라고 자신의 뜻을 확실하게 말하였는데, 장성하여 무예(武藝)를 익히자 활 쏘는 것과 말 타는 것이 매우 뛰어나 명성이 우림(羽林)을 진동하였다. 그는 달리는 말 위에서 몸을 뒤집어 날아가는 공을 잡기도 하였으므로 사람들이 그의 날랜 용맹에 감탄하였다.

그는 타고난 자품이 아름다웠다. 온종일 사람을 대해도 한담 설화가 없었고 남의 시비를 말하지 않았으며, 또한 조정의 일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는 비록 교유한 바는 없었으나 대중이 모인 좌석에 이야기가 오고가면 입을 조금 벌리고 빙그레 웃으면서 마치 무지하고 어리석은 사람처럼 하였다고 한다. 이는 필히 높이 타고난 자품과 독실한 지조가 남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았다면 필시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하였을 것이다.

묘소와 추증

시호는 소양(昭襄)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금대산(金臺山) 도혈리(陶穴里)에 있다. 임사홍(任士洪)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우의정에 추증(追贈)되고, 평양부원군에 추봉(追封)되었다.

부인 양천허씨(陽川許氏)는 행호군(行護軍)허균(許稛)의 딸인데, 1남 7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박원종(朴元宗)이다. 1녀는 승평부부인(昇平府夫人)으로 월산대군(月山大君)이정(李婷)의 처이다. 2녀는 선전관(宣傳官)신무정(辛武鼎)의 처가 되었고 3녀는 이탁(李鐸)의 처가 되었으며 4녀는 한익(韓翊)의 처가 되었다. 5녀는 순천부부인(順天府夫人)인데, 윤여필(尹汝弼)에게 시집가서 낳은 딸이 중종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되었다. 6녀는 김준(金俊)의 처가 되었고, 7녀는 제안대군(齊安大君)이현(李琄)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예종실록(睿宗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중종실록(中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