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기(權斗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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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7년(인조25)∼1684년(숙종10) = 38세]. 조선 중기 현종~숙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여원(汝元)이다. 본관은 안동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승지권확(權鑊)의 손자이고 권우(權堣)의 아들인데, 백부 권후(權垕)의 양자가 되었다. 서경주(徐景霌)의 외손자이고, 대사간(大司諫)이합(李柙)의 사위이다.

현종~숙종 시대 활동

1669년(현종10) 정시(庭試)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예조 · 병조의 낭관(郎官)에 임명되었고, 1673년(현종14) 정언(正言)을 거쳐서,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1680년(숙종6) 여름에 <경신출척(庚申黜陟)>을 단행하여 남인(南人)들을 숙청 할 때,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임명되어, 명분상 악역(惡逆)에 관계된 자들을 기탄없이 탄핵하였다. 그러나, 협박에 못 이겨 따랐던 자들에게 관용을 베풀어, 사림(士林)의 여론을 주도하였다. 그해 가을에 장령(掌令) · 정언을 거쳐 사간(司諫)에 임명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81년(숙종7) 사성(司成)으로 있다가, 종부시(宗簿寺)정(正)으로 옮겼으며, 서원현감(西原縣監)으로 나갔다. <경신출척> 직후에 홍문록(弘文錄)에 들어갔으나 의정부(議政府)에서 탈락시켰는데, 1682년(숙종8) 임금의 특명으로 비로소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어 춘추관 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다.

1683년(숙종9) 교리(校理)로 승진하였는데, 그때 영부사(領府事)송시열(宋時烈)이 주장한 태조(太祖)의 시호에 ‘정륜 소의(正倫昭義)’ 등의 글자를 더 넣자는 안에 반대하다가, 그 안이 시행되자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두었다. 2년 가까이 집에서 병을 치료하다가 1684년(숙종10) 세상을 떠나니 나이 겨우 38세였다.

사후 추모와 묘소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성곡(星谷) 방주동(坊注洞)에 있으며, 친구 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백호전서(白湖全書)』
  • 『갈암집(葛庵集)』
  • 『항재집(恒齋集)』
  • 『서파집(西坡集)』
  • 『정재집(定齋集)』
  • 『명암집(鳴巖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