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협(鮮于浹)

sillokwiki
Silman (토론 | 기여) 사용자의 2017년 12월 22일 (금) 01:44 판 (XML 가져오기)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588년(선조21)∼1653년(효종4) = 66세]. 조선 중기 인조~효종 때 평안도 지방의 유일(遺逸). 자는 중윤(仲潤), 호는 돈암(遯菴)이다. 본관은 태원(太原)이고, 평안도 태천(泰川) 출신이다. 아버지는 평양숭인전(崇仁殿) 전감(殿監)선우식(鮮于寔)이고,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어모장군(禦侮將軍)이억수(李億壽)의 딸이다. 평양의 향선생(鄕先生)김태좌(金台佐)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선우씨(鮮于氏)의 족보를 보면, “은(殷)나라 태사(太師)기자(箕子)가 조선(朝鮮)의 임금이 되었는데, 그 아들 중(仲)이 우(于) 땅을 식읍(食邑)으로 삼았기 때문에 선우(鮮于)라는 복성(複姓)이 되었다.” 하였다. 그래서 선우씨가 기자를 모신 사당인 평양의 숭인전(崇仁殿)의 전감을 대대로 맡아왔다. 선우협의 아버지 선우식(鮮于寔)이 숭인전 전감에 선임되자 그의 집안은 태천에서 살다가 평양으로 이사하였다. 12살 때 아버지를 따라서 기자전(箕子殿)재실(齋室)에서 글을 읽었는데, 당시 평안도관찰사였던 월사(月沙)이정구(李廷龜)가 그가 지은 시(詩)를 보고 “이것은 신어(神語)에 가깝다.”라고 하며 감탄하였다고 한다.

1610년(광해군2) 나이 22세 때에 당시 평양 지방에서 이름난 선비 향선생(鄕先生)김태좌(金台佐)를 찾아가서 유교의 사서오경을 배웠는데, 3년 동안 『논어(論語)』와 『맹자(孟子)』 등의 4서를 익힌 다음에 『시경(詩經)』 · 『서경(書經)』 · 『주역(周易)』 등의 5경(經)을 깊이 천착(穿鑿)하였다. 1616년(광해군8)에서 1620년(광해군12)까지 4년 동안 부친상과 모친상을 잇달아 당하였는데, 상제(喪祭)를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하였다. 상중에 여묘살이를 하면서도 사서오경을 읽고 궁리하였는데, 자기가 혼자 독학(獨學)만 하고 선현(先賢)의 학문을 널리 배우지 않으면 고루(孤陋)함을 면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남부지방의 유명한 유학자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626년(인조4) 그의 나이 38세 때 경상도 안동(安東)의 도산서원(陶山書院)을 찾아가서 퇴계(退溪)이황(李滉)이 남긴 장서 수백 권을 열람하고 그 제자들과 토론하였다. 또 돌아오는 길에 인동(仁同)에 들러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을 찾아보고 성리학을 강론하고 성리학의 이론을 토론하였다. 또 당대 석학 신독재(愼獨齎)김집(金集)과 만나서 학문적 토론을 하였는데, 이것이 김집의 제자 송시열(宋時烈)이 선우협의 비문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다. 점차 그의 명망이 높아져서 관서 지방의 많은 사림(士林)들이 그를 따랐다. 조선 중기 인재의 등용에 북방 지역 출신이 소외되었던 까닭은 남방 지역처럼 지방 유림(儒林)의 주자학 연구가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치심궁리(治心窮理)와 입현무방(立賢無方)을 주장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사직서(社稷署)참봉(參奉)희릉(禧陵) 참봉 등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모두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1639년(인조17) 이경석(李景奭)이 추천하여 장악원(掌樂院)주부(主簿)로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또 1648년(인조26) 이경석이 그가 사장(師長) 의 직임을 맡길 만하다고 추천하여 인조가 그를 성균관 사업(司業)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효종 시대 활동

1649년 인조가 승하한 후, 그가 곡림(哭臨)하려고 서울에 오자, 조정에서 또 그를 사업에 임명하였으나, 그는 대궐에 나아가 사은(謝恩)하고 평양으로 돌아가 버렸다.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계획을 세우고 사방의 현사(賢士)들을 불러들였는데, 그때 다시 선우협을 사업에 임명하고, 본도(本道)의 관찰사로 하여금 서울로 올려 보내게 하였으나, 그는 사양하고 상경하지 않았다. 그때 그는 임금의 5가지 덕목으로, 학문을 좋아할 것, 거경(居敬)을 위주로 할 것, 천리(天理)를 밝힐 것, 천도(天道)를 체득할 것, 요순(堯舜)을 본받아야 할 것을 진언하였는데, 효종이 이것을 가납하였다. 1649년 효종이 남방의 송시열과 북방의 선우협을 초치하였는데, 그들은 서울에 와서 사직하고 잇달아 돌아가 버렸다. 그때 좌의정조익(趙翊)이 다시 은지(恩旨)를 내리고 그들이 머물도록 유시(諭示)하기를 청하고, 효종도 돌아가는 것을 매번 허락하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돌아가고 말았다. 효종은 북벌 사업에 남북을 대표하는 두 학자를 양 옆에 기둥처럼 포진시키려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1653년(효종4) 전 영의정이경석과 현 영의정김육이 그를 선비들의 사표(師表)로 삼을만하다고 추천하니 효종이 그를 사업에 임명하였다. 사은하려고 서울에 왔던 선우협은 여관[旅邸]에 오래도록 머물면서 곤궁하게 지내다가 평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에 이경석이 그가 서울에서 의지하여 살 길이 없어서 돌아갔으니 이는 조정에서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난다고 아뢰자 효종이 그에 대하여 아뢰지 않은 승정원을 질책하고 전지(傳旨)를 내려 특별히 명소(命召)하였다. 선우협이 사은(謝恩)하려고 며칠 동안 서울에 머물렀으나, 끝내 임금의 인대(引對)를 받지 못하고 물러나서 평양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평양으로 돌아간 그는 그해 12월 22일에 죽었는데 향년이 66세였다.

그의 저술로는 『돈암전서(遯庵全書)』 7권 5책이 남아 있다.

성품과 일화

선우협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깨끗하고 밝으며 바르고 청렴하였다. 언행(言行)을 항상 조심하였는데, 그는 인물에 대하여 평론하거나 정령(政令)에 대하여 시비를 따지는 자가 있으면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았다. 또 평생 정직하고 화평하게 살려고 노력하였는데, 그는 “마음을 정직하게 가지기란 지극히 어려운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이 66세에 갑자기 죽을 때 친족과 문인들을 불러서 일일이 작별을 고하고 편안히 세상을 떠났는데, 유학자다운 기풍이 있었다. 그는 일생동안 후진을 양성하는 데에 심혈을 기울여서, 관서 지방의 성리학을 일으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그를 ‘관서부자(關西夫子: 평안도 지방 공자)’라고 일컫고 존경하였다.

그는 학문을 연구할 적에는 조금도 해이함이 없었는데, 연구하다가 얻는 바가 없으면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른 것도 잊어버린 채 절대 포기하지 않았으며, 간혹 새로운 것을 얻으면 반드시 책에다 적어 두었다. 밤이면 베개에 기대어 옷을 입은 채로 선잠을 자다가 잠이 깨면 이불을 끼고 앉아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더러는 아침까지 밤을 꼬박 새기도 하였다. 그는 일찍이 학문의 어려움을 토로하기를, “학문에 요령을 터득하지 못하여 억울하게 30년을 허비하다가, 지금 늙어서 이제 조금 체득한 것 같다.” 하였다. 그는 특히 『주역(周易)』에 정통하여, 심성이기(心性理氣)를 깊이 연구하였다. 그의 역학(易學)에 관한 저술로는 『심학지요(心學至要)』 · 『역학도설(易學圖說)』 · 『태극변해(太極辨解)』 · 『대역리의(大易理義)』 등이 남아 있다.

묘소와 추증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묘소는 평안도 평양(平壤) 서쪽 연대산(煙臺山)에 있는데, 그의 문인들이 그 묘표를 ‘돈암선생(遯菴先生)’이라 세웠다.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그가 죽은 지 4년 후에 사림(士林)에서 의논하여 용산(龍山) 아래에 서원을 건립하였다. 평양의 용곡서원(龍谷書院)과 태천의 돈암서원(遯菴書院)에 제향되었다. 효종 때 특별히 사헌부 집의(執義)에 추증되었고, 고종 때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돈암전서(遯庵全書)』
  • 『국조보감(國朝寶鑑)』
  • 『미수기언(眉叟記言)』
  • 『서계집(西溪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자대전(宋子大全)』
  • 『순암집(順菴集)』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