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유(朴泰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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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8년(인조 26)~1686년(숙종 12) = 39세]. 조산 중기 숙종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다. 자는 사안(士安)이고, 호는 백석(白石)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박세당(朴世堂)이고,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금성현령(金城縣令)남일성(南一星)의 딸이다. 박태보(朴泰輔)의 형이다.

현종 · 숙종 시대 활동

1666년(현종 7) 봄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1681년(숙종 7)에 태릉 참봉(泰陵參奉)이 되었는데, 이 해 가을에 알성시(謁聖試)문과(文科) 을과(乙科)에 급제하였고, 12월에 검열(檢閱)로 임명되었다. 1682년(숙종 8)에 대교(待敎)로 승진하고,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병조 좌랑(佐郞)이 되었으며 얼마 후에 경기도사(京畿都事)가 되었다. 그해 가을에 호조에서 토지 조사를 할 때, 호조가 각 고을의 일을 맡은 자들에게 사실 조사를 하도록 하였지만, 이들이 이를 꺼려서 임의로 한두 군데만 조사하여 그대로 보고하자, 그는 “명령을 받고 앉아서 살피는 것은 옳지 않다.”하고 모두 조사하여 부실한 보고를 한 수령 5, 6인을 파직시켰다. 조사가 끝난 뒤에는 금년의 농사가 작년보다 못한데, 전표(田標)에는 오히려 논이 증가되었으니 이것은 각 고을에서 재해(災害)상황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간파하고 조정에 세미(稅米)를 감해줄 것을 상소하여 춘추세(春秋稅)의 각 반을 감면받았다.

1683년(숙종 9) 12월 조정으로 들어와 사헌부 지평이 되었다. 이때 어영대장(御營大將)김익훈(金益勳)이 역모가 있다고 조정에 밀고를 하였으나 역모 당사자들을 대질 심문한 결과, 이들의 혐의가 없음이 드러났다. 그러자 대각(臺閣)에서는 김익훈을 삭출(削黜)하라고 청하였고, 박태유도 지평 유득일(兪得一)과 함께 김익훈이 공상(功賞)을 탐내서 남을 위협하여 무고하였으니 멀리 유배 보내야 마땅하다고 탄핵하였다. 그러나 이 탄핵이 숙종의 비위를 거슬러 오히려 박태유가 거제 현령(巨濟縣令)으로 좌천되었다가 5월에 다시 정언(正言)으로 복직되었다. 이해 윤6월에 다시 고산도 찰방(高山道察訪)으로 좌천되었는데, 그는 낮은 직위임에도 거리낌 없이 남병사(南兵使) 이하를 모두 탄핵하였다. 심지어 감사(監司)의 잘못도 규탄하여 감사가 스스로 사직하기도 하였다. 숙종은 “그가 상관을 능멸하고 핍박한다.”고 의심하여 그를 평안도 찰방(平安道察訪)으로 전임시키려고까지 하였다.

그가 상중(喪中)에 있을 때 병을 얻은 뒤로 항상 건강하지 못한데다가 고산(高山)의 기후가 맞지 않아 1685년(숙종 11) 봄에 마침내 위독하여 들것에 실려 돌아왔다. 1686년(숙종 12)에 병이 더욱 심해져 마침내 이 해 3월 26일에 경도(京都) 우사(寓舍)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39세이다. 남아있는 글씨로 철원에 「김응하묘비(金應河墓碑)」, 「영상신경신비(領相申景愼碑)」, 「해백박동열비(海伯朴東說碑)」,「길목박동망갈(吉牧朴東望碣)」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박태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온순하고 자상하며 단정하고 성실하였다. 사람됨이 명백하고 화락하며 청렴하고 신중하여 평소에는 급한 기색과 절박한 말이 없었으나, 의로움을 보고 바름을 지킴에 있어서는 굳세어 그 지조를 뺏을 수 없었다. 부모를 섬길 때는 희로애락(喜怒哀樂)에 있어 한결같이 부모의 마음을 받들었으므로, 가까이서 봉양하면서 종일토록 어김이 없었고, 효성스럽고 사랑하는 정성이 안색(顔色)에 드러나 곁에 있는 사람을 격동시킬 정도였다. 어머니가 병석에 계실 때 앵두를 찾았으나 구하지 못했다 하여 종신토록 앵두를 먹지 않았고, 북쪽에 있을 때는 정위(庭闈)를 그리워하여 두어 달에 반드시 한 번씩 돌아가 뵐 것을 청하였으며, 역관(驛館)에 정자를 지어 거처하고 ‘망운(望雲)’이란 편액을 달아 그 마음을 담았다. 임금을 섬길 때는 마음에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그 말을 진달할 수 있었고, 때가 적절한지 적절하지 않은지는 헤아리지 않았다. 그가 초원(草原)에 있을 때 스스로 그 병을 근심하여 글을 써 동해(東海)에 던지면서 신(神)에게 고하기를, “만약 이 박태유가 불충불효(不忠不孝)하고 부정부직(不正不直)하며 청렴결백하지 않고 그 직책을 소홀이 했다면 신께서는 죽여주시고, 그렇지 않다면 신께서는 마땅히 살려 주소서.”라고 하였으니, 그가 평소의 행동이 신에게 질정해도 부끄러움이 없음을 자신함이 이와 같았다. 그는 명필로 이름이 높았는데, 제공(諸公)의 비석(碑石)이나 현판(懸板)이 대부분 그의 글씨였고, 종이 쪽지의 글자 하나라도 사람들은 모두 보관하여 보배로 삼았다.

묘소와 행장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석천(石泉) 선비(先妣) 묘의 오른쪽 산기슭 신향(申向)의 언덕에 있다. 아우 박태보(朴泰輔)행장(行狀)을 지었다. 첫째부인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참봉(參奉)김하진(金夏振)의 딸인데, 1녀를 두었다. 둘째부인 해주정씨(海州鄭氏)는 정직(鄭直力)의 딸인데, 2남을 두었다. 1자는 박필기(朴弼基)이고, 2자는 박필모(朴弼謨)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서계집(西溪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약천집(藥泉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