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업(閔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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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5년(선조38)∼1671년(현종12) = 67세]. 조선 중기 광해군∼현종 때의 유학자. 자는 자앙(子昻), 호는 양호(楊湖)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생부는 민우중(閔友仲)이며 생모는 김씨(金氏)이고, 양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민우맹(閔友孟)이며 양모는 한양조씨(漢陽趙氏)조양정(趙楊庭)의 딸이다. 생조부는 승지민선(閔善)이고, 양조부는 참판(參判)민준(閔濬)이다. 사계(沙溪)김장생(金長生)과 여헌(旅軒)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지만, 신독재(愼獨齋)김집(金集)의 가르침을 가장 많이 받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5년(광해군1) 나이 5세 때 5촌 아저씨인 민우맹의 집으로 양자를 가면서 양부모가 살던 양호(楊湖: 양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외숙 조찬한(趙纘韓)으로부터 글을 배웠는데, 그의 문하에서 이경석(李景奭) · 오숙(吳䎘) · 신천익(愼天翊)과 같은 유명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다. 1613년(광해군5) 나이 9세 때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는데, 그는 패륜(悖倫)을 저지르는 광해군을 보고 비분강개하여 과거를 보아 출세하려는 생각을 버렸다. 『맹자(孟子)』를 읽다가 성현(聖賢)의 학문이 따로 있음을 발견하고, 오로지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 나이 19세 때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서 유명한 유학자 김장생과 장현광이 소명(召命)을 받고 모두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민업(閔嶪)은 예물을 가지고 차례로 그들을 찾아가서 경의를 표하고 문하에서 수학하기를 청하였다. 김장생이 고령(당시 75세)과 병을 핑계로 원자(元子) 보도(補導)의 직임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자 그는 김장생을 따라 연산으로 내려갔다. 그의 문하에서 『대학(大學)』과 『주자가례(朱子家禮)』 등의 여러 책을 읽으며 성리학의 이론과 예학을 공부하였다. 이때 그는 나이 많은 아버지 김장생보다 젊은 아들 김집의 지도를 더 많이 받았다. 송시열(宋時烈) · 송준길(宋浚吉) · 강석기(姜碩期) · 최명길(崔鳴吉) 등과 같이 동문수학하였는데, 그들은 모두 벼슬에 나아가서 출세하였으나, 그는 출사(出仕)하지 않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636년(인조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생모 김씨 부인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난갔다.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나라 태종(太宗)홍타지에게 항복하였다는 말을 듣고, 북쪽을 향하여 대성통곡하고 바다에 빠져 죽으려고 하였으나, 어머니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0년 효종이 즉위하자, 김집은 제자 송시열 · 송준길 등과 함께 조정에 들어가 청나라를 정벌하는 <북벌론(北伐論)>을 계획하였다. 민업은 김집의 객관(客館)에 남몰래 왕래하면서북벌 정책을 계획하는 데 참여하였으나, 이 일에 대하여 일절 남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때 처음으로 경기전(慶基殿)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그 뒤에 내시(內侍) 교관(敎官)과 창릉(昌陵)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660년 현종이 즉위하자, 그는 다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는데, 가까운 친구가 한 차례 출사하여 사은(謝恩)하기를 권유하였으나, 그는 역시 이에 응하지 않았다. 이때 생모 김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서울의 생가에 머무는 것을 싫어하여, 양호(楊湖)의 양가로 내려갔다. 양호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 여유를 즐기며 거의 10년 동안 지냈다. 1671년(현종12) 7월 9일에 노병으로 서울의 생가에서 죽으니, 향년이 67세였다.

그때 송시열 · 민정중(閔鼎重) · 박세채(朴世采) 등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던 민업의 아들 민세익(閔世益)이 상례를 주관할 수 없다고 여겨, 민세익의 아들 민신(閔愼)으로 하여금 대신 참최복을 입고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를 승중(承重)하게 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큰 문제가 되었는데, 반대파가 “민신은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치고,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았으니, 이것은 바로 인륜의 막대한 변고입니다.”라고 공격하여, 송시열을 탄핵하고 민신을 먼 곳으로 유배시켰다.

그의 저서로 『양호유고(楊湖遺稿)』가 있다.

성품과 일화

민업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타고난 성품은 단정하고 어질었으며, 말과 행동이 법도에 맞았다. 또한 그 품은 뜻은 고결(高潔)하였으며 학문에 정통하여 이론이 확실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잠심(潛心)하여 이기(理氣)의 본원(本原)에 대하여 이이(李珥)의 설을 내세우고, 오로지 정학(正學)에 몰두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의 연구를 일생의 임무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의 절개와 지조는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더욱 드러났는데, 비록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화를 내거나 후회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오직 의(義)에 따라서 행하였을 뿐이고, 시비(是非)와 현사(賢邪)가 걸린 문제에 직면하면 그 사안에 따라 일정한 주견(主見)을 가지고 헤아려 판단하였다. 그러므로 일을 하는 데에 조금도 실수하지 않았다. 평소 세상의 도의가 더욱 어려워진다는 것을 깨닫고, 사물을 접하는 데 더욱 조심하여, 자기 뜻을 숨기고 자신의 몸을 감추었다. 가끔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하루 종일 바둑을 두며 한가롭게 지내면서도 침착하게 자기 뜻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신독재김집을 가장 따르고 존경하였는데,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 세 차례나 “사강(士剛: 김집의 자)” 하고 부르면서, “내가 이 분을 다시 만나보지 못하는 것이 한이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인천(仁川)에 있는데, 김집의 제자 박세채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부인은 전의이씨(全義李氏)인데, 자녀는 2남을 두었다. 장자 민세익은 일찍 정신병으로 폐인이 되어 그 아들 민신이 아버지 민세익을 대신하였다. 차자 민광익(閔光益)은 출계(出系)하여 그의 친동생 민급(閔岌)의 후사가 되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양호유고(楊湖遺稿)』
  • 『백호전서(白湖全書)』
  • 『신독재문집(愼獨齋文集)』
  • 『사계전서(沙溪全書)』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백호집(白湖集)』
  • 『노봉집(老峯集)』
  • 『남계집(南溪集)』
  • 『후재집(厚齋集)』
  • 『죽천집(竹泉集)』
  • 『도암집(陶菴集)』
  • 『연경재전집(硏經齋全集)』
  • 『중암집(重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