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민수(權敏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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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66년(세조12)∼1517년(중종12) = 52세]. 조선연산군~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숙달(叔達)이고, 호는 퇴재(退齋)이다. 본관은 안동으로 공주목사(公州牧使)권유순(權有順)의 손자이다. 병조 판서이보정(李補丁)의 외손자이고 김휘손(金徽孫)의 사위이다.

연산군 시대 활동

29세이던 1494년(성종25)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여, 1495년(연산군1) 홍문관 정자(正字)에 보임되고, 저작(著作) · 박사(博士)를 거쳐 부수찬(副修撰)으로 승진하였다. 1497년(연산군3) 사간원 정언(正言)을 거쳐서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으며, 이어 이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1504년(연산군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당시 홍문관 교리였던 동생 권달수(權達手)는 이에 항의하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권민수도 직언(直言)을 하다가 멀리 영외(嶺外)로 귀양을 갔다.

중종 시대 활동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귀양에서 풀려나, 2년 만에 통례원(通禮院)봉례(奉禮)에 임명되어, 군자감(軍資監)부정(副正) · 사헌부 집의 · 장악원(掌樂院)정(正)을 역임하였다. 1510년(중종5) 이문 정시(吏文庭試)에 장원하여, 중종이 마장(馬粧) 한 벌을 내려주었다. 1511년(중종6)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에 임명되었다가, 이듬해 부제학(副提學)으로 승진하였으며, 왜인(倭人)을 추문(推問)하는 경차관(敬差官)에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왜인을 접대하는 일에 전문적인 식견을 갖고 활동하였다.

1512년(중종7)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어,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가 1514년(중종9)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조광조(趙光祖) 일파의 박상(朴祥) · 김정(金靜) 등이 폐비 신씨(廢妃慎氏)의 복위를 추진하였는데, 권민수는 대사헌(大司憲)으로 대사간 이행(李荇)과 함께 이를 적극적으로 저지하였다. 이후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으로 옮겼다. 그리고 충청도관찰사로 나갔다가 1517년(중종12) 정월 22일 청주(淸州)의 공관(公館)에서 52세의 나이로 돌아갔다.

사후 무덤과 사평(史評)

묘소는 경상도 상주 함창(咸昌) 율곡(栗谷)에 있고, 남곤(南袞)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중종실록(中宗實錄)』 그의 「졸기」에서 사관(史官)은 “권민수는 젊어서부터 글을 읽고 글짓기를 잘하였기 때문에 명사(名士)의 무리가 되어 자못 인망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자품이 거칠고 용렬하여 기개(氣槪)를 분발하지 못하였으므로, 명유(名儒)김일손(金馹孫)이 농담하기를 ‘그대는 인품이나 재질이 모두 차상(次上)이다.’ 하였으니, 대개 그의 범상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그에 대하여 평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대동야승(大東野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해동잡록(海東雜錄)』
  •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
  • 『동문선(東文選)』
  • 『지퇴당집(知退堂集)』
  • 『퇴계집(退溪集)』
  • 『용재집(容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