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주(權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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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58년(세조4)∼1518년(중종13) = 61세]. 조선 중기 성종~중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자여(子輿)이고,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집의(執義)권격(權格)의 손자이며 권수(權壽)의 아들이고, 한가구(韓可久)의 외손자이다. 또 성종의 후궁인 숙원권씨(淑媛權氏)의 오빠로, 전성군(全城君)이변(李忭)과 경휘옹주(慶徽翁主)의 외숙이다.

성종~연산군 시대 활동

1480년(성종11) 사마시에 합격하였는데, 이때 여동생이 후궁(後宮: 숙의권씨)으로 뽑혔다. 그리하여 은총으로 서부 참봉(西部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이것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사양하였을 뿐만 아니라, 과거에도 응시하지 않았다. 1491년(성종22) 병조 판서허종(許琮)이 선전관(宣傳官)으로 추천하자, 생활이 곤궁하였던 그는 마지못해 취임하였다. 장례원(掌隷院) 사평(司評) · 사옹원(司甕院) 판관(判官) · 한성부(漢城府) 판관(判官) · 형조 정랑을 역임하였다. 연산군 중기인 1502년(연산군8) 사헌부 지평(持平), 1504년(연산군10) 사헌부 장령(掌令)의 청요직으로 승진하여 활동하였다. 그 뒤 종친부(宗親府)전첨(典籤)을 거쳐서, 외직을 자청하여 인천도호부사(仁川都護府使) · 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와 성주목사(星州牧使)를 역임하였다.

중종 시대의 활동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책훈되었다. 중종반정 이후에 과거를 보아, 50세이던 1507년 증광 별시에 급제하여, 사섬시(司贍寺)정(正) · 사복시(司僕寺) 정을 지내고, 공주목사(公州牧使)로 나갔다.

무덤과 업적

묘소는 경기도 장단(長湍) 북쪽 백목곡(柏木谷) 선산(先山)에 있는데, 김안국(金安國)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모재집(慕齋集)』 권12)

성주목사로 있던 시기가 비록 연산군의 폭정 시대였는데도, 권주는 선산부사(善山府使)유희철(柳希輟) · 김산군수(金山郡守)문근(文瑾)과 함께 ‘영남삼량(嶺南三良)’이라 불릴 만큼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모재집(慕齋集)』
  • 『사재집(思齋集)』
  • 『용재집(容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