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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일) 01:51 기준 최신판



중요 역사 기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 중 궁궐에 있던 춘추관을 제외한 지방에 소재한 사고의 별칭.

개설

사고는 실록각(實錄閣) 또는 사각(史閣)이라고도 한다. 외사고는 고려시대에 개경(開京)에 두었던 사고가 거란의 침입 등으로 자주 불타 역사 기록이 훼손되자 지방에도 사고를 세워 역사 기록을 보관한 데서 유래했다. 조선전기에는 읍치(邑治) 지역에 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산간으로 옮기고 사찰을 배정하여 사고에 대한 관리·감독을 강화했다. 외사고는 『조선왕조실록』 등 역사 기록이 사라지지 않고 현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기록 관리 체계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맹자(孟子)가 『춘추(春秋)』의 편찬 목적에 대해 난신적자(亂臣賊子)를 두렵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언명했듯이, 유가(儒家)의 역사관은 곧 현세 삶의 평가가 역사를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었다. 따라서 유가 사회였던 조선에서는 많은 역사 기록을 생산·보존하는 전통이 발달하였고, 그 기록을 보관하던 곳이 사고였다.

역사 기록은 국정에 수시로 참고할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실용적인 가치가 컸다. 아울러 역사 기록은 과거와 현세, 현세와 후세를 이어주는 문화적 성과이기도 했다. 또한 사회 변화에 따라 차츰 기록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실록도 그중 하나였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도 초기부터 사관(史館)을 두어 실록의 편찬·보관에 힘썼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소실당하자, 개경과 해인사 두 곳에 사고를 두어 소실에 대비했다. 이 해인사사고가 외사고의 출발이었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도, 처음에 한양의 춘추관(春秋館)을 두고, 충주에 외사고를 두어 고려시대의 전통을 이었다.

조직 및 역할

현재 그 외형을 확인할 수 있는 사고는 외사고뿐이다.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강화도 정족산사고나 복원된 적상산사고는 모두 주위에 담장을 두르고 그 안에 2층 누각식의 기와집 건물 두 동을 세운 구조로 되어 있다. 건물 두 동 가운데 하나는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는 사각(史閣)이고 또 하나는 선원각(璿源閣)이다. 당연히 지키는 사람들도 있어야 했다. 조선전기에 사고를 지키던 수직(守直)으로는 충주사고에 수호관(守護官) 5명, 별색호장(別色戶長) 1명, 기관(記官) 1명, 고직(庫直) 1명을 두었다. 조선후기에는 외사고들이 산중에 설치되었기 때문에 사찰에 부역이나 세금을 면제해 주고 사고를 지키게 하는 방법을 택하였다. 이 역할은 승군(僧軍)이 맡았다. 그리하여 적상산사고에는 승군이 20명 내외, 정족산사고에는 50명, 오대산사고에는 20명이 배속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승군의 수는 때에 따라 또는 사고에 따라 증감이 있었다.

외사고를 지키는 일은 수호 사찰의 주지를 예조(禮曹)에서 수호총섭(守護摠攝)으로 임명하여 수호 책임을 맡겼다. 조선후기 수호 책임을 맡은 사찰로는, 정족산(鼎足山)의 전등사(專燈寺), 적상산(赤常山)의 안국사(安國寺), 태백산의 각화사(覺華寺), 오대산의 월정사(月精寺)였다. 이 절에는 위전(位田)을 주어 사고를 지키는 데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게 했다. 외사고의 전반적인 관리 책임은 외사고마다 참봉(參奉) 2명을 임명하여 교대로 관리하게 했다. 또한 해당 지역의 수령이 수시로 관리 상태를 점검하였다.

사고 관리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보관 중인 『조선왕조실록』 등의 기록이 손상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창포(菖蒲)나 천궁(川芎) 같은 약재를 넣어 벌레를 예방했고, 3년에 한 번씩 포쇄(曝曬)를 하여 좀이나 습기로 인한 기록의 훼손을 막았다. 이 포쇄에는 중앙 춘추관의 한림(翰林)이라 불리는 전임 사관인 봉교(奉敎)·대교(待敎)·검열(檢閱)이 꼭 참석하여 실행했으며, 이런 관례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지켜졌다. 『조선왕조실록』의 보존 단계에서 『조선왕조실록』을 각 사고에서 봉심(奉審)·포쇄할 때에도 따로 포쇄식에 따라 의례를 수행하였다.

변천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처럼 초기부터 충주와 서울의 춘추관에 사고를 두었다. 이후 1439년(세종 21)에 경상도의 성주(星州), 전라도의 전주(全州)에 새로 사고를 설치했다. 이로써 조선전기의 4사고 체계가 갖추어졌으며, 『세종실록』 이후에는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활자로 간행하여 4사고에 한 부씩 보관했다.

그러나 임진왜란으로 사고가 모두 소실되고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만이 보존되었는데, 이는 그곳 선비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의 공로였다. 1592년(선조 25) 6월 일본군이 금산에 침입했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개인 재산을 털어 『태조실록』부터 13대 『명종실록』까지 804권의 『조선왕조실록』과 기타 사고에 소장되어 있는 도서를 정읍 내장산으로 운반했다. 이후 조정에 인계할 때까지 1년여 동안 번갈아 지켰다. 1593년 7월 조정에서는 사관을 내장산에 파견하여 『조선왕조실록』을 해주로 옮겼고, 그 뒤 해주에서 강화도로 옮겼다. 왜란이 끝난 뒤 1603년 7월부터 1606년 3월까지 2년 9개월 사이에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조선왕조실록』을 활자로 간행했는데, 이때 출판한 것은 세 부였다. 이로써 전주사고에 있던 『조선왕조실록』 원본과 간행본, 교정본을 합하여 모두 다섯 부의 『조선왕조실록』이 만들어졌다.

이들 『조선왕조실록』 중 한 부는 옛날과 같이 서울춘추관에 두었다. 다른 네 부는 강화도 마니산(摩尼山), 경상북도 봉화군 태백산(太白山),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妙香山), 강원도 평창군 오대산(五臺山)과 같이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심산유곡과 섬 지역을 택하여 사고를 설치하고 한 부씩 나누어 보관했다. 춘추관·태백산·묘향산에는 새로 간행한 판본을, 마니산에는 전주실록본을, 오대산에는 교정본을 봉안했다.

춘추관의 『조선왕조실록』은 1624년(인조 2)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 소실되었다. 묘향산의 『조선왕조실록』은 1633년 만주에서 새로 일어난 후금(後金)과의 외교 관계가 악화되어 가자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산으로 이전했다. 마니산의 『조선왕조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에 의하여 크게 파괴되어 낙권·낙장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마니산의 『조선왕조실록』은 현종 때 보수했으나 춘추관의 『조선왕조실록』은 복구하지 못했다. 그리고 마니산의 『조선왕조실록』은 1678년(숙종 4)에 같은 강화도 내의 정족산에 새로운 사고를 건축하고 그곳으로 이장했다.

그러므로 인조 이후의 『조선왕조실록』은 네 부를 작성하여 정족산·태백산·적상산·오대산 사고에 각각 1부씩 보관했으며 4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시대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정족산과 태백산 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 도서와 함께 조선총독부로 이관되었다. 적상산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장서각으로 이관했으며 오대산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은 도쿄대학으로 옮겨졌다. 도쿄대학으로 옮겨진 오대산본은 1923년 일본의 간토 대지진 때 일부를 제외하고 거의 다 탔고, 그 일부가 반환되어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다. 조선총독부에 이관했던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은 1930년에 규장각 도서와 함께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졌다. 장서각 소장 적상산본은 해방 직후 관리 소홀로 도난 사건이 발생하여 낙권이 많이 생겼는데 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현재 정족산본과 태백산본이 온전하게 남아 있는데, 각각 규장각과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경국대전(經國大典)』
  • 국사편찬위원회, 『사고지 조사 보고서』, 국사편찬위원회, 1986.
  • 오항녕, 『한국 사관제도 성립사』, 일지사, 2009.
  • 김경수, 「조선전기 사관과 실록 편찬에 대한 연구」, 『사학연구』62, 2001.
  • 신병주, 「『조선왕조실록』의 봉안의식과 관리」, 『한국사연구』115,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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