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시경(姜時儆)"의 두 판 사이의 차이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XML 가져오기)
(차이 없음)

2017년 12월 22일 (금) 01:38 판




총론

[1612년(광해군4)~1682년(숙종8) = 71세]. 조선 중기 현종(顯宗)~숙종(肅宗) 때 활동한 문신. 자는 경오(警吾)이다.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주거지는 전라도 영광(靈光)이다. 사평(司評)강학손(姜鶴孫)의 5대손이고, 부호군(副護軍)강극문(姜克文)의 손자이다.

현종~숙종 시대 활동

1652년(효종3)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보안찰방(保安察訪)에 임명되었다. 현종 초기 예조정랑과 병조좌랑을 거쳐 1665년(현종6) 북청판관(北靑判官)으로 부임하였는데 임지에서 기민(饑民)을 구제하여, 한 사람도 굶어죽은 자가 없었으므로, 1667년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임명되었으나, 대신이 “북로(北路)에 거듭 기근이 들었는데, 양리(良吏)를 바꾸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주장하여, 북청판관에 그대로 유임되었다.

1671년(현종12)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임명되어 조운(漕運)을 개혁하니, 조졸(漕卒)들이 그 혜택을 입고 칭송하였다. 1672년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을 거쳐서 1673년 사간원정언으로 옮겼다. 이때 간관(諫官) 중에 언사(言事)로 인해서 현종의 뜻을 거스른 사람이 있었는데, 강시경이 그 뒤를 이어 임금의 위엄을 피하지 않고 홀로 그 논의를 거듭 주장하다가 좌천되었다.

전라도 영광에서 은거 생활

1674년(현종15)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하여 사임하고 고향 전라도 영광의 옛집으로 돌아갔다. 벼슬길에서 은퇴할 생각을 품고, ‘도진강사(道津江舍)’를 지어서 여생을 마칠 장소로 삼았다. 또 고을에 사는 종족(宗族)들을 모아서 화목을 다지고, 종회록(宗會錄)을 스스로 기록하였다.

숙종 초년에 경상도도사(慶尙道都事)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영광 고을에 사창(社倉)을 설치하고, 퇴계(退溪)의 향약(鄕約)을 모방해서 고향 사람들로 하여금 젊은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게 하였다. 1682년(숙종8) 감기에 걸려서 갑자기 죽으니, 나이가 71세였다.

성품과 일화

윤증(尹拯)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있는데, 그 성품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강시경은 사람됨이 화평하고 단아하며 집안에서 행실이 자상하였다. 어버이가 살아계실 때에 아침저녁으로 부모님께 안부를 묻고 보살폈을 뿐만 아니라, 형제가 한 방에 모여서 오순도순 화목하게 지냈다. 일찍이 그림 그리는 화가로 하여금 그 자당(慈堂) 앞에서 형제들이 기거(起居)하는 모습을 그리게 하였는데, 그 조카 함양군수(咸陽郡守)강주필(姜周弼)이 그림에 서문을 붙이고 「효제도(孝悌圖)」라고 일컬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월주집(月洲集)』
  • 『수촌집(水村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