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숙옹주(徽淑翁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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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 = ?]. 조선 제9대 왕인 성종(成宗)의 딸. 봉호는 휘숙옹주(徽淑翁主)인데, 혜신옹주(惠愼翁主)라고도 한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어머니는 형조 판서(判書)김작(金碏)의 딸인 명빈 김씨(明嬪金氏)이다. 배다른 오빠가 제10대 왕인 연산군(燕山君)이며, 배다른 동생이 제11대 왕인 중종(中宗)이다. 본관은 풍천 임씨(豊川任氏)로, 임사홍(任士洪)의 아들인 풍원위(豊原尉)임숭재(任崇載)와 혼인하였다. 연산군 시대 때 시아버지 임사홍과 부마(駙馬) 임숭재가 연산군의 최측근으로 활약하면서 권력을 휘둘렀는데,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샀다.

임숭재와의 혼인

휘숙옹주는 성종과 명빈 김씨 사이의 3남 3녀 가운데 첫째 딸로, 생몰년은 전해지지 않고 있다. 다만 1491년(성종 22)에 혼인을 하였다는 것을 볼 때, 1482년(성종 13) 이전에 태어났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공주들은 10세 이후에 혼인을 하였기 때문이다. 휘숙옹주의 부마는 풍원위임숭재였는데, 그의 가문은 왕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우선 아버지 임사홍은 세종(世宗)의 둘째 형인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아들 보성군(寶城君)의 사위로, 효령대군의 손주 사위였다. 그리고 임사홍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남 임광재(任光載), 즉 임숭재의 큰 형은 예종(睿宗)의 딸인 현숙공주(賢肅公主)와 혼인을 하여, 풍천위(豊川尉)에 봉해졌다. 결국 임사홍의 큰 아들과 넷째 아들이 왕의 딸들과 혼인을 하였던 것으로, 임사홍 가문은 왕실과 겹사돈을 맺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혼맥에 따라 휘숙옹주는 사촌 언니인 현숙공주와 동서 사이가 되었다.

조선의 부마는 비록 직접적으로는 정치에 간여할 수 없었으나, 종친의 일부로 편입되면서 부와 명성을 얻는 지위였다. 이러한 부마를 둘씩이나 배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성종 대에 임사홍은 권력과는 거리가 멀었다. 1477년(성종 8)에 임사홍은 서얼 출신인 유자광(柳子光)과 함께 김언신(金彦辛)으로 하여금 현석규(玄錫圭)를 왕안석(王安石)과 같은 소인이라고 탄핵하도록 하였는데, 현석규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의 손자인 서원군(瑞原君)의 사위였다. 그러나 사헌부(司憲府)사간원(司諫院)에서 현석규를 옹호하면서 현석규의 탄핵과 관련된 논의는 찬반으로 팽팽하게 맞섰고, 당시 성종은 이 논의를 붕당(朋黨)으로 해석하며 매우 분노하였다. 그런 가운데 1478년(성종 9) 4월 1일에 흙비가 내리는 일이 생겼다. 대신들은 이것은 하늘의 경고이므로 금주령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임사홍은 흙비만으로 금주령을 내리는 것은 부당하다고 반대 의견을 밝혔다. 사실 임사홍의 의견은 성종의 뜻을 반영한 것이었으나, 이에 아랑곳하지 않은 대신들은 임사홍이 하늘의 뜻을 우습게 알고, 퇴폐 향락 풍조를 부추긴다며 임사홍을 탄핵하였다. 그런 가운데 임사홍이 현석규의 탄핵과 관련이 있다는 사실마저 밝혀지면서 그는 의주(義州)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이때 임사홍의 큰며느리인 현숙공주가 임사홍을 처벌하지 말아 달라며 눈물로 호소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치는 바람에 성종은 현숙공주의 뜻을 들어줄 수 없었다. 그러나 성종은 곧 임사홍을 소환하였는데, 이는 현숙공주의 간곡한 부탁과 함께 공주가 병이 났기 때문이었다. 조정 대신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하여 임사홍에 대한 유배를 청하였고, 성종은 공주의 병을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결국 다시 유배를 보냈으나, 2년도 채 되지 않아 임사홍을 사유(赦宥)하였다. 이렇듯 성종의 비호가 있기는 하였으나, 조정 대신들의 끊임없는 탄핵으로 임사홍은 성종 대에는 조정에서 활동할 수 없었다.

조정에서 소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임사홍의 막내 아들인 임숭재는 성종의 딸과 혼인을 하였다. 그런데 휘숙옹주와 임숭재의 혼인날인 1491년(성종 22) 8월 27일 임숭재의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옹주는 혼인 첫 날부터 이웃집에서 거주하게 되었다. 이를 두고 『성종실록(成宗實錄)』에서 사신(史臣)은 “임사홍이 소인(小人)으로, 불의(不義)로써 부귀(富貴)를 누렸으며, 그의 아들 임광재가 이미 공주에게 장가를 갔는데, 또 다른 아들이 옹주에게 장가를 갔으니, 복이 지나쳐 도리어 재앙이 발생하는 바람에 불이 그 집을 태워버린 것”이라고 논평하였다. 그리고 덧붙여 착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고 악한 사람에게는 재앙을 주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임사홍과 임숭재에 대한 당대의 평가가 상당히 좋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임숭재와 혼인한 휘숙옹주는 딸 셋을 두었다. 큰 딸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인 최국광(崔國光)과 혼인하였으며, 둘째 딸과 셋째 딸은 각각 연안이씨(延安李氏)이인수(李麟壽), 순창조씨(淳昌趙氏)조노성(趙老成)과 혼인하였다.

연산군의 시대

1494년(연산군 즉위)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휘숙옹주와 임숭재의 삶은 큰 변화를 맞이하였다. 연산군은 명빈 김씨의 자식들과 비교적 친밀한 관계였던 까닭에, 왕위에 오른 후 휘숙옹주에게 땅과 노비 등 물질적으로 많은 혜택을 주었다. 뿐만 아니라 춤과 노래에 일가견이 있던 휘숙옹주의 부마 임숭재 또한 매우 총애하였다. 그리하여 1501년(연산군 7) 7월에는 승정원(承政院)과 의정부에서 부마의 직품(職品)이 정해져 있다고 만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임숭재를 승진시켰다. 그리고 이 즈음에 휘숙옹주와 임숭재에 대한 연산군의 총애를 바탕으로 임사홍 또한 다시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1504년(연산군 10) 연산군의 어머니인 폐비윤씨(廢妃尹氏: 제헌왕후)의 죽음과 관련된 이들을 모조리 숙청한 <갑자사화(甲子士禍)>가 발생하였다. 그런데 <갑자사화>는 임숭재의 집에 놀러 온 연산군에게 임사홍이 폐비윤씨의 죽음에 관한 전말을 알려주면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임숭재와 임사홍은 이전보다 연산군과 더 가깝게 지내며, 그의 최측근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특히 임숭재는 장악원(掌樂院)제조(提調)에 임명되었는데, 장악원 최고 책임자에 임명된 파격 행보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연산군은 임숭재의 임용을 반대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처벌을 가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연산군의 큰 총애를 받던 임숭재는 주로 연산군의 사생활과 관련된 일을 하였는데, 이 무렵 연산군의 광기(狂氣)가 극에 달하였기 때문에, 임숭재의 업무 또한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1505년(연산군 11)에 임숭재는 다른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채홍준사(採紅駿使)에 임명되었다. 채홍준사로서 그의 업무는 경상도의 미녀와 준마(駿馬)를 구하여 연산군에게 바치는 것이었는데, 그러므로 그가 행차할 때면 도내 사람들이 모두 놀라 피신할 정도였다. 게다가 그동안 금지되었던 궁궐 내에 거주할 기녀들을 선발하고 관리하는 것도 그의 임무였는데, 이 모든 것들이 연산군의 유흥을 위한 것이었다. 임숭재가 이 업무를 잘 소화했기 때문에 연산군의 총애는 날로 커졌고, 그리하여 임숭재에 대한 탄핵이 올라올 때면 오히려 탄핵을 한 대신들이 처벌되었다. 이 덕분에 임숭재의 위세는 매우 당당해서, 당시 임숭재가 옥교(屋轎)를 타고 지나갈 때면 사람들이 “임금의 행차다”라고 말할 정도였다고 한다.

한편 연산군은 임숭재와 매우 가깝게 지내다 못해, 1505년 2월 창경궁(昌慶宮)과 임숭재와 휘숙옹주의 집 사이에 있는 40여 채의 집을 헐어내고 담을 쌓아 서로 통하게 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후 연산군은 시시때때로 임숭재의 집을 방문하였으면, 아울러 휘숙옹주에게는 노비를 비롯한 많은 하사품을 내렸다. 이와 관련해서는 휘숙옹주와 연산군이 간통을 하는 사이였기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연산군은 기생뿐만 아니라 조정 대신들의 딸 및 부인들 또한 잠자리 상대로 삼았으며, 뿐만 아니라 종친들과도 간통을 하였는데, 그 가운데 한 명으로 휘숙옹주가 지목되었던 것이다. 둘의 간통에 대해서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단순히 야사로만 치부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간통이 있었던 시기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창경궁과 휘숙옹주의 집 사이를 연결한 것과 연산군과 휘숙옹주의 간통이 관련이 있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그 해 11월 임숭재가 갑자기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나자, 연산군은 많은 부의(賻儀)를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까지 지어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한편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휘숙옹주와 간통한 일이 염려되어 중사(中使)를 보내 관을 열고 임숭재의 입에 무쇠 조각을 물려 진압(鎭壓)시켰다고도 전해진다.

중종반정 이후의 휘숙옹주

임숭재 사후에도 휘숙옹주는 연산군으로부터 토지를 하사받는 등 여전히 여러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1506년(중종 1)에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면서, 휘숙옹주는 이전에 누리던 권세를 박탈당하였다. 우선 임숭재가 채홍준사 등의 관직에 있으면서 연산군으로부터 받은 노비 및 집 등을 도로 국가에 돌려줘야 했고, 최고의 권력을 누리던 시아버지 임사홍이 처형되었다. 임숭재의 경우 이미 죽었으므로, 부관참시(剖棺斬屍)에 처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제기되었으나, 휘숙옹주의 부마이고, 옹주가 살아있었던 덕분에 부관참시는 면할 수 있었다.

이후 휘숙옹주의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는데, 야사에서는 반정 세력에 의하여 숙청되었다는 설과 돌팔매를 맞아 죽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한다. 그러나 『중종실록(中宗實錄)』에 따르면 중종이 휘숙옹주가 살아 있기 때문에, 임숭재의 부관참시와 가산 적몰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전하고 있다. 1530년(중종 25) 휘숙옹주의 사위 최국광이 주색(酒色)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옹주의 큰 딸이 어렵게 살자, 중종은 옹주의 딸은 성종의 친손주이며 왕실의 지친(至親)이라 하여 최국광이 기생들에게 준 재산을 되찾아서 옹주의 딸에게 주도록 하였다. 비록 시간이 많이 흐르기는 하였으나, 이와 같이 옹주의 딸 또한 성종의 손주라며 신경을 쓰는 것만 보아도 성종의 딸이었던 휘숙옹주가 야사와 같은 죽음을 맞았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이렇듯 휘숙옹주의 말년과 죽음에 대해서는 현재 분명하게 알 수는 없으나, 휘숙옹주의 묘소에 있는 묘표가 조성된 시기로 보아 1511년(중종 6) 이전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휘숙옹주의 묘소는 부마 임숭재와 합장묘로 조성되었는데, 현재 경기도 여주군 여주읍 능현리에 있다. 합장묘 앞에 있는 묘표의 앞면에는 ‘숭덕대부풍원위임공지묘(崇德大夫豊原尉任公之墓) 휘숙옹주지묘(徽淑翁主之墓)’가 새겨져 있으며, 뒷면에는 ‘정덕육년사월일(正德六年四月日)’이 새겨져 있다. ‘정덕(正德)은 명(明)나라 무종(武宗)의 연호로 정덕 6년은 1511년을 가리킨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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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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