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기(洪錫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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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06년(선조39)∼1680년(숙종6) = 75세]. 조선 후기 인조~현종 때 활동한 문신. 자는 원구(元九), 호는 만주(晩洲)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으로 당홍(唐洪)이고, 주거지는 충청도 청주(淸州)이다. 아버지는 생원 홍이중(洪頤中)이고, 어머니 고성남씨(固城南氏)는 현감남충원(南忠元)의 딸이다. 중추부 동지사홍순각(洪純慤)의 손자이고, 낙주(洛州)구봉서(具鳳瑞)의 문인이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7년(인조5) 22세로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음직(蔭職)으로 장릉(章陵)참봉(參奉)에 보임되었고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쳤다. 1641년(인조19) 호조 좌랑에 보임되었다가 이 해에 36세로 정시(庭試)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병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1642년(인조20)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항상 삼자함(三字銜)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45년(인조23) 만언소(萬言疏)를 올려서 시사(時事)를 논하다가, 해운판관(海運判官)으로 좌천되었다. 판관으로 있으면서 법대로 다스리자 그를 비방하는 말이 많아졌고 이 때문에 파직되어 고향 청주로 가 거의 10년 동안 은거하였다. 1654년(효종5) 예조 정랑에 임명되었고 그 해 문신 정시에 급제하여 인동부사(仁同府使)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대간에서 그가 너무 빠르게 승진하였다고 탄핵하여 면직되었다. 1656년(효종7) 성천부사(成川府使)에 임명되었다가, 양재찰방(良才察訪)으로 옮겼다. 이어 1658년(효종9) 형조 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59년(효종10) 단양군수(丹陽郡守)가 되었는데, 문교(文敎)에 힘을 기울여 사풍(士風)을 크게 진작시켰으므로, 백성들이 추사비(追思碑)를 세웠다.

현종 시대 활동

1661년(현종2) 어버이를 봉양하기 위해 충청도결성현감(結城縣監)으로 나갔다가, 가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3년 상을 마치자 예빈시 정에 임명되었다. 1665년(현종6)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나갔는데, 그가 강도를 잡아 처형한 것을 황해도관찰사서필원(徐必遠)이 계문(啓聞)하여, 그는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다. 그러나 평소 사이가 좋지 않았던 서필원을 의심하여,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67년(현종8) 서천군수(舒川郡守)가 되었는데, 현종이 온천에 거둥할 때 관원을 보내 뒷바라지를 하였다. 그 노고로 제주목사(濟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669년(현종10) 영광군수(靈光郡守)가 되었으나, 전라도관찰사김징(金澄)의 수연(壽宴)에서 심한 주사(酒邪)를 부리는 바람에 파면되었다. 1670년(현종11) 다시 성천부사에 임명되었는데, 1671년(현종12) 사헌부에서 그가 치적이 없고 술병으로 남의 웃음거리가 되었다고 하며 체차를 청하자, 현종이 그를 파직하였다. 1673년(현종14) 남원부사(南原府使)가 되었는데, 사간원에서 술로 인한 그의 포학함을 백성들이 견디지 못한다고 파직을 청하였다. 현종이 들어주지 않았으나 홍석기는 주사가 심한 것을 깨닫고, 남원부사로 재직 중이던 1674년(현종15) 벼슬할 생각을 버리고 고향 청주의 판교(板橋)로 돌아왔다.

한 동안 대문을 닫고 찾아오는 사람을 물리치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시를 지어 울적한 회포를 풀었다. 그의 시는 음조(音調)가 맑고 가사의 뜻이 비창(悲愴)하여, 사림에서 그 시를 서로 전해가며 애송하였다. 그때 그가 지은 시는 그의 저서 『만주집(晩洲集)』, 『존주록(尊周錄)』과 남용익(南龍翼)의 『기아(箕雅)』에 남아 있다. 만년에 검단산(檢丹山)에 ‘후운정(後雲亭)’이란 정자를 지었는데, 여기서 최치원(崔致遠)처럼 세상의 명리(名利)를 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세상을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심신을 수련하였다. 또 그는 화양동(華陽洞)에 은거하던 송시열(宋時烈)을 찾아가 교유하면서 시사를 담론하고 학문을 닦았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47) 1680년(숙종6) 2월 26일 노병으로 돌아가니, 향년이 75세였다. 그가 운명하기 며칠 전에 형조 참의에 임명되었으나, 어명이 이르기 전에 돌아갔다.

성품과 일화

홍석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미목(眉目)은 시원하게 생겼고 기품은 맑고 깨끗했다. 성품이 강직하여 권요(權要)를 섬기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리하고 자질이 뛰어났는데, 이미 4세 때 글을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커서는 낙주구봉서에게 글을 배웠다. 그가 하는 말에 사람들이 문득문득 놀라, 재주가 있다는 명성이 자자하였다. 시사(詩史)와 백가(百家)의 책은 한번 보면 모두 외울 정도로 총명했다. 문사(文詞)가 민첩하고 글을 짓는 재주가 매우 뛰어났으므로, 당대의 문장가 정두경(鄭斗卿)과 조복양(趙復陽)도 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고 한다. 그가 6세 때에 어머니가 별세하였으므로 그는 항상 일찍 어머니 여읜 것을 애통해 하고, 양친(兩親)이 있는 자를 보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 홍이중을 지성으로 섬기고 그 뜻을 어기지 않았다. 1661년(현종2) 결성현감으로 있을 때, 하루는 마음이 불안해지고 느낌이 이상해져 급히 말을 달려 청주로 귀성(歸省)했더니, 아버지가 며칠째 병석에 있었다. 그가 정성껏 간병하였으나, 아버지는 끝내 돌아갔다. 스승 구봉서가 죽었을 때 후사(後嗣)가 없자, 홍석기는 주선하여 장례를 치렀고, 마치 어버이를 섬기는 것처럼 평생 그 제사를 받들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효정(孝定)이다. 묘소는 충청도 청주 동쪽 주곡(酒谷)의 언덕에 있는데, 권상하(權尙夏)가 지은 묘갈명이 남아 있다.(『한수재집(寒水齋集)』) 나중에 도승지 ·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고, 아들 홍일우(洪一宇)와 함께 충효로써 정표(旌表)되었다.(『홍재전서(弘齋全書)』 권46) 부인 안동김씨(安東金氏)는 증 승지김발(金)의 딸로 아들 하나를 낳았다. 아들 홍일우는 진사에 합격하고, 나중에 사헌부 집의로 추증되었다. 측실에서 아들 셋을 두었는데, 홍일정(洪一鼎)과 홍일태(洪一泰)는 모두 무과에 급제하였고, 홍일재(洪一載)는 무과에 급제하여 중추부 첨지사를 지냈다.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한수재집(寒水齋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홍재전서(弘齋全書)』
  • 『약천집(藥泉集)』
  • 『백헌집(白軒集)』
  • 『창주유고(滄洲遺稿)』
  • 『퇴우당집(退憂堂集)』
  • 『식암유고(息庵遺稿)』
  • 『병산집(屛山集)』
  • 『순암집(順菴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