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액(篇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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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안팎과 문 위에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려 거는 액자.

개설

편액(扁額)의 ‘액(額)’은 사람의 이마를 뜻하는데 이는 건물 전면 높은 곳을 의미한다. 따라서 편액은 건물의 높은 곳에 걸기 위해 나무판, 종이, 비단 등에 쓴 액자를 뜻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편액과 현판(懸板), 두 명칭을 크게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으나 현판은 넓은 의미에서 편액과 기둥에 달아놓는 주련(柱聯) 등을 포함한 것이다.

편액은 궁궐, 사찰, 서원, 관아, 사대부들의 일반 주택 등에 건물 정면 문과 처마 사이에 설치되어 건물의 명칭, 내역, 제작 방법 등을 알려주는 건물의 대표 역할을 하였다. 편액에 사용된 글씨는 왕은 물론 당대 최고의 명필들이 쓴 서예 작품들로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유래

편액의 ‘편(扁)’은 ‘서(署)’의 뜻으로 문 위에 제목을 붙인다는 뜻이다. 서서(署書) 또는 방서(榜書)에서 유래하였으며 한(漢)나라 때부터 사용되었다. 동한(東漢)시대 허신(許愼)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진대(秦代)에 있었던 8가지의 서체인 ‘팔서(八書)’ 가 나오는데, 서서는 그중 여섯 번째로 소개되는 서체이다. 주로 고대 중국에서 궁전(宮殿), 문액(門額)에 쓰던 큰 글자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기 이미 편액에 쓰는 글씨가 따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 고조유방(劉邦)이 재위 6년인 기원전 201년에 궁궐을 지었는데 재상이던 소하(蕭何)가 ‘창룡(蒼龍)’과 ‘백호(白虎)’라는 서서를 썼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위(魏)나라의 위탄(韋誕)이 능운대(凌雲台)의 제액(題額)을 쓴 것, 동진(東晉)의 왕헌지(王獻之)가 태극전의 액자(額字) 의뢰를 거절한 고사 등에서 중국에는 오래전부터 편액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을 보면 삼국시대부터 편액이 있었다. 현재 충청남도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편액은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현재의 편액은 원본은 아니며 여러 번 복각을 거친 것이지만 삼국시대 당대의 명필들이 편액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 고려시대에는 『삼국유사』「보양이목(寶壤梨木)」조에 937년 보양(寶壤) 법사(法師)가 폐사를 중건할 때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한 기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공민왕이 경상북도 성주의 ‘인흥사(仁興寺)’라는 현판을 쓴 기록 등을 통해 편액이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대부분의 편액은 조선시대의 것으로 조선시대에는 궁궐, 사찰, 도성, 향교, 서원, 일반 주택에까지 편액이 건물의 상징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요소로 일반화되었다.

내용 및 특징

(1) 특징

건물의 편액은 대부분 가로로 걸기 때문에 횡액(橫額)이라고 하였으며 글씨의 경우 세로로 쓰기도 하였다. 사용된 서체는 전서(篆書), 예서(隸書), 해서(楷書), 행서(行書) 등으로 다양하며 드물게 초서(草書)로 된 것도 있다. 대부분은 큰 글씨인 대자(大字)였기 때문에 이런 글씨를 액자라고 하였으며 짧은 명구는 가로로 쓰고 길이가 긴 시문들은 세로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고려말 조선초에는 중국 원나라에서 들어온 설암체(雪庵體)가 대자 글씨의 모범으로 여겨졌다. 액체는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도록 뚜렷하고 굵게 써야 하며 평소에 쓰는 글씨와 다르게 써야 했다. 필획은 근정하면서도 근골이 돋보이는 강건한 글씨체로 해서가 선호되었다.

편액에는 낙관(款識)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낙관을 할 경우 마지막 글자의 맨 아래 끝에 맞추어 찍어 자기를 낮추어서 표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조선시대에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액체를 쓰는 방식은 김규진(金圭鎭), 이삼만(李三晩)까지 지켜졌으나 1894년 갑오개혁 이후 쇠퇴하였다.

편액은 건물의 얼굴에 해당될 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왕의 어필(御筆), 당대 명필 등이 쓴 글씨로 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옛 명필들의 글씨에서 집자를 하거나 활자체 등을 사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편액은 당대 명필들의 글씨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서예 자료가 된다.

편액의 규격은 건물의 넓이와 높이, 사용 목적에 따라 결정되었으며 액판과 나무판 가장자리의 튀어나온 부분인 변죽으로 구성되었다. 건물의 명칭을 짓는 것만큼이나 의장적인 요소도 상당히 중요하게 여겨졌는데 중요한 건물일수록 격식에 어울리는 서체와 장식을 하였다. 글씨는 먹, 분청, 호분, 금니, 은니 등을 사용하여 썼으며 특히 왕과 왕비가 거처하는 궁궐의 전각에는 변죽에 칠보문(七寶文), 화문(花紋), 운문(雲文) 등을 새겨 화려하게 꾸미기도 하였다.

(2) 내용

조선시대 편액에 쓴 건축물의 명칭은 건물의 성격에 따라 정해졌다. 궁궐은 유교의 통치 이념을 표현한 내용이 많았으며 사찰의 경우 불교 관계 용어, 서원이나 향교는 유교 관계 내용이 많았다.

궁궐이나 문루의 편액은 경전이나 유교 관련 문헌을 바탕으로 오행(五行)의 원리에 맞추어 지은 것이다. 각 궁의 정문에는 공통적으로 ‘화(化)’ 자를 사용하였는데, 경복궁은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은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은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은 흥화문(興化門)으로 명명하였다. 정전(正殿)의 명칭에는 ‘정(政)’ 자를 사용하여 경복궁은 근정전(勤政殿), 창덕궁은 인정전(仁政殿), 창경궁은 명정전(明政殿), 경희궁은 숭정전(崇政殿) 등으로 지은 것이다. 이런 명칭은 유교 국가로서 조선의 정치 철학이 담겨있다.

사찰의 편액은 건물에 모신 주존불(主尊佛)의 성격을 중심으로 명명하였으며 사찰의 중수, 중건에 관한 기문, 상량문 등의 내용을 적은 다양한 종류의 편액이 전하고 있어 사찰 연구에 많은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서원은 조선중기 이후 학문 연구와 사설 교육 기관인 동시에 향촌 자치 운영 기관으로 편액을 사액 받음으로써 서원의 위엄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에 많은 서원이 사액을 요청하였다.

사대부가의 편액은 주인의 학문과 지위에 걸맞게 쓰여졌으며 유명한 글귀, 가훈 등을 새기거나, 사대부들이 벗들과 교유하며 주고받은 시문 등이 쓰여 당대 지식인들의 교유 관계 등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참고문헌

  • 김일두, 『명찰편액순력』, 한진출판사, 1979.
  • 홍윤식, 『한국 사찰의 편액 주련』, 대한불교진흥원 출판부, 1999.
  • 이정섭, 「현판의 이해」, 『고궁의 현판』, 예술의 전당,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