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정전(崇政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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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후기 경희궁의 정전(正殿).

개설

경희궁은 광해군 때 창건한 궁궐이다. 이곳의 정전인 숭정전에서는 조회(朝會)를 비롯하여 왕실의 공식 행사가 열렸다. 숭정전은 일제 강점기 때 조계사(曹溪寺)에 넘겨졌고, 현재는 서울특별시 중구에 위치한 동국대학교에 있다. 현재 경희궁 터에 있는 숭정전은 1980년 경희궁 복원 사업 과정에서 복원된 것이다.

위치 및 용도

조선후기 숭정전 남쪽에는 정문인 숭정문(崇政門)이 있고 숭정전 뒤로는 자정문(資政門)이 있어 이 문을 통하여 편전인 자정전(資政殿)으로 연결된다. 「서궐도안(西闕圖案)」을 보면, 정문에서 정전에 이르는 길이 지금과 다르다. 현재는 숭정문 앞쪽으로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興化門)이 있지만 원래 위치는 아니다. 그림에서 흥화문은 궁궐의 남동쪽에 위치하여 동향을 하였다. 흥화문을 지나면 금천교가 나오고 금천교를 건너면 경희궁의 중문을 지나게 되며 여기서 한참을 가서 ㄴ자로 꺾어 들어간 위치에 숭정문이 나온다. 숭정문을 지나면 품계석이 놓인 숭정전이 위치한다.

숭정전에서는 조참(朝參)이나 상참(常參)과 같은 조회와 즉위식, 책봉례 등이 행해졌다. 경종, 정조, 헌종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또 나라의 경사를 맞아 다양한 축하 의례를 행하거나 잔치를 베풀었고, 사신 접견과 이들을 접대하기 위한 연회가 이루어졌다. 숭정전은 정시(庭試), 강경시험(講經試驗), 고강(考講), 칠석제(七夕製)를 여는 시험장이 되기도 하였다. 조강(朝講), 주강(晝講)을 열어 국왕이 유학경서를 강론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으며 이를 통하여 유교의 이상 정치 실현 의지를 보여주었다. 일식이나 월식이 있을 때 왕이 행하는 의식인 구식(救蝕)을 거행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국왕이 처음 상복으로 갈아입거나 선왕의 신주를 조성하고 봉안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변천 및 현황

광해군에 의해 창건한 경희궁은 1617년(광해군 9)에 짓기 시작하여 1620년(광해군 12)에 완공되었다. 경희궁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 숭정전이 먼저 완공되어 1617년 11월 15일에 경희궁 숭정전의 상량문을 12월에 미리 지어 올리도록 하였다(『광해군일기』 9년 11월 15일). 그리고 다음 해인 1618년(광해군 10) 정월 보름 뒤에 상량하도록 명하였다.

숭정전은 이후 별다른 훼손 없이 조선후기 동안 경희궁의 정전으로 존재하였다. 1829년(순조 29)에 화재가 일어나 경희궁의 내전 건물 대부분이 소실되었을 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순조실록』 29년 10월 3일). 그러나 일제 강점기 때 경희궁 터에 경성중학교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1926년에 헐려서 조계사에 팔렸다. 현재는 동국대학교에서 정각원(正覺院)이라는 이름의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숭정전은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었다. 1980년 경희궁 터가 사적으로 지정되면서 차차 본래 경희궁의 모습을 되찾기 시작하였으며, 현재 경희궁의 본래 자리에 숭정전이 복원되어 있다.

형태

숭정전은 정면 5칸, 측면 4칸 건물이며 주심포식에 단층 팔작지붕을 하고 있다.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勤政殿)과 창덕궁의 정전인 인정전(仁政殿)은 다포식에 중층 지붕이며, 창경궁 명정전(明政殿)과 덕수궁 중화전(中和殿)은 단층 지붕이지만 다포식 건물인 데 비하여 다소 소박한 모습이다. 이것은 광해군대 경희궁을 지을 당시 왕이 정식으로 생활하기 위한 궁궐이 아닌 임시로 머물기 위한 용도로 지었기 때문인 듯 하다. 경희궁이 정식으로 궁궐 명칭이 주어지지 않았을 때 불렀던 이름은 서별궁(西別宮)이었다.

조선중기 궁궐 건축물은 남아 있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에 경희궁 숭정전은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1627년(인조 5) 10월 28일 세자빈의 납채례를 행했다(『인조실록』 5년 10월 18일). 납채는 신랑 집에서 청혼 서한을 보내서 혼인 의사를 밝히는 의례를 말한다. 같은 해 11월 20일에는 왕세자빈의 납징례, 11월 21일에는 고기례를 행했다(『인조실록』 5년 11월 21일). 납징례는 혼수를 보내는 일이고 고기례는 혼인 날짜를 알리는 일이다. 12월 4일에는 세자빈을 책봉하는 예를 행했고(『인조실록』 5년 12월 4일) 12월 27일에는 왕세자가 초례와 가례를 행했다(『인조실록』 5년 12월 27일). 이러한 의례가 모두 숭정전에서 이루어졌다.

이때 세자빈으로 책봉된 사람이 민회빈강씨(愍懷嬪姜氏)로 인조의 며느리이자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부인이다. 1627년에 세자빈이 되었다가 병자호란으로 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귀국 후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의 행실이 문제되어 인조의 홀대를 받고 급사하였고, 이후 세자빈은 인조 독살 사건에 연루되어 사사(賜死)되었다. 세 아들은 제주도로 귀양 가서 그중 두 명이 사망하였고, 노모와 4형제는 모두 처형되거나 장살(杖殺)되었다. 1718년(숙종 44)에 소현세자빈이 복위되면서 숙종이 시호를 민회(愍懷)로 정하였는데,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게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에서 취한 것이라고 하였다.

참고문헌

  • 『궁궐지(宮闕志)』
  •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유리건판: 궁궐1』, 국립중앙박물관, 2007.
  • 명지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경희궁 영조 훼철관련 사료조사 및 활용방안 연구』, 서울특별시, 2004.
  • 명지대학교 부설 한국건축문화연구소, 『경희궁 숭정전 발굴조사 보고서』, 서울특별시, 1990.
  •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편, 『궁궐지Ⅱ: 창경궁·경희궁·도성지』,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6.
  • 최종규, 「경희궁 복원을 위한 전각배치에 관한 연구」, 명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9.
  • 홍석주, 『조선조 광해군대의 궁궐건축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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